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재민의 정치레이더 50] 기본 바로선 ‘국가 시스템’ 가동을 바라며

공공운수노조 홈페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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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흘 밖에 남지 않은 2018년. 마지막 남은 12월 달력은 기분 좋게 떼지 못할 것 같습니다. 누군가에는 금쪽같은 아들이었고, 또 누구에게는 동료이자 친구였던 대한민국 청춘들이 한 점 소리 없이 떨어지는 꽃잎처럼 졌기 때문입니다.

노동자였던 김용균은 일터에서, 군인이었던 윤창호는 휴가 중 도로 위에서, 수능을 마친 고등학생들은 여행간 펜션에서 참변을 당했습니다. 불의의 사고로 숨진 자들의 가족들은 세상을 전부 잃은 것 같은 고통 그자체일 겁니다.

강릉 펜션 사고로 목숨을 잃은 아들에게 “다음 생에는 더 좋은 집에서 더 좋은 부모 만나 다시 꽃피거라”고 쓴 어머니 편지에 가슴 먹먹해지는 오늘입니다. 지닌 꿈을 채 펴보지도 못한 나이에 생을 마감한 이들의 죽음은 누가 책임져야 할까요.

정치권과 정부는 이들의 죽음 이후 관련 법안 강화와 제도 개선에 나섰습니다. 산업안전보건법 개정안을 포함한 ‘김용균 3법(죽음의 외주화 방지법)’과 ‘윤창호법(음주운전 처벌강화법)’이 대표적입니다. 그야말로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격입니다. 그나마 외양간이라도 제대로 고치면 다행입니다.

2016년 5월, 우리는 서울 지하철 2호선 구의역에서 스크린도어를 혼자 수리하던 열아홉 살 외주업체 직원의 죽음을 목도했습니다. 그때도 정부와 정치권은 하청업체 외주와 불법파견의 문제, 안전관리 강화의 중요성을 강조했습니다.

당시 고(故) 노회찬 의원과 심상정 의원이 발의한 법안이 지금의 ‘김용균 3법’입니다. 하지만 이 법안은 아직도 국회 계류 중입니다. 지난 20일 김용균 씨 빈소를 찾은 심상정 의원은 “이번 사고의 제일 큰 공범은 국회”라고 주장했습니다.

국민들은, 구의역 사고 이후 ‘예방 가능한 사망’이 더 이상 발생하지 않기를 바랐을 겁니다. 하지만 우리는 불과 2년 뒤 ‘사고 공화국’에 살던 어리고 젊은이들이 당한 처참한 광경을 또다시 지켜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정치권과 정부는 ‘관련법과 제도정비’라는 구호를 되풀이하고 있는 2018년 대한민국입니다.

‘아덴만의 여명작전’에서 석해균 선장을 사지에서 살려낸 아주대병원 외상외과 교수 이국종. 그는 최근 펴낸 자신의 저서 《골든아워1》에서 “선진국에서라면 살았을 사람들이 한국에서는 터무니없이 죽어나갔다”고 했습니다.

그는 또 “죽지 않아도 될 환자를 죽지 않게 하겠다는 ‘정부의 의지’가 필요했고, 그 의지를 실현시킬 ‘정책’이 필요했으며, 관련된 자들의 ‘합의’가 필요했다. 그러나 정책을 누가 만드는지는 알 수 없었고 확실한 정책은 보이지 않았다”고 지적했습니다.

이 교수는 대한민국 정부의 ‘정책’이 얼마나 비효율적으로 운용되고 있는지를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서술했습니다. 정쟁에 휘둘려 노동자와 소외된 국민들에게 필요한 법들은 도움을 주지 못하는 현실이 저 역시 답답할 따름입니다.

노동현장의 참담함을 알지 못하는 정부 관료들은 ‘탁상행정’을 대물림하고, 정치권은 자신들의 이해관계가 걸린 법을 놓고 아웅다웅하며 흥정하는 사이. 대한민국 국가안전 시스템은 좌표를 잃고 표류하고 있습니다. 기업은 자기 주머니로 들어오는 돈은 목숨보다 중하게 여기면서도, 현장 근로자들은 밥을 먹는지, 컵라면을 먹는지 관심조차 없는, 21세기 대한민국의 ‘정치경제학’.

이국종 교수는 책에서 “회의석상의 누구도 환자 항공 이송에 도움이 될 것에 대해 논하지 않았다. 아무도 선진국형 중증외상 의료 시스템에 관심을 두지 않았고, 알려 하지 않았다. 오로지 외상센터 사업이 풍기는 돈 냄새만이 중요했다. 한국 사회의 모든 면이 늘 그러했다. 정치(政治)와 정리(情理)사이, 그런 대척점의 중간 어디쯤에 나는 서 있었다”고 했습니다.

“대한민국에서 ‘기본’이 제대로 갖춰지지 않은 것이 중증외상 분야뿐인가? 노동 현장이나 교육 현장이나, 수많은 사안들이 주먹구구식으로 흘러간다. 힘없고 돈 없는 이들에게 ‘기본’이라는 말은 참으로 사치스러운 단어다. 기준도 저마다 달라 싸움은 곳곳에서 벌어진다”는 대목은 의미심장하게 들렸습니다.

문재인 정부가 비전으로 제시한 '함께 잘사는 혁신적 포용국가'는 지금 같은 시스템 부재 상황에서 공염불에 불과합니다. 그 시스템을 온전히 가동하려면 ‘기본’과 ‘원칙’은 필요충분조건입니다. 각 분야에서 기본과 원칙이 바로서고, 시스템이 정상적으로 돌아간다면 ‘예방 가능한 사망’은 크게 줄어들 겁니다. 어쩌면 ‘94년생 김용균’도 그 말을 하고 싶지 않았을까요. 모쪼록 2019년은 제2의 김용균도, 윤창호도 없는 한해가 되길 소망합니다. 또 그 길에 '정치'와 '정책'이 중심을 잡아주길 간곡히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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