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50년 네벨스크 제독이 이끄는 탐험대가 연해주 해안을 탐사하고, 1858년 동 시베리아 총독 무야비요프 제독의 휘하에 있는 탐사대가 이 지역을 정밀 탐사 한 후 1859년 이를 근거로 블라디보스토크 군사 기지를 만들기로 결정 했다…….’

나는 한 차례 숨을 길게 들이켰다. 기다림에 익숙하지 못한 스스로를 나무라고 있었다. 그러면서도 눈으로는 계속 해서 자료를 읽어 내려갔다.

‘1860년 쉐프너 선장 및 선원 31명을 실은 해군 수송선 만튜르호가 블라디보스토크 해안에 닻을 내림으로써 세계지도 상에 등장하게 된다. 시의 명칭인 블라디보스토크는 니콜라이 1세가 지은 것으로 동방을 정복하라는 뜻이다. 이것은 유럽 열강 등이 제국주의적 팽창을 앞 다투던 19세기 중반에 일, , 한국을 점령 할 전략적 거점을 확보하고 아시아 태평양으로 진출 하려는 러시아 제국의 꿈을 나타낸 것이다. 사회주의 혁명 후 제정 러시아 시대의 도시 명을 전통과 결별시키기 위해 대부분 개명 했지만 대외 침략적 이미지가 강한 이 이름은 그대로 존속 시켰다.’

책자는 지극히 보고서 양식을 빌고 있었다. 어설프게 만들어진 내용이 기다림을 더욱 지루하게 만들었다.

러시아 왕위 계승자 니콜라이 황태자가 1891년 시베리아 횡단철도 착공현장 순시차 현지를 방문했다. 한국과 인연이 깊은 도시다. 신한촌, 한국인 거리 등이 고서에 기록 되고 있으나, 1937년 중앙아시아로 한인들이 전부 강제 이주되고 20년이 지나서야 부분적으로 옮겨와 한인 사회를 기억하는 사람이 거의 없다. 때문에 현재는 한인촌 등을 찾을 길이 없다. 군사 도시로서의 성격이 강하다. 1932년 소련 태평양 함대 사령부 설치로 외국인의 출입이 금지되고 소련인들 마저 출입이 통제되었다. 9211일 전에는 도시 전체가 군사 보호구역이었다. 시민 구성의 대부분이 해군과 그 협력분야 종사자들로 구성되어 있다.’

자료를 들척이다 지친 나는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제야 영사관 직원이 들어왔다.

장 기자님 너무 많이 기다리셨습니다. 가시죠! 총영사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총영사는 내가 들어서자 자리에서 일어나 짙은 갈색 소파에 앉을 것을 권했다.

얼마나 심려가 크시겠습니까. 먼 길 오시느라 고생이 많으셨습니다. 경찰서에서 있었던 일은 진심으로 사과드립니다. 이곳 상황이 좋지 않아 그런 일이 있었습니다. 이해 하셨으면 고맙겠습니다. 우리는 장 기자님의 이야기를 듣고 즉시 이곳 경찰 측에 강력히 항의를 했습니다. 다시는 그런 일이 없을 것이란 약속을 받아 냈지만 지켜봐야 할 일이지요. 치안 상태가 현재로서는 대단히 불안정 하니까요.”

그는 내가 말할 겨를도 없이 자신의 얘기를 계속했다. 선해 보이는 눈망울을 끔뻑거리며 강의를 하듯 한동안 러시아의 정치적 입장과 현실에 대해 열변을 토했다. 또 한국과의 관계에 대해서도 질문이라도 한 것처럼 소상하게 설명했다. 하지만 내 귀에는 그런 말이 제대로 들릴 리 없었다. 나는 고개를 연신 끄덕였지만 내 생각은 그의 말과는 거리가 있는 채린의 실종에 머물러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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