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른 새벽에 일어나 내 속옷이며 양말을 챙겨놓는 것부터 은행에 이자를 갚는 일이나, 새로 어렵게 장만한 아파트 부금을 넣는 것도 그녀의 몫이었다. 아들을 학교에 보내는 일이나 보험료를 제 때 납부하는 것, 자동차 할부금에 쫒기는 것도 아내였다.

그녀의 책상 머리맡에는 언제나 빽빽하게 적힌 메모지가 덕지덕지 붙어 있었다.

나는 그녀가 내 생활의 전부라고 생각하며 살아왔다. 가장 가까운 친구도 그녀였고 고달픈 내 고민을 털어 놓을 대상도 그녀였다. 때문에 아내를 유학길로 떠밀기까지 나는 족히 한 달간의 속앓이를 했다. 그리고는 마음을 굳힌 뒤 또 다른 생각이 들기 전에 서둘러 아내를 러시아로 보냈다.

 

신문사로 걸려 왔던 러시아 현지에서의 따냐 전화가 사선처럼 스쳤다. 그녀는 현지에 아내를 돕던 친구였다.

뭐라고요? 채린이 어떻게 됐다고요?”

“.......”

“3일 전부터 연락이 끊어졌다고요?”

 

선상호텔 종업원이 내가 앉은 테이블로 다가왔다. 까만 하이힐 뒤 굽이 러시아산 대리석 무늬의 아스타일에 부딪치는 소리가 차갑게 들렸다. 종업원은 짧고 착 달라붙은 미니스커트를 한 손으로 훑어 내리며 다른 손으로는 테이블 위의 재떨이를 치웠다. 내가 들어올 때 신청해 둔 전화가 걸려 왔다며 내 귀 가까이 대고 나직이 일러주었다. 전화기는 레스토랑 카운터가 있는 구석쯤에 놓여있었다

 

여보세요 따냐?”

나는 따냐의 목소리를 듣자 마음이 조급해졌다.

채린의 소식은 있나요?”

말이 없었다.

지금 이곳으로 온다고요?”

전화가 끊겼다. 납덩이가 된 수화기의 무게에 팔이 휘청거렸다.

 

나는 탁자로 돌아와 무거운 손으로 커피 잔을 들었다. 손이 파르르 떨렸다. 눈을 지그시 감았다. 채린과의 전화통화가 떠올랐다.

 

자기 이번에는 올 거지 ?”

글쎄. 최대한 노력해보는데, 일이 밀려있어.”

그렇게 일이 바빠?”

. 미안해…….정말 미안해. 나도 당신이 보고 싶지만 잠시만 참자.”

“......”

오늘도 큰일이 또 터졌잖아…….”

알아. 하지만 자기가 보고 싶은 것을 어떡해. 너무너무……보고 싶어.”

이번에는 꼭 갈 수 있도록 할께. 사랑해.”

그래 자기 사랑해…….그리고 철없이 보채서 미안해. 자기가 너무 보고 싶어서 그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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