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창호의 허튼소리] 전 충남도 부여군 부군수

서애 유성룡이 지은 <징비록>을 읽다 보면 안타까운 경우가 많다. 책을 덮고 싶을 때가 한 두 번이 아니다. 몇 가지만 예를 들어본다.

임진년 4월 13일 왜군이 부산포를 함락한 후, 채 10일이 안 돼 상주에 이른다. 순변사 이일이 적을 맞아 싸우게 되는데, 개령현(지금의 김천시 개령면 지역) 사람이 왜군이 선산에 이른 걸 알고 “적군이 가까이 왔다”고 알렸다. 하지만 이일은 “여러 사람을 의혹 시킨다”고 그를 목 베었다. 실제 왜군이 상주에서 불과 20여 리 떨어진 곳까지 왔는데도 진중에 척후병이 없어 이를 알지 못했던 것이다.
 
이일이 군관 한 사람에게 적을 탐지하라고 하자 군관이 말을 탄 채 역졸 두 사람에게 고삐를 잡히고 천천히 갔다. 그는 숨어있던 왜 척후병의 총을 맞고 죽었다.

 삼도순변사 신립이 지휘한 충주 싸움도 어이없기는 마찬가지다. 당초 신립은 조령을 지키려다가 ‘이일이 패했다’는 소식을 듣고 충주로 돌아갔다.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종사관 김여물이 “적은 군대로 적 대군을 방어할 곳은 지형이 험한 조령뿐”이라고 했지만, 신립은 “이 곳에서는 기병을 쓸 수 없다”며 듣지 않았다.

상주 싸움에서 승리한 왜군은 4월 27일 험지 조령을 넘었고, 4월 28일에 충주 탄금대 전투가 벌어진다. 전투 전날, 친근한 군관 한 사람이 “적군이 벌써 조령을 넘었다”고 보고했지만, 신립은 적을 대비하기는커녕 “거짓말을 했다”며 군관을 목 베었다. 이때 적군은 이미 10리 안에 와 있었다.

활로는 엄폐물이 많은 험지에서 숨어 싸우는 것이 유리했음에도 평지로 나왔으니 사거리가 긴 조총을 가진 왜군이 유리했다. 징비록에도 ‘논이 있고, 물과 풀이 얽혀 말이나 사람이나 달릴 수 없었다’고 적고 있다. 배수진을 쳤지만 장수 신립을 비롯한 모든 병사가 전사하거나 물에 빠져 죽었다.

징비록은 왜군의 진격이 이 같이 빨랐던 것과 관련해 지적하고 있다. ‘본도(경상도)의 수군과 육군의 장수들이 모두 겁쟁이였다. 좌수사 박홍은 군사를 한 사람도 출동시키지 않았고, 우수사 원균은 배가 많았음에도 적군을 바라보기만 하고 멀리 피해 돌아가며 한 번도 싸우지 않았다. 육지에서는 좌병사 이각과 우병사 조대곤이 도망가거나 교체되었다. 적군은 북을 치며 밤낮으로 북상하는데도 한 곳에서도 대항하여 적군의 기세를 늦추려는 사람이 없었다.’

임진왜란 때 관군은 무능했다. 간혹 승전한 경우도 없지는 않지만 지휘관들은 싸움에 임해 도망치기 일쑤였다.

결국 무능한 관군을 대신해 의병들이 일어났다. 의병들은 향토방위와 나라수호를 위해 자발적으로 일어났다. 비록 그 수는 적었지만 지리적 이점을 이용해 적을 공격하여 큰 피해를 입혔다.

이제 필자는 고향 금산에서 있었던 임진년 700의사들의 싸움이 얼마나 중요했었던 지를 언급해보고자 한다.

왜군은 부산포에 상륙한지 불과 20일 만에 수도 한양에 입성한다. 선봉장 ‘고니시 유키나가’는 피난하는 선조를 뒤쫓아 평양까지 와서는 “일본의 수군 10만이 서쪽 바다로 오는 중인데 대왕의 행차가 어디로 갈 것입니까”하고 위협했다. 왜군이 바닷길로 군사를 신속히 이동하고 호남 등의 곡창지대를 점령해 후방을 든든히 하려 했음을 알 수 있다.

다행이 우리 바다에는 연전연승하며 바다를 지키는 이순신 장군이 있었다. 서해 진출을 노리던 대규모 왜 수군을 한산도 앞바다에서 통렬히 격파했다. 만약 이 때 우리 수군이 패했더라면 곡창지대 호남평야가 왜군의 수중에 들어가고, 병력과 군량 조달을 할 수 없게 된 이순신 장군도 활동이 위축돼 연전연승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또, 수로를 통한 왜군의 빠른 진격이 있었다면 선조는 명나라로 망명하였거나, 왜군의 포로가 되었을 것이다. 한산도 싸움에서 왜 수군이 크게 패하자 후방 안전을 보장받지 못한 ‘고니시 유키나가’도 평양에 발이 묶인 채 더 이상 진군하지 못했다.

이순신 장군에 의해 바닷길이 막힌 왜적들은 육지에서 호남으로 진출하려고 노렸다. 바로 제6진을 이끌고 온 ‘고바야카와 타카카게’였다. 그는 이치 싸움에서 권율 장군에게 1차 패한 후 금산성에 머무르며 호남 진출을 다시 노리고 있었는데, 수적으로 열세인 700의병들이 이를 저지했던 것이다. 이 칠백의병들의 역사적인 싸움은 임진년 8월 18일에 있었다.

이 싸움에 앞서 의병장 조헌은 승병장 영규 대사와 함께 임진년 8월 1일에 청주성을 먼저 수복했었다. 곧바로 조헌은 영규 대사와 함께 왜군의 호남 진격을 막고자 금산으로 의병을 이끌고 왔다. 함께 싸우기로 한 관군이 약속을 깨 절대적 열세였지만, 의병들은 계획대로 싸웠다. 마지막 한 사람까지 처절하게 싸우다 모두 옥쇄했다.

왜적 1만 5000여 명을 상대로 싸웠으니 이길 수 없는 것은 당연했다. 하지만 이 싸움에서 큰 피해를 입은 왜적도 퇴각할 수밖에 없었다. 또 다시 호남 곡창이 지켜진 것이다. 이 싸움으로 이순신 장군의 제해권도 보장되었다. 실로 중차대한 싸움이었다.

싸움이 끝나고 4일이 지난 후 조헌의 제자 박정량과 전승업 등이 이들을 한 곳에 모셔 묻으니 바로 칠백의총이다. 매년 9월 23일이면 정부에서 칠백의사 순의제향을 올리는데 올 해가 423회 째였다.

우리는 나라 위해 순국한 칠백의사의 고귀한 희생정신을 잊지 말아야 한다. 의병정신은 스스로를 지키려는 자주 방위정신이고, 이는 곧 지금의 민방위 정신이다. 칠백의총은 바로 이런 민방위정신의 발상지라 하지 않을 수 없다. 필자는 나라가 위태로울 때마다 고향의 칠백의총이 생각난다.

저작권자 © 디트NEWS24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