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음사에서 출간된 최문자 시인의 신간 '우리가 훔친 것들이 만발한다' 표지
민음사에서 출간된 최문자 시인의 신간 '우리가 훔친 것들이 만발한다' 표지

최문자의 신간 '우리가 훔친 것들이 만발한다'가 민음의 시 255번째 책으로 출간됐다.

시인은 '훔친 것들'이라는 낱말을 사용해 오래도록 사랑했던 이가 죽음을 맞이하는 '끝'의 순간을 이야기 한다.

상실과 참회에서 비롯된 슬픔이 시집의 전반적인 정서지만 시는 좀처럼 과잉되는 법이 없다. 논리적인 언어로 구구절절 늘어놓는 대신 장면의 연쇄로 표현해낸 것이 이유다. 때문에 건조하게 보일 수 있는 시인의 문체가 감각적인 장면을 연출해내고 그 감정을 고스란히 독자가 느낄 수 있게 된다.

이 시집에는 '고백'이라는 말이 자주 등장한다. 최문자의 시적 화자들은 늘 고백을 그리워하고, 그 앞에서 충분히 망설이고 마침내 수행한다.

'고백'이 갖고 있는 소극적이고 수줍은 감정, 그로부터 또 다른 삶이 펼쳐질 적극성이 시인의 시에 단어로 존재한다. 고백은 그 자체로 강렬한 하나의 순간이며 사건이기 때문이다.

또 시인의 고백이 더욱 내밀할 수 있는 것은 죽음을 바탕에 두고 있기 때문이다. 긴 시간을 함께해 온 사람의 사망 신고서에 도장을 찍고, 샛노란 꽃잎이 까맣게 타 죽으려고 하거나, 스물다섯 청년이 20층 옥상에서 추락하는 등 관록의 시인이 삶의 면면에서 채취한, 고백으로만 가능한 찰나적 순간들이 한 권의 시집으로 완성됐다.

고백의 실천성
고백은 나의 벽돌로 만든 나의 빨간 지붕이 달린 아직 아무도 열어 보지 못한 창문 같기도 하고 창문 아래 두고 간 그 사람 같고 내 앞을 떠나지 못하는 슬픔 같고 흰 구름 같고 비바람 불고 후드득 빗방울 날리는 것이 눈보라 같아서 내 몸 같아서 나는 고백할 수 있을까?
- '고백의 환(幻)' 中

눈부신 슬픔의 무대
어렴풋이 채송화 몇 송이 펴 있고 어렴풋이 벌레들이 기어가고 어렴풋이 새들이 날파리처럼 날아다니고 어렴풋이 눈사람이 녹고 사람들은 어렴풋이 사람인 것처럼 보였다 어렴풋한 세계가 벼랑 저 아래 있었다
- '수업 시대' 中

집에 돌아왔을 때
남자는 죽어 있었다
삶과 죽음 어느 것이 더 무서운가
죽음은
죽자마자 눈을 더 크게 떠야 할 삶이 기다리고 있다
남자는 뭉텅뭉텅 사라지는 중이었고
나는 왼쪽 폐 반을 자르고
진통제 버튼을 계속 누르다가
살아나는 게 무서워 함부로 하나님을 불러냈다
- '2014년' 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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