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창호의 허튼소리] 전 충남 부여군 부군수

우물 안에 사는 개구리가 동해 바다에 사는 자라에게 “나는 참 즐겁다. 우물 판자 위에 뛰어오르기도 하고, 우물 안에 들어가 우물 벽에서 떨어진 벽돌에 올라앉아 쉬기도 한다. 또, 물에 들어가 겨드랑이와 턱으로 물에 떠 있기도 하고, 발로 진흙을 차면 발등까지 흙에 묻힌다.

저 장구벌레나 게나 올챙이 따위가 어찌 내 팔자에 겨누기나 하겠는가? 또, 나는 웅덩이의 물을 모두 혼자 차지해 마음대로 노는 즐거움이 지극하다. 동해에 사는 자라야, 왜 가끔 내게 와서 보지 않는 가”라고 말했다.

동해에 사는 자라가 개구리에게 말했다. "동해 바다의 크기는 수 천리로도 말할 수 없고, 그 깊이 또한 수 천리에 달한다. 우왕(禹王) 10년 동안 9년에 걸쳐 홍수가 졌는데도 넘친 일이 없고, 탕왕(湯王) 9년 동안에 8년이나 가물었는데도 바다 가장자리의 물이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다.”

자라의 말을 들은 개구리는 놀라 까무러쳤다. <장자 추수편 莊子 秋水篇>에 나오는 이야기다.

넓은 세상을 보지 못하거나, 안목이 짧은 사람을 가리켜 우물 안 개구리라고 한다. 사안을 폭넓게 보지 못하고 작은 것에 집착하는 사람을 말하기도 한다. 이는 정치인도 마찬가지다.

개구리를 뜨거운 물에 던져 넣으면 깜짝 놀라 튀어나오지만, 차가운 물에 넣고 천천히 물을 데우면 개구리가 물속에서 나오지 않아 결국 죽는다고 한다. 심지어 물이 뜨거워지는 줄도 모르고 헤엄까지 친다 한다. 변화를 감지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1872년 과학자 하인즈만이 실제로 실험을 했다고 한다. 개구리를 냄비 물속에 넣고 물의 온도를 서서히 끌어 올렸다. 처음 섭씨 21도였던 물의 온도를 90분에 걸쳐서 섭씨37.5도까지 올렸는데 개구리가 냄비 속에서 죽고 말았다. 변하는 물의 온도에 반응을 하지 않고 안주했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에도 이런 부류의 사람들이 있다. 공권력을 향해 화염병을 던지고, 쇠파이프를 휘두르는 폭력을 행사하면서 민주주의를 외치는 것은 난센스다. 그 같은 행동이 가능한 것은 자유민주주의가 넘쳐나도록 사회가 이미 변화했기 때문 아니겠는가.

군사독재 시절에 민주화를 요구하던 80년대 운동권 사고를 아직까지 갖고 있다면, 이들도 변화를 모르는 사람이 아닐 수 없다. 구소련과 동구권이 붕괴되고, 동. 서독이 통일된 지 이미 오래됐음에도 종북사상을 갖고 있는 사람은 우물 안 개구리나 냄비 속 개구리 같은 사람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이들이 정치인이라 해도 마찬가지다.

글로벌 경제가 온통 위기상황이고, 우리나라 경제에 울리는 비상경고음에도 안주하고 있는 정치권의 일부 사람들은 무능하거나, 우물이나 냄비 속에 들어앉아 있는 개구리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돌아오는 20대 국회의원 총선거는 ‘나라가 발전하느냐 후퇴하느냐’ 하는 갈림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는 선거를 통해 ‘우물 안 개구리나, 냄비 속 개구리 같은 정치인’을 골라내야만 한다. 국민들의 현명한 판단이 요구되는 실로 중차대한 선거다.

국회의원은 막중한 국사를 다루는 공인이기에, 능력이 부족하거나, 안목이 좁거나, 변화를 감지하지 못하면 -국내. 외 정세 변화를 제대로 읽지 못하면- 국민들의 삶을 향상시키기는커녕 오히려  화를 입힐 것이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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