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호흡을 여러 번하고 그가 시키는 대로 작은 칸에 서명을 했다. 전혀 내키지 않았지만 그녀의 목걸이가 현장에서 발견됐다는 점이 나를 얽어매고 있었다. 나는 최면에 이끌린 사람처럼 멍청하게 그의 의도에 따랐다. 이어 허리춤에 차고 있던 권총을 뽑기 위해 팔을 뒤로 돌렸다. 그러자 빅또르 김이 내 팔목을 굳게 잡고 강한 힘으로 권총을 낚아챘다.

말리지 마세오.”

안됩니다. 무슨 말입니까. 정신을 차려야지요.”

괴롭습니다. 돌려주세요. 제발…….”

나는 애원했지만 그는 내 손을 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경찰이 보기 전에 권총을 잽싸게 자신의 허리춤에 찼다.

경찰은 한참이 지낸 뒤에야 흰 보자기로 덮은 사체를 들것에 싣고 밖으로 나왔다. 이어 사체를 트럭에 싣고 오솔길을 달렸다. 그들의 목적지는 화장장이었다.

 

다음날 나는 하얀 장갑을 끼고 대기하고 있던 헬기에 올랐다. 부총영사인 나 선배와 빅또르 김이 조종사의 뒷좌석에 나란히 앉았다. 야로슬라브는 무표정한 얼굴로 내 옆자리에 탔다. 내가 안전벨트를 매자 헬기가 더욱 거센 소음을 지상에 흩뿌리며 수직으로 상승했다.

헬기는 계획된 진로를 따라 블라디보스토크 상공을 향해 프로펠러를 힘차게 돌렸다.

무릎에는 채린의 주검을 담은 상자가 헬기소리에도 아랑곳 하지 않고 천근의 무게로 놓여 있었다.

그토록 찾아 헤맸던 채린이 한 줌의 재가 되어 내 무릎에 있다는 사실이 나를 못 견디게 했다. 그런 생각을 할 때마다 삭히지 못한 분노와 울분이 몸서리치도록 속을 뒤틀었다.

헬기는 곧이어 블라디보스토크 시내로 접어든 뒤 항구를 가운데 두고 활공하기 시작했다. 아래로 극동군 사령부와 블라디미르 선상호텔, 언덕에 선 성냥갑 같은 아파트들이 차례로 밀려갔다. 채린이 머물렀던 기숙사가 보이는 극동대 상공에서 헬기는 미련을 씻기라도 하듯 두어 바퀴 돌았다. 그동안 참아온 눈물이 한꺼번에 쏟아져 내렸다.

헬기는 곧바로 시내를 벗어나 초원 위를 날기 시작했다. 광활하게 펼쳐진 초원은 양탄자처럼 부드럽게 내려다 보였다. 헬기는 숲과 몇 개의 샛강을 지나 우수리강 줄기가 내려다보이는 지점에 이르러서야 고도를 낮추었다. 그리고는 강변 가까이로 내려가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며 날았다. 그러다가도 강바람이 불어오면 불현듯 몸체를 상공으로 치켜 올렸다. 우수리강은 초원쪽 모래사장을 파고들면서 왼쪽으로 널찍하게 굽이쳤다. 강물은 파도처럼 철석이며 강가의 관목들을 흔들었다. 좁은 시내와 개울의 반짝이는 물결이 소리 없이 강으로 흡수되고 있었다. 낮게 나르는 헬기의 우스꽝스런 모습이 강물에 비쳤다. 헬기는 개울이 숲속으로 스며든 뒤 이내 토라져 나오는 습지대 인근에 다다르자 짓궂은 아이처럼 주변을 맴돌기 시작 했다.

나는 채린과 헤어져야 할 시간이 다가왔음을 직감했다. 빅또르 김이 눈짓을 했다. 그는 내 모습이 안쓰러웠든지 곧바로 고개를 돌렸다.

나는 침묵 속에 닫힌 상자를 열었다. 재를 한 움큼 쥐고 손을 창밖으로 내밀었다. 눈물이 회색빛 가루에 떨어질 때마다 그녀가 살아 움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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