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승열의 세계속으로] -52-

바벨성 입구.
바벨성 입구.

크라쿠프 구시가지에서 신시가지 쪽 도로에는 중세의 우주관이던 천동설을 부인하고 처음으로 지동설(태양중심설)을 주장하여 근대자연과학의 눈을 뜨게 한 천문학자 코페르니쿠스(Nicolaus Copernicus: 1473~1543)가 공부했던 야기에오 대학교가 있다(코페르니쿠스에 관하여는 2018. 01.01. 폴란드 바르샤바 참조).

야기에오 대학은 먼 훗날 로마교황이 된 청년 보이티와(Karol Józef Wojtyła; 1920~2005)가 다닌 대학으로서 1939년 나치 독일이 폴란드를 점령하자 보이티와는 징병을 피하려고 공장 근로자․ 채석장 노동자 등으로 일했으며, 나치 독일의 비밀경찰 게슈타포의 눈을 피해서 많은 유대인들의 피신을 도와주었다. 1942년 대학을 졸업한 보이티와는 1946년 천주교 사제가 되었으며, 모교의 신학교수로 재직하기도 했다. 보이티와는 1964년 크라쿠프 성당의 대주교였다가 1967년에는 추기경이 되었는데, 1978년 가톨릭 역사상 455년 만에 비(非) 이탈리아권 출신 로마교황 바오로 2세(Pope John Paul II: 재위 1978~2005)가 되었다.

바벨성.
바벨성.

교황이 첫 방문지로 조국 폴란드를 찾아오면서 가톨릭 신자를 중심으로 커다란 바람을 일으켰다. 즉, 폴란드의 소련식 정치체제에 대한 간접적인 시위를 보임으로서 1980년 8월 그다인스크 조선소의 노조 대표 레흐 바웬사(Lech Walesa: 1943~ )의 주도로 전개된 파업에 큰 영향을 미쳤으며, 1988년 5월 자유노조(솔리다르노스치)가 주도하는 전국적인 파업으로 국가 주요기간산업이 마비될 위기에 봉착하자 정부는 바웬사에게 노조의 합법화를 제의하고 노조는 바웬사의 설득으로 파업을 중단하고 민주화를 이루게 했다.

전망대 가는길.
전망대 가는길.

크라쿠프의 소금광산을 찾아서 유럽 각지에서 많은 노동자가 몰려오고, 폴란드 왕궁에서도 더 많은 소금을 캐기 위하여 15세기경 강 건너편의 모래밭을 매립해서 신도시를 만든 것이 지금의 카즈미르(Kazimierz) 지역이다. 시내에서 도보로 약10분 거리인 ‘유대인 거리(Ghetto)’는 서유럽 각지에서 핍박을 받고 쫓겨난 기독교인들과 유태인들이 소금광산에서 일하려고 집단 거주지를 형성한 지역인데, 유대인으로서는 이민족에 대한 차별이라고 할 수 있지만 다른 한편 유태인들만의 전통과 문화를 누릴 수 있는 안전지역이기도 했다.

바벨 대성당과 지그문트 예배당.
바벨 대성당과 지그문트 예배당.

2차 대전이 발발하자 나치 독일은 이곳에 살던 64000여명의 유대인들을 모두 아우슈비츠 수용소에 강제 이송하여 처형하고, 전쟁이 끝났을 때에는 불과 6000명 정도만 살아남았다고 한다. 지금도 이곳에는 교회와 무덤, ‘다윗의 별(Star of David)’이라고 하는 육각형 샛별 문양(✡) 등 유태인의 흔적이 곳곳에 많이 남아있다. 특히 2차 대전 당시 수용소에 끌려온 유태인들을 구출하려고 독일인 사업가 쉰들러가 유대인을 자기의 사업장에 고용하겠다며 수용소 간부에게 뇌물을 주고 열차에 태워 탈출시킨 내용을 영화한 스필버그 감독의 ‘쉰들러리스트(Schindler’s list; 1993)'의 무대가 되기도 했는데, 이 영화는 1994년 감독,작품,각본,미술,촬영,편집,음악 등 아카데미 7개 부문 상을 휩쓸었다.

바벨 대성당과 지그문트 예배당.
바벨 대성당과 교황 바오로 동상.

크라쿠프 시내에서 남쪽 비스와 강(江)의 건너 바벨 언덕에는 로마네스크·고딕·르네상스·바로크 등 다양한 유럽의 건축 양식이 혼합된 바벨 왕궁(Wawel Royal Castle)이 있다. 크라쿠프(Krakőw)라는 지명을 가져온 기원이 된 바벨 성은 1000년경 크라쿠프 주교에 의해서 처음 건설되었으나 11세기 중기부터 17세기 초 수도를 바르샤바로 옮겨갈 때까지 폴란드 왕궁이었는데, 크라쿠프 중앙역에서 트램과 시내버스로 약10분 정도 걸리며, 구시가지의 중앙광장에서 도보로 약 5~10분 정도 걸린다. 또, 바벨 왕궁에서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 비알리츠카 소금광산까지 셔틀 버스가 다녀서 바벨 왕궁을 돌아보는 데는 매우 편리하다.

교황 요한 바오로 동상.
교황 요한 바오로 동상.

성 안에는 왕궁을 비롯하여 왕궁 성당인 바벨 대성당 등이 있다. 바벨 성은 1795년 폴란드의 3차분할로 지도상에서 폴란드가 사라졌을 때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가가 군사병원으로 사용하기도 했고, 2차 세계대전 동안에는 나치 독일의 한스 프랑크 총독의 저택으로 이용되기도 했다. 이렇게 불운하게 유지되어 오던 바벨 왕궁은 역설적으로 고성들이 파괴되지 않고 온전히 보존될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며, 2차 대전이 끝난 뒤 폴란드 역사박물관으로 이용되고 있다. 왕궁은 전체적으로 타원형인데, 비스와 강 건너에서 바라볼 때 정면으로 가장 멀리 보이는 붉은색 지붕이 바벨 왕궁이고, 성 왼쪽 앞에 2개의 첨탑이 솟은 건물이 왕궁 성당인 바벨 대성당이다. 바벨 성의 아담한 규모나 건물들의 독특한 양식은 헝가리 부다페스트의 어부의 요새와 마차시 성당을 떠오르게 하는데, 바벨 성의 입장은 매일 9시부터 오후 5시까지이다. 입장료는 19즈워티(약 5유로 정도)이지만, 하루의 입장 인원을 제한하고 있다(어부의 요새와 마차시 성당에 관하여는 2017.10.13. 칼럼 참조).

바벨 성으로 들어가면 입구에 바벨 성당이 있는데, 바벨 대성당은 20개의 고딕 양식 예배당이 있다. 그 중 황금색 돔인 지그문트 예배당은 1499년 화재로 왕궁이 전소되자 지그문트 1세(Sigemund Ⅰ)가 1502년부터 1536년까지 성을 재건하면서 르네상스 양식을 많이 가미해서 동유럽에서 다양한 유럽의 건축양식을 보여주고 있을 뿐만 아니라 폴란드에서 가장 아름다운 성당이라고 한다. 바벨 성당에서는 왕의 대관식과 왕족의 결혼식을 거행했으며, 왕의 사후에는 장례식을 치르고 성당 지하에 무덤을 만들었다. 성당에는 많은 예술품들이 전시되어 있으며, 예상보다 훨씬 넓은 지하공간에는 묘 하나하나마다 화려하여 당시 폴란드 왕의 생활상을 짐작하게 한다. 심지어 가짜로 벽을 만들어서 그 안에 숨겨놓은 묘도 있다.

바벨성 왕궁 전경.
바벨성 왕궁 전경.

성당을 지나서 성 안으로 들어가면 사각형 광장이 있는데, 이곳에 바벨 왕궁의 건물들이 빙 둘러서 밀집되어 있다. 광장의 성당 반대쪽에는 바벨 왕궁을 소개하는 청동으로 만든 모형물 조각이 바벨 성을 한눈에 이해하기 쉽게 해주는데, 이런 청동 모형물은 부다페스트의 마차시 성당과 이스탄불의 블루 모스크에서도 복잡한 성안의 건물들을 한눈에 보여주어서 매우 편리했다. 왕궁에는 모두 71개의 홀이 고딕식 회랑으로 연결되어 있으며, 지금은 15세기부터 19세기까지의 각종 유물을 전시하고 있는 역사박물관으로 이용되고 있다.

정원을 둘러본 뒤 바벨 대성당 방향으로 올라가는 중간에 하얀색 기단에 붉은 벽돌로 쌓은 폴란드 국기가 꽂혀있는 건물이 크라쿠프 시내를 한눈에 내려다 볼 수 있는 파수대이자 전망대이다. 또, 비스와 강의 바벨 성 언덕 쪽의 경사면에는 클락 왕이 불을 뿜는 용과 싸워서 이겼다고 하는 전설이 전해오는 ‘바벨의 용’이 살던 ‘용의 굴(Smocza Jama, Dragon’s Den)’이 있는데, 동굴의 길이는 270m에 이른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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