정승열 법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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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페소 시내에서 약 6㎞ 떨어진 에페소 유적은 1859년 영국의 건축가이자 고고학자인 우드(J.T.Wood: 1821~1890)가 원형극장(Efes Theatre)을 발굴하면서 시작되었다.

1858년 터키를 여행하던 우드는 에페소 유적을 둘러본 뒤, 대영박물관의 후원을 받아 원형극장과 아르테미스 신전(Temple of Artemis)을 발굴했다.

그 뒤를 이어 1895년 오스트리아 고고학회의 후원으로 아고라(Agora)와 켈수스 도서관 등을 발굴했는데, 찬란했던 에페소 유적은 현재에도 발굴작업 중이다.

따라서 대체로 BC 6세기에 건축된 거대한 아르테미스 신전, AD 1세기경 로마제국 시대에 소아시아에서 가장 큰 로마식 건축물인 도미티아누스 신전(Temple of Domitian), 켈수스 도서관(Library of Celsus)과 원형극장 등이 눈여겨볼 만한 유적이라고 할 수 있다.

피온 산 남쪽에 바다를 향해 건설되었던 에페소 유적에 입장은 남문 매표소와 북문 매표소 두 곳이 있는데, 정문인 북문 매표소 앞이 버스종점이자 택시정류장이어서 남문보다 훨씬 편리하다.

패키지여행일 때에는 대형버스가 복잡한 정문이 아닌 남문 매표소 앞에 여행객을 하차시킨 뒤 시간에 맞춰서 정문으로 이동하여 승차시키는 것이 보통이지만, 자유여행객이라면 당연히 정문으로 들어가는 것이 여러 모로 좋다.

다만 유념할 점은 에페소 유적은 캄보디아의 앙코르와트 유적처럼 온통 대리석 바닥과 건물뿐인 데다가 시원한 나무 그늘이나 휴식시설이 없고, 심지어 화장실조차 매표소 부근에만 있어서 파라솔이나 우산, 모자, 타월, 음료수 등을 준비하는 것이 절대 필요하다.

1. 에페소 유적 정문
1. 에페소 유적 정문

정문에서 고대도시로 들어가 울창한 소나무 숲길을 빠져나가면 오른편은 에페소 항구로 통하는 길이고, 왼편은 에페소 유적지로 가는 삼거리이다.

이곳에서 에페소 유적의 중간쯤 되는 미트리다테스 문(Gate of Mazeus & Mithridates)과 켈수스 도서관(또는 셀수스 도서관)이 있는 곳까지 대리석으로 포장하여 쭉 뻗은 길을 ‘대리석 거리(Marble Street)’ 혹은 ‘아케이드 거리’라도 하는데, 이 거리는 1세기경 에페소에서 가장 웅대한 아르테미스 신전으로 통하는 ‘성스러운 길’로 조성되었다.

2000 년 전에 대리석으로 도로를 포장하고, 아름다운 문양까지 그린 에페소인들의 풍요로움이 엿보인다.

1-1. 에페소 유적 소나무숲
1-1. 에페소 유적 소나무숲
1-3. 에페소유적 지도
1-3. 에페소유적 지도

에페소 유적의 첫 방문지는 항구에서 에페소로 들어오는 길목이자 대리석 거리의 출발점에 있는 원형극장(Efes Theatre)이다. 원형극장은 헬레니즘 시대에 처음 조성되었지만, 현재의 유적은 1~2세기 로마제국 시대에 만든 것이다.

즉, 37년 폭군 칼리굴라(Caligula)가 근위대 장교에게 살해된 후 그의 숙부 클라우디우스(Claudius: 37~41)가 로마 황제로 추대되었는데, 클라우디우스는 소아마비로 오른쪽 다리가 불편한 장애자였으나 근위대의 강권으로 황제가 되었다.

클라우디우스 시대에 착공하여 네로 황제(Nero: 54~68) 시기에 완성된 원형극장은 로마제국 대부분 도시에 건설한 야외극장처럼 산기슭의 경사지를 이용하여 부채꼴 모양으로 지었는데, 현대식 야구경기장처럼 중앙무대를 향하여 3단 22계단으로 계단식 좌석을 만들었다.

관중석의 1층은 19줄, 2층 20줄, 3층 23줄 등으로 위로 올라갈수록 넓어지는 부챗살 모양이고, 18m 높이의 중앙무대 맨 위에는 갤러리를 만들어서 원형극장의 품위와 함께 음향효과를 더하여 연극공연이나 각종 경기를 벌였다.

2. 원형극장
2. 원형극장

 그런데, 원형극장은 운동장 밑에 항아리를 묻어서 마이크가 없더라도 멀리까지 소리가 크게 울리게 하는 독특한 기술로 건설됐는데, 이렇게 과학원리를 이용한 에페소인들의 건축술이 얼마나 뛰어난지 짐작하게 한다. 지금도 매년 여름 이곳에서 그리스 고전극을 상영한다고 한다.

 원형극장은 직경 154m, 높이 34m로서 약 25,000명을 수용할 수 있다고 하는데, 로마제국은 대개 도시 인구의 1/10 규모로 경기장을 지어서 이것으로써 에페소의 인구를 추정할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원형극장은 그리스도교 박해 시기에는 기독교인들을 몰아넣고 검투사 경기와 사자 경기를 치르는 장소로도 사용되었으며, 또 사도 바울이 우상숭배금지와 기독교 전도를 하자 시장(agora)에서 아르테미스 여신상 모형을 팔던 은장(銀匠) 대표 데메드리오가 수입이 크게 줄자 다른 상인들과 시민들을 선동해서 사도 바울을 끌고 가서 난동을 부린 곳이기도 하다(사도행전 19: 21~40).

2-1. 원형극장 내부
2-1. 원형극장 내부

대리석 거리의 오른쪽은 아고라 광장인데, 아랫부분이 상인들이 장사하던 아고라이고, 윗부분이 시민들의 광장인 아고라이다. 아고라의 전면인 대리석 거리를 아케이드 거리라고 하는 것도 아고라를 화려하게 장식한 측면도 있는데, 넓은 아고라에는 에페소의 영광을 말해주듯 코린트 양식의 둥근 돌기둥들만 서 있다.

대리석 거리와 이어지는 크레디아 거리(또는 사제의 거리, Curetes) 는 약간 왼편으로 구부러졌는데, 이곳에서 켈수스 도서관과 마제우스 미트리다테스 문이 두 거리를 나누는 역할을 하고 있다.

3. 아케이드거리
3. 아케이드거리
3-1. 아케이드 거리 대리석그림
3-1. 아케이드 거리 대리석그림

켈수스 도서관은 소아시아 총독이었던 줄리아스 켈수스의 아들이자 로마의 원로원의원 줄리우스 켈수스가 135년 부친의 업적을 기리며 세운 도서관이다.

그는 지하에 아버지의 무덤을 만들고, 무덤 위에 화려한 코린트 양식의 기둥 8개씩 세운 2층 도서관을 세웠는데, 도서관은 두루마리형 양피지로 만든 책 1만 5천 권을 소장하여 알렉산드리아, 페르가몬에 이어 ‘로마 3대 도서관’ 이었다.

켈수스 도서관은 지진으로 무너졌지만, 지금까지 견고한 벽면에는 화려한 문양과 글자들이 새겨져 있다. 도서관에는 세 개의 출입문이 있는데, 1970년 오스트리아 발굴팀이 복원한 지혜(Wisdom, Sophia), 미덕(Virtue, Arete), 지성(Intelligence, Ennoia), 지식(Knowledge, Episteme)을 상징하는 4명의 여신상이 서 있다.

그러나 땅속에서 발굴한 4개의 여신상 진본은 발굴작업을 맡았던 오스트리아의 ‘에페소 박물관’에서 소장 중이고, 현재 도서관 앞에 세워진 것은 복제품이다.

오스트리아의 발굴팀이 파편을 모아서 복원한 켈수스 도서관은 비록 전면에 그쳤지만, 고대건물 복원기술의 최고작품이라는 찬사를 받고 있을 뿐만 아니라 건축양식과 공간배치가 아름다워서 에페소의 백미로 평가되고 있다.

4. 켈수스도서관
4. 켈수스도서관
4-1. 도서관 입구 여신상
4-1. 도서관 입구 여신상
4-2. 켈수스도서관 내부 벽
4-2. 켈수스도서관 내부 벽

 켈수스 도서관에서 길 건너 가각지점에는 사창가, 공중화장실, 공중목욕탕 등이 밀집해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켈수스 도서관 앞에 있는 마제우스 미트리다테스 문 아래에 대리석 거리의 지하도를 통해서 사창가로 가는 통로가 있다.

물론, 사창가 골목으로 직접 들어갈 수도 있다. 이것은 79년 베수비오 화산 폭발로 수천 년 동안 땅속에 묻혔다가 발굴된 폼페이 유적에서 공중목욕탕 옆 골목이 공공연한 사창가로서 입구에는 남성 성기 모양의 조각이 있고, 각 방마다 노골적인 춘화가 벽화로 그려진 것보다는 덜 한 셈이다(자세히는 2018. 4. 2. 폼페이 유적 참조).

그런데, 사창가 입구 골목의 길바닥에는 ‘발자국’처럼 홈이 파진 대리석이 있는데, 이것은 발자국보다 큰 발을 가진 사람만 사창가를 출입할 수 있는 즉, 성인을 평가하는 기준이었다고 한다. 그 발자국 오른쪽에 새겨진 여인은 미인이 있음을 알리는 광고이고. 발자국 위편의 둥근 구멍은 화대를 내야 한다는 의미라고 했다.

5. 메제우스 문
5. 메제우스 문
5. 홍등가를_알리는_최초의_광고판
5. 홍등가를_알리는_최초의_광고판

 사창가 옆의 스콜라스티커 목욕탕(Entrance of Scholastica Bathes)은 1세기경 3층 구조로 지었으나, 지진으로 무너진 것을 4세기경 독실한 기독교인 스콜라스티커가 재건한 훌륭한 시설이었다고 한다.

또, 사창가와 공중목욕탕 사이에 공중화장실이 있는데, 변기는 가림막도 없이 일렬로 배치되어 있어서 옆에 앉은 사람과 대화를 나눌 수 있게 되었다.

용변을 마친 뒤에는 발아래 홈통처럼 흐르는 물에 손을 씻을 수 있게 만든 것이 우리에게는 약간 어색하게 느껴지지만, 수천 년 전에 목욕탕의 생활하수를 변기 아래로 흘려보내서 자동 수세식으로 설계되었다는 점이 놀랍다.

5-1. 사창가 골목
5-1. 사창가 골목
5-2. 공동화장실
5-2. 공동화장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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