UPDATED. 2019-09-17 18:45 (화)
"한국인에만 있는 병,화병(火病)”
"한국인에만 있는 병,화병(火病)”
  • 손창규
  • 승인 2018.12.14 17:2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손창규 교수의 과학으로 읽는 한의학

손창규 대전대 둔산한방병원 교수.

43세의 직장여성인 A씨는 언제부터인가 우울감, 식욕저하, 피로, 수면장애 등의 증상이 있었다. 그러더니 간혹 숨이 편안하게 안 쉬어지고 답답하거나 저절로 한숨을 쉬게 되고 두근거리는 증상이 생기기 시작하였다. 최근에는 사무실에서 근무 중에 갑자기 숨을 쉬기가 어려워져서 병원에 가서 정밀 검사를 받았다. 혹시, 심장질환이 있는가 하여 심전도를 비롯한 혈액검사 등을 받았으나 정상소견 뿐이었다. 평소 과도한 스트레스에 운동부족 때문인가 하여 산보도 열심히 하면서 좀 나아지는가 싶었다. 그러던 중에 얼마 전에 다시 야간에 가슴이 답답하여서 응급실에 다녀온 뒤에 한방병원을 방문하였다.

상담을 하고 진찰한 결과, 위의 환자가 호소하는 증상은 화병(火病)임을 알게 되었다. 화병은 감정의 표현이 용납되지 않는 환경에 오랫동안 참고 지내거나 혹은 생활 중에 생기는 불쾌한 기분이나 화를 표현하지 못하는 성격의 사람에게 자주 발병한다. 위 환자의 예는 가부장적인 시댁에서의 환경과 양육과 직장생활에서의 피로 및 최근 회사에서 대인관계로 심한 스트레스가 복합적인 원인으로 판단되었다. 심한 시집살이가 보편적으로 존재하던 과거에는 참고만 살아야 했던 며느리들에게서 많이 발생하였다. 간혹은 꿋꿋하게 시집살이를 잘 견디어 오신 고령의 할머니들에게서 화병이 발생하는 경우도 있다. 비록 최근에는 할아버지에게 큰소리도 칠 수 있지만, 그동안 참고 잘 지내 오셨던 감정이 연세가 들면서 마음 깊숙이 자리 잡고 있다가 체력의 저하와 함께 화병이라는 형태로 나타나는 것이다.

한의학에서는 울즉화화(鬱卽火化)라 하여 억울한 감정이나 스트레스를 억누르면 나중에 화병으로 발전한다고 설명하면서, 일찍이 화병의 의학적 위험성을 매우 중요하게 다루었다. 한국인의 약 100명 중에서 약 4명 정도가 화병으로 진단할 증상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 화병은 한국인에게서만 발생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서양의학적으로 이전에는 화병이 우울증으로 취급되어 왔었는데, 일반적으로 우울증과는 많이 다른 것이다. 한국인 특이적인 화병이 국제적으로 알려지는 과정은 진지한 스토리가 있다. 미국 캘리포니주의 UCLA 대학병원의 신경과의사였던 린케밍(Lin Keh-Ming)교수가 시에틀의 지역건강센터에서 아시아인들을 대상으로 2년 반동안 진료하면서 6명의 한국인 환자들을 만났었다. 그런데 Lin 박사는 한국인 환자들 중에서 3명의 여성 환자가 자신이 배우고 가르치는 교과서에서는 볼 수 없는 특이한 증상들을 호소하는 것을 매우 신기하게 여겼고, 1981년 미국정신과학 학회지에 화병이라고 최초의 국제논문을 투고하였다. 중국계의 의사였던 Lin 박사는 화병이 같은 아시아계인 중국인에게서도 없는 한국문화와 결부된 한국인의 병으로 정의하였다. Lin 박사는 연구를 통하여 미국 LA지역의 한국인 약 12%가 호소하는, 한국인에게 매우 흔한 병임을 논문을 통해 발표하였고, 마침내 1994년도 미국의 정신질환의 편람에 정식 등재하기에 이르렀다. 한국인의 질병을 치료하는 한국의료인들이 미국인의 기준으로 치료하려할 때, 오히려 미국에서 한국인의 질병을 먼저 연구하고 분류하였다는 것은 극복해야할 아이러니다.

아직도 화병환자들에게는 주로 우울증 약을 처방하지만 효과가 매우 제한적인 것으로 알려졌다. 전통적인 한의학적 치료법인 침치료, 기공, 명상 및 화병을 치료하는 처방이 효과적이다. 국내 한의과대학의 연구팀은 50명의 화병환자들에게 음양오행의 원리로 경혈을 선택하는 사암치법(심포정격)의 침치료가 효과적이라는 임상결과를 발표하였고, 다른 한의대 연구팀은 기공을 활용한 스트레스 조절요법의 치료효과를 밝혔다. 한약으로는 시호가억간산, 시호청간탕, 시호가용골모려탕, 분심기음 및 황련해독탕과 같은 처방을 많이 사용한다.

현대인들에게 스트레스 관리는 건강의 가장 중요한 요소가 되었다. 스트레스는 화병과 같은 정신적 질병분만 아니라 당뇨나 고혈압과 같은 성인병의 주범이기도 하다. 혹시 스트레스에 적응하기 어렵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햇볕 아래서 자주 운동하고 깊은 심호흡을 하는 습관을 들이면 좋다, 또한 스트레스 상황과 관련하여 누구에게든지 대화하는 것이 도움이 된다. 그리고 정말로 화나는 상황이 지속된다면 용기를 내어 참지 말고 화를 내보는 것도 적극 권한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0 / 40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