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학용 칼럼] 한국사 ‘역사의 시장’에서 경쟁해야

김학용 주필
국사 교과서의 국정화를 선언함으로써 ‘좌편향 국사’를 바로잡는 게 박근혜 정권의 소임이 됐다. 현 정부는 현행 교과서가 좌편향적으로 만들어졌다고 보고 있다. 8종 가운데 7종이 이승만과 박정희로 이어지는 보수 세력에 대해선 야박하게 평가하고, 이들의 상대편에 대해선 후하게 기술하고 있다고 본다.

지난주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 4종을 빌려 읽어봤다. 그 중 하나는 전국 2300여개 학교 중 3곳만 쓰고 있다는 ‘우편향’ 교학사 교과서다. 논란이 많은 근현대사 부분만 살펴봤다. 70~80년대 국사책에 비하면 근현대사 분량이 크게 늘었다.

이승만 박정희 북한에 대한 시각 차이

주로 이승만, 박정희, 북한 관련 문제에 대한 시각 차가 큰 편이었다. ‘좌편향’은 이승만 박정희에 대해 공(功)보다는 과(過)를 적극 기술하고 있고, ‘우편향’은 과보다는 공에 비중을 두어 서술하고 있다. 좌편향은 이승만의 독립운동을 소극적으로 평가하는 데 반해 우편향은 “이승만은... 좌우를 떠나 당시 한국인들에게 민족지도자로 받아들여졌다”고까지 평가하고 있다.

우편향은 박정희 시대가 이룩한 경제성장에 주안점을 두면서 이승만과 박정희가 아니었다면 북한처럼 공산주의가 되었을 수도 있다는 메지시를 강하게 풍긴다. 반면 좌편향은 이들의 독재정치 실상에 더 많은 분량을 할애하고 있다. 과거 사회주의계열 인물을 다루는 데 있어서도 양쪽엔 차이가 있다. 김대중 노무현 정부에 대한 평가도 꽤 다르다. <아래 사진에 좌-우편향 교과서 현대정치사 전문 비교>

역사는 과거에 대한 기록이지만 단순한 기록이 아니라 반드시 해석이 동반된다. 해설과 해석이 없는 역사는 역사가 아니다. 그저 연대기일 뿐이다. 많은 역사의 파편 가운데 어떤 것을 선택하는가 하는 문제부터 시각과 해석이 다를 수밖에 없다. 때문에 역사는 반드시 ‘누군가를 위한 역사’라고 말하는 학자들도 있다.

박근혜 대통령은 ‘올바른 역사’를 만들겠다고 했다. 그러나 무엇이 옳고 그른지의 기준은 사람에 따라 다를 수 있다. 그럼 누가 옳은 것인가? 17세기 영국의 밀턴은 책에 대한 검열 문제가 제기됐을 때 ‘사상의 자유시장’을 주장했다. 정부가 나쁜 책을 걸려내려 애쓸 필요없이 ‘사상의 시장’에 맡겨두면 못된 책은 외면을 받는다는 개념이다. 

국정화 말고 ‘역사의 시장(市場)’에서 경쟁해야

역사도 ‘사상(지식)의 자유 시장’에서 경쟁하도록 해야 옳다. 보다 많은 사람이 인정하고 선택하는 역사가 그래도 더 올바른 역사라고 봐야 한다. ‘역사의 시장(市場)’이 있어야 그런 선택이 가능하다. 국정화는 이런 시장 자체를 없애고 정부가 독점하겠다는 것이다. 정부가 도덕적이고 -물론 편향적이지도 않고 - 최고의 능력을 가졌을 때라야 올바른 교과서를 만들 수 있다.

세상에 그런 정부는 없고 올바른 교과서를 만드는 건 더 어렵다. 오히려 더 나쁜 교과서가 나올 가능성이 크다. 상품도 사상(지식)도 독점하면 좋은 제품이 나올 수 없다. 자유시장 경제를 내세우는 정부가 시장폐쇄 정책을 쓰는 것은 자가당착이다.

박근혜 정부도 국정화의 문제점을 모르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역사의 시장에서 보수 세력의 이념과 가치를 대변해줄 교과서의 경쟁력이 너무 떨어지고, 지금으로선 이를 극복할 방법도 마땅치 않다고 봐서 아예 시장 폐쇄 정책을 쓰려는 것이다.

‘역사 시장’에서 보수 진영이 고전하는 이유

나는 ‘역사 시장’에서 보수 세력이 왜 이토록 고전하는지가 좀 의문이다. 보수 세력은 정치와 경제 분야에서 우위를 점하고 있다. 정부수립 이후 김대중 노무현 정부를 빼면 보수 세력이 줄곧 지배해왔다. 지금도 보수가 집권하고 있다. 그런데 역사의 시장에선 왜 보수가 맥을 못 추는가?

가장 큰 이유는 보수 쪽 자신의 열세 때문이 아닌가 한다. 일부 정치인들은 역사학자의 90%가 좌파라고 말한다. 그 정도는 아니어도 진보 쪽이 우위에 있는 건 분명해 보인다. 1980년대까지 독재로부터 유발된 ‘학문적 반동’의 여파도 계속되고 있다고 봐야 한다. 우리나라 보수가 진보에 대해 지고 있는 부채다.

긴 독재 시대를 거친 만큼 새로 드러내야 할 역사가 적지 않았을 것이다. 한 역사 교사는 “80년대 후반부터 현대사 연구가 가능해졌고 2000년대 이후에야 균형잡힌 연구 결과가 나왔다”고 했다. 그런 점에서 근현대사는 기본적으로 진보 진영에게 유리할 수밖에 없다. ‘균형잡힌 역사’가 보수가 보기에는 좌편향일 수 있다.

물론 좌편향 교과서 중엔 현대 정치인(대통령)을 평가하면서 한쪽만을 두둔하는 듯한 국사책도 있다. 어떤 국사책은, 박정희는 부정적 이미지를 주는, 검은 선그라스를 쓴 사진만 1장 쓰고, 그의 정치적 라이벌이었던 김대중은 사진은 4장이나 실었다.

지금 국사 교과서는 현대 정치에 대한 평가 기능도 적지 않다. 미래의 유권자가 처음 정치를 접하는 매체이기도 하다. 좌편향 국사는 보수 세력들에겐 신경쓰이는 일이다. 어떻게든 바꾸고 싶을 것이다. 역사 시장에선 개선 방법이 없다고 보고 국정화란 퇴행적 수단까지 동원하고 있다.

대통령 아니라 딸이 쓰는 아버지 역사 우려

박 대통령의 아버지 박정희는 역사적 평가의 대상이다. 박 대통령이 국정화까지 밀어붙이는 배경으로 보는 사람도 많다. 정말 그게 이유라면 대통령이 아니라 딸이 쓰는 아버지의 역사가 된다. 사실을 사실대로 기술해도 신뢰성이 떨어질 것이고 이런 국사책이 오래가기는 어렵다.

‘역사 시장’이 제대로 작동되고 있는가 하는 문제는 있다. 몇몇 학교가 ‘우편향 교과서’를 채택하자 전교조 등이 극력 반대하여 뜻을 관철시킨 적이 있다. 국사 국정화는 ‘좌편향의 100% 완승’이 불러온 측면도 있다. 게임은 공정해야 한다. 물론 지금 우편향 제품은 공정한 경쟁에서도 상대를 이기기 어려울 정도로 품질 문제가 있다. 유일한 우편향 교과서가 오류가 가장 많았던 것도 우연은 아닐 것이다.

보수 쪽에선 책을 만들고 가르치는 사람들에게만 역사에 대한 선택권이 주어지고 학부모 등에게는 선택권이 차단돼 있다는 불만도 크다. 이 부분도 역사 시장의 공정성 문제라 할 수 있다. 역사가 전문분야이긴 하지만 전문가의 전유물은 아니라는 점도 간과해선 안된다.

여권은 국정화 문제가 내년 총선에도 불리하지 않다고 계산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여당이 이긴다고 해도 미래의 ‘역사 시장’에 악재만 하나 더 만드는 꼴이다. 국정화 반대가 심해 정부가 필진조차 공개하지 못하는 상황이니, 이 기사가 기우에 그칠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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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년 기준 고교 한국사 8종 가운데 채택률 2위인 비상교육 발행 한국사(위)와 3200개 고교 중 3곳(채택률 0.1%)만 채택한 교학사 발행 한국사(아래). 4.19 이후 현재까지 '자유민주주의 발전'을 주제로 정치 사회 분야를 기술한 내용의 전문이다. 가장 많이 편향성 논란을 빚는 부분에 속한다. 비상교육 한국사는 좌편향으로, 교학사 한국사는 우편향으로 지목된 책이다. *채택률 1위(33%) 미래엔 발행 한국사를 미처 구하지 못해 비상교육 한국사를 사용했다.>

고교 한국사 8종 가운데 채택률 2위(29.4%)를 기록한 비상교육 발행 ‘좌편향 한국사’










이하는 3200개 고등학교 가운데 3곳만 채택한 교학사 발생 ‘우편향 한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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