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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자, 이순신
효자, 이순신
  • 김충남
  • 승인 2019.05.13 14:2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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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충남의 인생 그리고 처세 399]

충무공 이순신 장군은 무인으로서 위난의 나라를 구한 충신이자 효성이 지극한 효자이셨다. 효의 달을 맞이하여 장군의 孝를 기리어 보기로 한다.

보름에 한번 꼴로 노모에 대한 안타까운 효심을 일기에 토로하였다.

장군의 효행은 난중일기에 기록되어있다.

임진왜란 7년 중 지금까지 전해지는 난중일기는 57개월의 기록만 남아서 전해지고 있다.

그 중에서 장군의 효행에 대한 기록은 113회에 달한다.

이는 한 달 평균 2번꼴로 기록된 셈이 된다.(이순신효사상연구소)

난중일기에는 장군께서 전쟁을 수행하는 중에도 노모의 안위를 걱정하고 직접 모시고 봉양하지 못한 안타까운 효심이 절절히 나타나 있음이다.

난중일기에 나타난 장군의 애틋하고도 간절한 효심을 기려보기로 한다.

홀로 남으신 노모에 대한 장군의 효심은 절절하였음이다.

장군은 부친‘이정’과 모친‘초계빈씨’와의 사이에 4형제 중 3째 아들이었다.

부친이 세상을 떠나고 둘째 형‘요신’큰 형인‘희신’그리고 막냇동생인‘여필’이 세상을 떠나자 장군은 노모를 봉양하고 조카들을 돌보아야하는 책무를 떠맡게 되었다.

장군이 함경도 군관으로 근무할 때인 39세 때 아산에 살고 있던 부친이 세상을 떠났고 장군은 부친의 별세소식을 그 이듬해 정월에서야 전해 듣게 되었다.

이렇듯 부친의 임종을 지켜보지 못한 사무친 한, 그리고 남편과 자식을 앞세우고 홀로 남으신 노모에 대한 애틋함에 장군의 효심은 더더욱 절절하였으리라.

임진란이 일어났을 무렵 장군은 50세를 조금 넘었고 장군의 노모는 78세였다.

장군께서는 근무지에서도 언제나 타지에 홀로계신 노모의 안부를 걱정하였다.

그래서 사람을 통하여 노모의 안부를 계속 확인하였고 또 수시로 편지나 사람을 통하여 노모께 안부를 전했다.

“잘 가라, 가서 나라의 욕됨을 크게 씻으라.”

이순신이 성웅이순신으로 추앙 받을 수 있게 된 것은 유년시절에 노모인 변 씨로부터 큰 영향을 받았던 때문이라 하겠다.

변 씨는 현모로서 아들들을 끔찍이 사랑하였고 엄하게 교육시켰다 한다.

정유년 정월 15일 일기다.

“아침을 먹은 뒤 어머님께 하직 인사를 드리니 어머님께서는‘잘 가라, 가서 나라의 욕됨을 크게 씻으라.’하시며 두 번 세 번 거듭 타이르시며 위로해 주셨다.”

이처럼 생사가 오락가락하는 전쟁터로 자식을 내보내면서도 나라의 치욕을 씻으라고 격려하시는 노모의 그 기상이 아들인 장군에게로 이어졌음이 아니겠는가.

“장년의 시름을 잊고 소년의 모습으로 노모를 위로해 드렸다.”

하루 종일 노를 저어 밤중에 어머님을 찾아뵈오니 백발이 부수수한 채 나를 보고 놀라 앉으시는데 기력이 흐려져 몇 날을 더 보전하기가 어려울 지경이었다.

눈물을 머금고 어머님을 붙들고 앉아 그 마음을 즐겁게 풀어드리기 위하여 장년의 시름을 잊고 소년의 모습으로 어머님을 위로해 드렸다.(병신년 윤 8월 12일 일기)

“효도를 다하기 위해서라도 전력을 다해 왜병과 싸울 것이다.”

임진왜란이 일어 난지 3년째 되던 선조 27년(1594년)장군은 전라좌수영으로 부임하게 되자 노모를 십 여리 떨어진 고음천으로 모셨다.

그리고 80고령의 어머니를 홀로 두고 떠나면서 장군은 한없이 울었다.

그리고 일기에 이렇게 적었다.

“부모 살아계실 때에는 놀 때도 멀리 떨어져 놀지 말라 했거늘 알면서도 실천할 수 없음이 나라가 어지럽기 때문이 아닌가, 효도를 하기 위해서라도 전력을 다해 왜병과 싸울 것이다.”

귀한 음식이나 좋은 물건을 홀로계신 노모께 보내드렸다.

장군께서는 귀한 음식이나 좋은 물건이 있을 때는 언제나 인편을 통해 홀로계신 노모께 보내드렸다. 장군의 일기에 그 내용이 쓰여져 있다.

“어머님께서 평안하다는 소식을 듣고 곧 답장을 써서 미역 5동과 함께 보내드렸다.”

“군관 양밀이 해산물, 귤, 유자 따위를 보냈기로 곧 어머니께 보내드렸다.”

“천지간에 어찌 나와 같은 일이 또 있겠는가”

장군은 임진왜란 중인 정유년, 27일간의 억울한 옥살이를 하고서 백의종군 처분을 받고 풀려났다.

이 때 장군의 노모께서 장군을 만나러 여수에서 올라오던 중 배안에서 객사를 하고 만다.(정유년 4월 11일)

죄인의 신분으로 백의종군하는 중에 모친상까지 당한 상황에서 장군은“천지간에 어찌 나와 같은 일이 또 있겠는가, 일찍 죽는 것만 못함이로구나.”( 天地安有如吾之事乎 不如 早死也)라고 하시고 노모께 다하지 못한 애절한 효심을 나라위한 충심으로 승화시켰음이 아니겠는가.

그렇다. 장군의 효심과 충심은 하나였음이라!


- (대전시민대학 인문학 강사) -
김충남 대전시민대학 인문학 강사.

필자 김충남 강사는 서예가이며 한학자인 일당(一堂)선생과 정향선생으로 부터 한문과 경서를 수학하였다. 현재 대전시민대학, 서구문화원 등 사회교육기관에서 일반인들에게 명심보감과 사서(대학, 논어, 맹자, 중용)강의 활동을 하고 있다. 금강일보에 칼럼 "김충남의 古典의 향기"을 연재하고 있다.

※ 대전 KBS 1TV 아침마당 "스타 강사 3인방"에 출연

김충남의 강의 일정

⚫ 대전시민대학 (옛 충남도청)

- (평일반)

(매주 화요일 14시 ~ 16시) 논어 + 명심보감 + 주역

⚫인문학교육연구소

- (토요반)

(매주 토요일 14시 ~ 17시) 논어 + 명심보감 + 주역

⚫ 서구문화원 (매주 금 10시 ~ 12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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