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교육감 후보 인터뷰 ①] "더 행복하고 즐거운 학교 만들겠다"

성광진 대전교육연구소장이 대전교육감 선거에 출마한다.
성광진 대전교육연구소장이 대전교육감 선거에 출마한다.

대전교육감 선거에 출마하는 성광진(61) 대전교육연구소장은 다양한 경력을 자랑한다. 32년간 교편을 잡은 기간 동안 4번 해직됐다 복직을 반복했다. 민주화 운동을 직접 눈으로 본 뒤에는 교사들의 노동운동 전면에 나섰으며, 시민사회운동가로도 변신해 다양한 교육현안 해결을 모색하기도 했다.

그렇다고 어려서부터 교육에 대해 관심이나 꿈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1957년 12월 18일, 충남 홍성에서 태어난 그는 장사를 하던 부모를 따라 초등학교 2학년에 다니던 무렵 대전으로 이사했다. 모든 부모가 그렇듯 자녀 교육을 위해 대도시로 이주를 택한 것.

동구 정동과 삼성동에서 주로 거주한 그는 삼성초와 중앙중을 다녔다. 어려서는 공부를 좋아하지 않았다. 노는 게 좋았다. 그 또래 아이들처럼 반항적이었다. 공부 잘하는 아이는 아니었다. 재수끝에 대전고에 입학할 정도로 공부를 썩 잘하는 아이는 아니었다. 고교때도 마찬가지였다. 부친은 고시에 합격해 공무원되길 바랐지만 10대였던 성 소장의 마음은 다른데 있었다. 자율학습이나 성적과 진로위주의 교육방식에 대해 회의감을 느낀게 이때다.

공부는 잘하지 못했지만 책은 좋아한 아이였다. 마침 집 주변에 중고책 서점이 있던지라 책은 손에서 놓지 않을 정도로 많이 봤다. 대부분 소설책. 이 당시 읽은 책은 성 소장이 성인으로 성장했을 때 교육정책을 비롯해 사회에 대해 비판적인 시각을 갖게 해 준 중요한 시기였다고 회고했다. 시험이나 성적, 대학을 잘 가기위해 하는 공부가 아닌 흥미와 즐거움을 느낄때 자신의 지적 능력과 미래를 위한 준비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지금처럼 성적과 진로를 위한 교육방식은 학교 교육의 대표적인 폐단이라는 가치관을 확립하게 된다.

대학(숭전대, 현 한남대)에 입학할 당시 국어국문학과를 선택한 것도 책을 많이 접했기 때문이다. 사실 언론인으로의 진출도 고민했었지만, 대학 시절에도 사회 비판서적을 주로 읽으면서 소설을 쓰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고 한다. 문학도가 되려는 마음에서 선택한 국문과였다. 그러나 맘처럼 되지 않았다. 또 다른 진로를 모색하기 전까지 잠시 교편을 잡기로 했다. 대학 졸업 후 1985년 주변 친지의 소개로 대전북고 국어교사를 시작했다. 학교 다닐 적 교사들에게 매를 많이 맞다보니 교사에 대해 그다지 좋은 이미지는 아니었지만 임시방편으로 잠시 머물고자 선택한 길이었다.(본인의 생각과 달리 이때부터 성 소장은 32년 동안 교편을 잡게 된다.)

그의 비판적인 성향은 교사로서 생활을 시작한 뒤에 학교측과 잦은 마찰을 유발했다. 사립학교 교원으로 채용된 탓에 사학법인의 전횡(?)은 가만히 지켜볼 수 없었다. 학교 이사장이나 교장과 갈등은 어쩌면 당연했다. 법인의 지나친 간섭이 목격될 때마다 쓴소리를 내뱉었다. 당연히 학교 입장에서는 눈엣가시였다. 북고 국어교사 자리는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3년만에 북중으로 전근됐다. 다분히 징계성이다.

이때 성 소장은 개인보다 단체의 필요성을 인식했다. 민주화운동으로 사회가 변화되는 모습을 지켜본 그는 교사들이 뭉쳐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실천으로 옮겼다. 1988년, 당시만 해도 조심스럽게 활동하던 대전교사협의회에 관여하게 된다. 사립교사협의회를 별도로 조직해 조직부장을 맡으며 강성활동을 이어갔다. 당시 집회 과정에서 체포되기도 할 정도였다. 이때 움직임은 전교조로 이어진다.

성 소장은 전교조 대전지부장으로 활동할 당시 다양한 지역교육 현안 해결에 주력했다.
성 소장은 전교조 대전지부장으로 활동할 당시 다양한 지역교육 현안 해결에 주력했다.

1992년 사단이 발생했다. 전교조 해직 교사 복직과 교육대개혁을 위한 선언에 참여한 사실이 알려지자 학교측에서 전교조 활동 및 교사 품위유지 위반 등의 이유를 내세워 1993년 직위해제에 이어 해임했다. 성 소장에게 시련의 계절이 찾아왔다. 해임 이후 곧바로 법적인 대응에 나섰지만 법원 판결로 복직된 뒤에는 또 다른 이유로 해임됐다. 4번의 해임과 4번의 복직이 반복됐다. 이로 인해 1993년부터 1997년까지 6년동안 야인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다. 해임 기간 전교조 대전지부에서 활동하며 복직투쟁을 한 그는 1996년 대법원 판결로 무죄가 확정됐고, 우여곡절끝에 복직이 결정돼 1998년 대전중학교로 복직했다.

복직한 뒤 전교조 활동을 더 가열차게 했다고 한다. 전교조 대전지부 사무처장을 맡아 전교조 합법투쟁에 나섰고 결국 2000년 합법화를 이뤄냈다. 89명이던 조합원도 무려 1000여명으로 급속히 확산됐다. 이때부터 교육현장의 비리 척결 운동에 집중했다. 특히 사학법인에 대한 척결 투쟁은 그 수위를 높였다. 두번의 도전끝에 전교조 대전지부장으로 당선된 뒤에는 더욱 강하게 교육현장의 문제 해결을 위해 나섰다. 대전장애인교육권연대 창립을 시작으로 친환경급식 지원에 관한 조례 제정, 졸업앨범 담합 감시, 19개 사학재단과 단체교섭 등도 일궈냈다.

대전교육연구소도 이 무렵 창립했다. 교사들이 직접 교육현장의 문제점에 대해 개선책을 마련하기 위해 2006년 150여명이 뜻을 모아 사단법인으로 발족했다. 교육과 관련한 단체 중 유일하게 사단법인 형태로 운영되면서 동서부교육격차 해소 등 지역교육계의 묵은 현안에 대해 의제를 발굴하고 대안을 제시했다. 교육대안세력인 셈이다. 전교조 대전지부장 자리를 물러난 뒤에는 대전참여자치시민연대 공동의장을 맡았다. 교육현안을 해결하기 위해 지역시민사회의 힘도 필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2008년부터 2013년까지 공동의장으로 활동한 것을 비롯해 교육공공성 강화를 위한 시민연대도 만들었다. 그리고 교육감 출마를 하려 2016년말 교직에서 물러날 결심을 하고 2017년 명퇴했다. 

오랜 교사 생활을 하던 그가 교육감 출마를 결심하게 된 이유는 그동안 살아온 행적과 무관치 않다. 32년간 교육 현장에 몸담으면서 느꼈던 현실과 시민사회단체에서 활동하면서 쌓은 노하우를 살려 지역교육계의 변화와 개혁을 이끌어보겠다는 각오가 그의 출마결심을 부추겼다.

그는 <디트뉴스>와 가진 인터뷰를 통해 "지역의 다양한 교육정책에 대해 비판과 대안을 제시했고 비리와 부조리에는 과감하게 투쟁을 해 왔던 교사로서 관료화된 교육계 문제를 변화시키고 개혁할 수 있는 적격자라고 생각한다"며 "지금보다 더 행복하고 즐거운 학교, 보다 나은 미래를 위한 교육을 만들어야 한다는 사명감과 책임감을 갖고 교육감 선거 출마를 결심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성 소장은 자신이 지역교육 개혁 적임자임을 내세우며 지난 연말 교육감 출마를 선언했다.
성 소장은 자신이 지역교육 개혁 적임자임을 내세우며 지난 연말 교육감 출마를 선언했다.

대전교육의 개혁을 위해 진보교육감의 필요성을 주장하고 있는 그는 "근본적인 변화와 개혁을 위해서는 혁신이 필요하다"면서 "혁신을 위해서는 권위적인 구조를 깨트릴 수 있는 의지가 필요한 데 그 의지가 진보교육감을 필요로 하고 있다"면서 자신이 출마할 수밖에 없는 이유를 설파했다.

설동호 현 교육감의 교육행정에 대해서는 "변화하려는 의지가 없으며, 아이들과 교사 중심에서 교육행정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포장만 하려 한다"며 선심성 행정을 꼬집었다.

성 소장은 현재 진행 중인 진보교육감 후보 단일화 움직임에 대해 "4월에 단일후보를 선출해서는 안된다는 게 제 개인적인 생각"이라며 "하루라도 빨리 후보를 확정해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더 이상 단일화 기구를 흔들면 안된다. 무조건 단일화기구를 믿고, 시민과 시민사회를 믿어야 한다"면서 "내가 아니라도 된다는 마음으로 선의의 경쟁과 노력을 하자"고 솔직한 속내를 가감없이 드러냈다.

성 소장은 13일부터로 예정된 대전교육감 예비후보 등록에 맞춰 둔산동에 자신의 선거사무실을 마련한 뒤 앞으로 선거인단 모집과 발로 뛰는 선거운동에 주력한다는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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