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무사 정승열
법무사 정승열

타이베이 시청사와 대만정부가 자랑하는 ‘타이베이 101 타워’가 있는 시내 중심지에 국부기념관(國父紀念館)이 있다. 국부란 1911년 청(淸)조를 무너뜨리고 최초로 민주국가를 건설한 신해혁명으로 초대 총통이 된 쑨원(孫文: 1866~1925)을 말한다.

중국에서는 한족인 주원장이 세운 명을 멸망시키고 청을 건국한 만주족으로부터 얼마나 심한 차별을 받았는지, 1912년 신해혁명으로 만주족을 몰아내고 한족에 의한 민족주의, 민권주의, 민생주의 등 삼민주의(三民主義)를 내세운 쑨원을 국부로 추앙하고 있다.

현재 중국대륙을 지배하고 있는 중국정부는 공산당정부를 세운 마오쩌둥(毛澤東: 1893~1976)을 국부라고 하지만, 대만정부의 사상과 이념이 다른 중국공산당에서조차 쑨원을 '현대 중국의 아버지'로 부를 만큼 모든 중국인들이 그의 존재를 인정하고 있다.

1968년 3월에 착공하여 1972년 5월에 준공된 국부기념관은 11만 5500㎡의 면적에 지하 1층 지상 4층 건물이다. 그렇지만, 그의 아호로서 공원이름을 정한 중산공원이 기념관을 에워싸고 있어서 국부기념관은 중산공원의 한 부분처럼 느껴진다. 고색창연하고 푸른 기운이 넘쳐흐르는 중산공원의 중앙에는 연못 추이후 호(翠湖)가 있고, 그 위에 정자 쭈헝팅(卒亨亭)과 다리 샹산차오(香山橋)를 만들었다.

1. 타이베이 MRT 지도
1. 타이베이 MRT 지도
2. 국부기념관 전경
2. 국부기념관 전경
2-1. 국부기념관 정원
2-1. 국부기념관 정원
2-2. 쑨원 야외 동상
2-2. 쑨원 야외 동상

우리가족은 택시 투어로 진꽈스와 지우펀을 다녀오는 길에 국부기념관을 에워싼 중산공원(中山公園)에서 내렸지만, 시내에서 국부기념관을 찾아가려면 MRT 5호선(군청색)을 타고 국부기념관역 4번 출구를 나서면 된다. 국부기념관은 중정기념당과 마찬가지로 정면은 물론 좌우 출입문으로 출입할 수 있으며, 입장료는 무료이다.

중정기념관의 약 1/3 정도인 국부기념관 광장은 넓은 화단이 시민공원 같은 편안한 느낌을 주는데, 넓은 정원에서 대각선으로 타이베이 101 타워를 바라볼 수 있는 포토 존으로도 유명하다. 기념관에 들어서면 넓은 홀에 쑨원이 의자에 앉아 있는 대형 동상이 있다.

쑨원의 동상은 중정기념당에서 장개석의 동상과 마찬가지로 6.3m 높이라고 하지만, 중정기념당에서 장개석의 동상을 89계단을 올라간 3층 건물의 넓은 홀에 좌정한 것과 달리 1층 홀에 설치한 것이 우선 권위적이지 않아서 보기 좋다.

그런데, 국부기념관에서도 중정기념당과 마찬가지로 매시 정각에 근위병교대식을 벌이고 있는데, 병사들의 기계적인 동작에는 절도 있는 제식훈련 모습이라기보다는 대만이 여전히 통제사회라는 것을 보여주는 것 같아서 실망스럽다(근위병 교대식에 관하여는 2019.1.14. 중정기념당 참조).

기념관 뒤편에는 2500석 규모의 대회당과 쑨원의 발자취를 알 수 있는 쑨원 사적전, 혁명건국 사적전, 국가 건설전, 중국대륙 실황전 등 상설전시실과 중국·서양의 서화전, 상공업 특별전, 학술·문화 강좌 등의 행사를 개최하는 특별전시실이 있다.

또, 30만 권 이상의 책을 소장하고 있는 중산 도서관이 있으며, 대회당에서는 다양한 국내외 문화 예술 행사와 금마상 · 금종상 · 문화상 등 각종 시상식을 개최하는 장소로 이용되고 있다.

 

4-1. 국부 동상(근위병교대식)
4-1. 국부 동상(근위병교대식)
5. 상설전시실
5. 상설전시실
5-1. 쑨원사적실
5-1. 쑨원사적실
5-2. 쏜원 사적실
5-2. 쏜원 사적실

1866년 광둥 성에서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쑨원은 서당에서 전통적인 유교 교육을 받다가 14살 때 하와이로 건너가서 고등학교에 다니면서 민주주의를 체험했다.

그는 18살 때 귀국했으나, 전통적인 유교문화와 서구민주주의 사이에서 괴리를 느끼다가 홍콩으로 가서 의학공부 시작했다. 의과대학을 졸업한 그는 마카오, 광저우 등에서 잠시 의사로 활동했으나, 1894년 청일전쟁에서 청이 패하고 서구열강의 침탈이 가속되는 것을 지켜보면서 혁명의 필요성을 느꼈다.

그는 ‘만주족 축출, 중화 회복, 연합정부 건설’을 기치로 하는 흥중회(興中會)를 조직하고 1895년 10월 광저우에서 군사를 일으켰으나, 부하의 밀고로 실패하여 일본으로 달아났다. 그는 하와이를 거쳐 영국으로 갔으나, 1896년에 런던에서 체포되었다. 다행히도 홍콩의학교 시절 스승의 도움으로 풀려난 그는 다시 일본에서 1900년 2차 무장봉기를 계획했지만, 이 거사도 실패하여 하와이, 베트남, 미국 등을 전전했다.

그러던 중 1905년 러일전쟁이 일어나자 도쿄에서 유학생들을 규합하여 중국혁명동맹회를 결성하고 총리로 추대되었다. 1911년 10월 10일 쑨원이 우창(武昌)에서 중화민국 정부를 수립하자 17개성이 호응하여 청에 대항하게 되었다.

쑨원은 난징(南京)에 임시정부를 세우고 임시 대총통이 되어 이듬해인 1912년 1월 1일 정식으로 총통에 취임하여 중화민국을 출범한 것이 신해혁명이다. 대만정부에서는 신해혁명이 일어난 1911년 10월 10일을 중화민국 건국일(雙十節)로 정하고 국경일 행사를 벌인다.

그러나 북경에서는 여전히 청 왕조가 존재하면서 위안스카이(袁世凱: 1859~1916)가 실권을 장악하고 있었다. 그러자 쑨원은 위안스카이에게 청의 선통제를 퇴위시키고 내각제 시행을 조건으로 정권을 넘겼지만, 위안스카이가 약속을 위반하고 독재정권을 수립하자 대항했으나 실패하여 또다시 일본으로 떠났다.

1916년 위안스카이가 사망하자 귀국한 그는 1919년 5월 4일, 베이징에서 대학생을 중심으로 벌인 5·4 운동을 지켜보면서 혁명에는 국민의 힘이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고, 중화혁명당을 중국국민당으로 개칭했다. 그러나 5·4운동은 공산당이 성립하는 계기도 되어서 소련 코민테른의 지원으로 중국공산당이 결성되어 공산주의와 민주주의의 갈등이 시작되었다.

쑨원 총통의 광둥 신정부는 혁명 완수를 위하여 군벌을 축출하려고 광저우에 황푸군관학교를 세웠는데, 황푸군관학교의 초대 교장은 장제스(蔣介石: 1887~1975)이었다. 1924년 쑨원은 대륙을 침략한 일제를 격퇴하기 위하여 중국공산당과 1차 국공합작을 했으나, 이듬해 북경 국민대표회의에 참석하러 가던 중 간암으로 죽었다.

그 뒤를 장개석이 승계하였지만, 국민당정부는 1949년 공산당과의 내전에서 패한 뒤 대만으로 쫓겨 갔다. 그러나 쑨원의 삼민주의는 대만정부뿐만 아니라 중국공산당에도 큰 영향을 미쳐서 오늘날 중국정부는 삼민주의를 계승하면서 건국기념일에는 천안문광장에 그의 초상화를 커다랗게 내걸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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