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경훈의 공감소통] 방송인

아침 출근 길. 오늘은 평소보다 조금 늦게 일어났더니 마음이 더 급하다. 부리나케 나갈 준비를 하고 17층에서 엘리베이터를 타니 19층 아주머니가 꼬맹이 딸과 함께 타고 있다.

한손에는 유치원 가방을 들고 다른 손으로는 딸아이의 머리를 빗겨 준다. 아이를 깨워 아침밥을 먹이고 다급하게 나오는 것이겠지. 그런데 아이의 눈을 보니 잠이 덜 깬 듯 반쯤 감겨있다. 그 모습을 보니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나온다. 우리 집 아이들도 이런 때가 있었는데. 유치원 다닌 지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10년이 훌쩍 지나갔다.

잠시 후, 지하 주차장에 도착해보니 어럽쇼! 호주머니를 뒤져봐도 자동차 열쇠가 없다. 혹시나 싶어 가방을 뒤져봐도 마찬가지. 아이고, 오늘은 자동차 열쇠를 집에 두고 왔구나. 머리가 나쁘면 평생 몸이 고생한다더니 옛말 그른 게 없다.

할 수 없이 다시 집으로 가기위해 엘리베이터 앞에 섰다. 그런데 조금 전에 만났던 19층 아주머니가 헐레벌떡 뛰어온다. 아이를 유치원 버스에 태우고 오는 길이겠지. 그녀가 나를 보더니 뭔가를 알았다는 듯 피식, 하고 웃는다.

“다시 올라가시는 걸 보니 집에 뭘 놓고 오셨나 봐요?”
잘못한 것도 없는데 가슴이 뜨끔하다.
“아, 예. 뭐. 그냥요.”
내가 대충 얼버무리자 그녀가 묻지도 않은 말을 기어코 한다.
“아휴, 말도 마요. 우리 집 남자는 더 심해요…….”

그렇다. 나는 ‘건망증’이 심하다. 그래서 뭐든 잘 잃어버린다. 그동안 내가 잃어버린 우산을 모으면 1톤 트럭으로 한대도 넘을 거다. 사무실이건 버스에서건 들고 들어간 우산이 나올 때는 없다. 그런데 그게 왜 집에 오면 생각나는지 참 희한하다.

우산뿐이 아니다. 책, 지갑, 카드, 핸드폰은 물론이고 며칠 전에는 모임회원들의 이름표가 가득 든 명찰가방을 식당에 놓고 와서 다시 다녀오기도 했다. 더 희한한건 그 가방을 놓고 온 사실 조차 모르고 있다가 식당 사장님의 전화를 받고나서야 알게 되었다. 이쯤이면 중증이란 생각도 든다.

이외에도 비슷한 일은 무수히 많다. 아파트 지상주차장에 차를 주차해 놓고 지하주차장으로 내려가고 지하 2층에 차가 있는데 1층에서 헤매기도 한다.

이런 일도 있었다. 백화점에서 MC를 봐줘야 하는 행사가 있었는데 사정이 있어 사무실에서 조금 늦게 출발했다. 그날따라 거리는 차들로 붐비고 있었고 시간을 맞추지 못할까 하는 두려움이 엄습했다. 좀처럼 이런 일이 없었는데…….

불행 중 다행으로 행사시작 10분 전에 겨우 백화점 앞에 도착한다. 하늘이 도와주셨구나. 그런데 주차장 입구가 차들로 꽉 막혀있다. 아아, 하나의 문제를 해결하면 또 다른 문제가 생긴다더니 이게 그런 경우구나. 마음은 급하고 차들은 움직이지 않고. ‘안절부절’에 ‘노심초사’까지 더했다. 그렇게 마음을 졸이며 지하주차장에 차를 주차하는데도 10분이나 걸렸다.

차를 세우고 10층으로 올라 가기위해 엘리베이터 앞에 섰다. 이런 때는 엘리베이터도 늦다. 마음은 급해 죽겠는데 층층마다 다 선다. 겨우겨우 행사장에 도착하니 예상했던 대로 담당자의 얼굴은 이미 굳어있었다. 10분이나 지났으니 그럴 수밖에. 잘못했으니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다.

행사는 그렇게 시작되었고 별 일 없이 잘 끝났다. 행사가 끝난 후 긴장이 풀렸는지 그제야 한숨이 나온다. 휴, 오늘 큰 경험했다. 다음부터는 절대로 늦지 말아야지. 한데 그게 끝이 아니었다. 지하주차장으로 내려오는데 내차를 어디에 주차해 놓았는지 생각이 나지 않는다. 내릴 때 분명히 주차 기둥번호를 보았을 텐데 머릿속이 하얗다.

선택의 여지가 없다. 직접 눈으로 확인하는 수밖에. 자동차 리모컨을 손에 들고 백화점 지하 6층부터 주차장을 뒤지기 시작했다. 6층, 5층, 4층까지 찾아도 내 차는 보이지 않는다. 30여분을 헤맨 끝에 3층에서 간신히 찾았다. 

집으로 돌아오며 치미는 화를 도저히 참지 못한 나는 내 머리를 쥐어박으며 마구 욕을 했다. 에구, 미련 곰탱이. 너는 어째 매사가 그러니? 기본적인 것을 빠뜨리면 대가를 지불해야 한다는 걸 아직도 몰라? 이젠 정신 좀 차리고 살아봐.

그런데 더 고통스러운 것이 있다. 사물로 인해 내 몸이 고생하는 건 얼마든지 견디겠는데, 나를 더욱 비참하게 하는 건 사람을 기억하지 못하는 거다.

몇 달 전, 피부과병원을 찾았을 때의 일이다. 병원 문을 밀치고 들어가자 어떤 아주머니가 나를 보더니 멈칫 한다. 나도 그녀를 어디서 본 것 같은 느낌이 들었지만 생각이 나질 않는다. 누구였더라?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그녀가 앉아있는 내게 다가오더니 말을 건다.

“너 경훈이 맞지?”
내 이름까지 정확하게 알고 있는걸 보니 나와 가까운 사이였을 텐데, 누구인지 모르겠다. 벌떡 일어나며 나도 반갑게 인사를 했다. 존댓말로.
“반갑습니다. 안녕하세요?”
“어? 너는 나를 모르는가 보구나? 잘 생각해봐?”

손가락을 자신의 얼굴에 댄다. 모르는 걸 안다고 할 수도 없고. 이럴 땐 솔직하게 말하는 게 좋다.
“제가 생각이 나지 않아서 그러는데, 누구신지 물어 봐도 될까요?”
“어쩜? 진짜 나를 몰라보는구나. 정말 기억 안나니?”

실망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머리를 굴려봤다. 내 이름을 알고 있고 반말까지 하는 걸 보니 나보다 나이가 많거나 적어도 동갑이겠구나. 허나 이것만 가지고 어떻게 알 수 있단 말인가. 
“몰라봐서 죄송합니다. 누구신지 알려주시겠어요?”

내가 재차 물어도 그녀는 말이 없다. 알려주고 싶지 않다는 뜻이겠지. 겉옷을 다 입은 그녀는 초등학생 딸아이의 손을 잡더니 문 쪽으로 걸어가며 말한다. “오랜 만에 만나서 반가웠다. 잘 지내라.”
그리고는 병원 문을 밀치며 나가 버리는 것이 아닌가. 잠깐 동안 어안이 벙벙했지만 그녀가 누군지 너무나 궁금했다. 카운터에 있는 간호사에게 물었다.

“지금 나간 여자분 성함 좀 알 수 있을까요?”
“보호자 분 이름이 OOO님 이네요.”
누구였더라? 어디서 들어본 이름 같은데. 아아, 이제 생각난다. 그녀였구나. 고등학교 3학년 때 학력고사를 본 후 소개팅에서 만났던 나와 동갑인 소녀. 그녀는 발랄하고 눈빛이 무척 맑았던 숙녀였다.

그 시절 나는 이미 대학을 포기한 상태여서 삶의 희망도 없었고 감정 표현도 서툴렀다. 그래서였을까. 대학진학을 택한 그녀와는 연락이 차츰 뜸해졌고 우리는 더 이상 만나지 않았다. 그때 우리는 어렸고 서로의 감정을 충분히 헤아릴 만큼 성숙하지 못했었다. 급히 병원 문을 열고 거리를 두리번거렸지만 그녀는 이미 인파속으로 사라진 뒤였다.

내가 건망증이 심한 이유는 나이 때문이란 생각이 들었다. 자료를 찾아보니 과학적인 근거도 있다. 사람은 나이가 들수록 단기기억을 장기기억으로 바꿔 저장하는 능력이 떨어진다나.
이래선 안 되겠다, 싶어 나름의 자구책을 강구했다. 방법은 메모하기와 전화번호 외우기. 스케줄이나 머릿속에 생각나는 것은 무조건 수첩에 적었고 가까운 사람의 전화번호는 핸드폰에 저장하지 않고 직접 외우려 노력했다. 하지만 내 열정과 달리 머리가 따라주질 않는다. 수첩을 어디다 두었는지를 모르겠고 전화번호 외우기도 마찬가지.

좀 더 효과적인 방법은 없을까? 찾으면 길이 있다더니 좋은 방법을 알아냈다. 일본의 시라사와 다쿠지 박사가 주장한 ‘이틀 전 일기 쓰기’다. 그의 주장에 의하면 이틀 전의 일기쓰기는 단기기억을 장기기억으로 바꿔주는 해결책이 될 수 있단다. 이렇게 좋은 방법이 있다니. 당장 시작했다.

헌데 이것도 문제가 있었다. 이틀 전 일이 도무지 기억나지 않는다. 4명이 함께 점심을 먹었는데 누구누구였더라? 일기 한 장 쓰는데 오랜 시간을 끙끙거렸다. 처음이니까 그렇겠지. 누구나 처음은 힘든 법이잖아. 차츰 나아질 거야. 이렇게 생각했지만 이후로도 마찬가지. 노력에 비해 시간이 너무 많이 들었기 때문에 결국 이방법도 포기했다.

나는 평생 이렇게 살아야 하는 팔자란 말인가. 슬프다. 그런데 내 마음을 바꿔주는 일이 생긴다. 최근 일이다. 아파트 지하주차장에서 내 앞으로 사람이 휙, 하고 지나간다. 한데 그의 행동이 특이하다. 손에는 자동차 리모컨이 들려있었다. 순간 웃음이 나왔다. 아이고, 저 양반도 나랑 비슷한 사람이네. 가만, 그러면 나만 그런 게 아니란 말인가?

모임친구들에게 물어봤다. ‘건망증’에 대해서. 그때 알게 된 사실. 친구들도 비슷하단다. 주차해 놓은 차를 찾아다니고, 물건을 어디다 뒀는지 모르고, 약속한 걸 깜빡 잊어버린단다. 그랬구나. 너희들도 그랬구나. 나만 그런 게 아니었구나.

누군가는 이렇게 말할지 모른다. 당신 머리가 나쁜데 그걸 합리화 시키려 한다고. 과연 그럴까? 독일의 심리학자 헤르만 에빙하우스의 ‘망각곡선’에 따르면 기억하려는 의도가 없다는 전제하에 인간은 평균적으로 1시간만 지나도 절반(50퍼센트)을 잊어버리고, 하루가 지나면 70퍼센트, 한 달이 지나면 80퍼센트를 잊어버린다고 한다. 그렇다면 인간은 다 똑같다는 거다.

그래서 나는 이제 떨어지는 기억력 때문에 더 이상 괴로워하지 않기로 했다. 그러니 이 글을 읽는 여러분도 너무 자책하지 마시길. 만약 지하주차장에서 자동차 리모컨을 들고 왔다 갔다 하는 사람을 본다면 씨익, 한번 웃어주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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