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기업인(21)] 나로호 발사체 납품한 삼진정밀…수(水)처리시스템으로 사업 확대

부친 가내수공업 돕다가 15평 임대공장 얻어 독립 창업
1991년 삼진정밀 설립…아무도 가지 않은 밸브산업 ‘개척’
창업 10여년 만에 세무조사 받은 뒤 ‘도덕성’ 재무장 ‘정도경영’ 길
‘밸브 제조업→엔지니어링+서비스=IT·스트프웨어 융복합’ 내세워 새 성장 견인

 

 
‘밸브(산업) 하면 정태희지.’

박희원 라이온켐텍 대표, 이두식 이텍산업 대표, 강은모 유성관광㈜ 대표 등 대전의 내로라하는 CEO들이 정태희(57) ㈜삼진정밀 대표를 가리켜 하는 말이다.

정태희 회장은 1991년 삼진정밀을 창업, 아무도 가지 않은 밸브산업을 지금까지 국내 업계 1위로 올려놓은 주역이다.

1990년대는 물론 200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대전은 물론 국내에서도 밸브산업은 볼모지나 다름없었다. 주로 미국이나 일본 등 선진국 기업에서 수입해다 쓰는 형편이었다.

밸브산업의 전환기가 마련된 것은 1990년대 중후반부터 2000년대 들어서면서다. 삼진정밀은 전사적으로 밸브산업의 역량 강화를 위해 온 힘을 모았다. 2001년 처음 매출 100억 원을 넘어섰고, 2004년 200억 원을 돌파하면서 밸브 분야에서 경쟁력을 갖기 시작했다.

삼진정밀은 현재 특허 보유수로 따지면 국내 중소기업 2위, 관련 업계에서는 1위다. 밸브와 관련 200여개의 특허와 기술인증을 보유하고 있다.

지난 12일 대전 대화동 대전산업단지 내 삼진정밀 본사 집무실에서 만났을 때 정 회장은 대외활동을 자제하고 있었다. 목에는 가로로 25㎝ 길이의 수술 자국이 선명했다. 오래 전부터 앓고 있던 갑상선 결절 수술을 받고 회복 중이어서 외출을 자제하고 있다고 했다.

인터뷰하기에 다소 불편하지 않겠냐고 묻자 “이것(인터뷰)도 지역 경제 발전을 위한 일 인데, 괜찮다”며 흔쾌히 응했다. 잘 웃고 낙천적인 성격으로 이름 난 그에게서 긍정의 힘을 엿볼 수 있다.

대학교수의 꿈 접고 부친 가내수공업 도와…인생의 변곡점

어려서부터 정 회장의 꿈속에는 ‘CEO(기업가)’가 없었다. 충남 태안군 소원면 파도리 4남 1녀의 장남. 시골 소년인 그는 내성적이고 모범적인 평범한 학창 생활을 보냈다. 평소 학생들을 가르치고 싶어 대학에서 경영학 학·석사를 졸업한 뒤 박사 과정을 밟으며 시간강사로 지냈다.

그는 “학창 시절, 어울리는 것을 좋아하지 않고 사색하거나 혼자 있길 좋아하는 내성적인 성격 탓에 별명이 ‘색시’였다”고 했다. 그런 그가 외향적인 성격으로 변하고 성공한 사업가로 크기에 앞서 인생의 변곡점을 맞게 된다.

1987년 어머니가 중풍으로 쓰러지면서다. 고민할 이유 없이 서울에서의 시간강사 생활을 접고 대전으로 내려왔다. 강사 생활로는 벌이가 시원찮은 데다 어머니를 돌보며 아버지가 하는 일을 돕기 위해서였다.

폐비닐을 수거해 고무대야를 만들고 폐플라스틱을 녹여 수도관 덮개를 만드는 사업을 하던 부친을 따라 현장을 돌아다녔다. 그렇게 부친을 따라 1990년까지 3년간 가내수공업을 도왔다. 

정 회장은 “거지가 따로 없었다. 쓰레기 더미에서 폐비닐이나 폐플라스틱을 수거하며 다니다 보니 꼴이 말이 아니었다”고 했다.

이 길을 계속 가야 하는지 끊임없이 고민했다. 꿈과 현실 간 큰 괴리로 인해 내적 갈등이 컸다. 밤에는 신경안정제 없이 잠도 못 이룰 정도였다. 그는 “갑상선 질환도 이때부터 생겼다”고 했다. 

1991년 삼진정밀 창업…밸브산업 ‘개척자’

그러다 수도 엔지니어들과 친분을 쌓았던 정 회장은 “밸브 하나만 제대로 만들어도 큰돈을 벌 수 있을 것”이라는 그들의 말을 듣고 창업에 도전했다.

1991년 대전 대화동 일원에 50㎡(15평) 남짓한 공장을 임대해 밸브사업을 시작했다. 어렵게 구한 1500만원이 전부였다. 대전의 밸브산업 개척자가 되는 순간이다. 그의 나이 34살 때다.

그가 영업을 맡고, 당시 친분이 있던 황경서(62·기술고문)씨가 기술개발을 책임졌다. 창업 공신인 황 고문은 지난해 정년퇴직 후 지금은 중국에서 노후를 보내고 있다. 지금도 황씨와 종종 연락을 하고 지낸다고.

15㎜ 가정용 수도밸브에서 시작한 삼진정밀의 첫해 매출은 4000만원. 새벽 2~3시까지 구두 밑창이 닳도록 전국을 무대로 영업을 다녔다. 돈이 조금 모아지면 새 아이템을 개발하고 제작해 다시 시장에 내다 팔았다. 그렇게 10년간 황 고문과 함께 기술개발에 올인하며 회사를 키웠다.

기술력 하나로 승부한 삼진정밀은 창업 10년 만인 2001년 처음 매출 100억 원을 넘겼고, 2004년에는 매출 200억 원을 돌파했다.   

창업 초기 에피소드 하나를 꺼냈다. 1993년 대전엑스포 당시 전시회를 불과 며칠 앞두고 납품한 밸브가 터져 물이 넘쳤다. 바로 옆에는 엑스포장 전체를 통제하는 전산콘트롤타워가 있었다.

정 회장과 황 고문 두 사람은 가슴까지 물이 차오르는 상황에서 밸브를 담당하는 관리자를 찾을 때까지 밸브를 발바닥으로 막고 버텼다. 그는 “당시 침수 문제가 크게 발생했다면 오늘의 삼진정밀은 없었을 것”이라며 웃었다.

그는 이때부터 품질관리 시스템을 만들어 가기 시작했다.  

세무조사 철퇴…도덕성 재무장 ‘정도경영’ 길로

삼진정밀은 1996~1997년 외환위기 당시에도 ‘호시절’을 보냈다. 그는 “당시 (회계에) 무식(?)했으니 ‘회사 돈, 내 돈’이 어디 있었겠나. 사실 체계적인 운영과 거리가 먼 주먹구구식으로 경영하던 시절이었다”고 했다.

그러다 2000년 세무조사 철퇴를 맞았다. 회사가 휘청거릴 정도였다. 경영을 다시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는 “세무조사를 받은 후 ‘이게 아니다’ 싶었고, 그래서 ‘관리가 돈’이라는 생각을 하게 됐다”며 “밥 사줘 가며 경영하던 ‘관행’을 끊었고, 기업은 물론 인생의 큰 전환점을 맞게 됐다”고 했다.   

역설적이게도 같은 해 대통령 표창을 받았다. 회사를 접을까 고민도 하다가 또 다른 기회일 수 있겠다고 마음을 고쳐먹었다.  

이때부터 도덕성으로 재무장해 ‘정도경영’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회사 조직도 체계화하기 시작했고 관리직원들을 대거 뽑았다. 밥 사줄 돈으로 더 많은 기술개발에 투자했고, 직원들의 도덕성도 업그레이드시켰다. 회사 역량도 덩달아 커지기 시작했다.

2000년대 중반 들어 정체기를 맞았다. 그러던 중 조달청 우수제품지정제도가 생겨났고, 정 회장은 다시 한 번 조달시장으로 눈을 돌렸다. 성장을 위해 안정적인 매출처가 필요했던 삼진정밀에 조달시장은 언젠가는 도전해야 할 분야였다. 까다로운 심사 끝에 우수제품으로 지정됐다. 삼진정밀은 이 인증을 이용해 조달시장을 뚫었고, 해외 시장 진출의 발판도 마련했다.

2000년대 중반 사업 영역 확장…성장세 구가

정 회장은 2000년대 중반 밸브만으로는 한계를 느꼈다. 삼진정밀의 성장을 바탕으로 사업영역을 확대했다.

2005년 재생용 플라스틱을 활용하는 환경업체인 ㈜삼진코리아를, 2007년 오일·가스·석유화학용 볼밸브 전문업체인 ㈜삼진JMC를 잇따라 세웠다.

 

지금은 4000㎜ 대구경 밸브와 댐에 사용하는 밸브까지 생산한다. 또 상하수도용 스마트 그리드로 불리는 ‘지능형 관망(管網) 시스템’이라는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를 망라한 기술도 보유하게 됐다.

2013년 영하 196도 이하의 온도를 갖는 초저온 유체의 제어를 위한 ‘버터플라이밸브’도 개발해냈다. 이런 공을 인정받아 지난해 대통령 표창을 받기도 했다. 밸브 관련 특허만 200여개를 보유하고 있으며, 전 세계 35개국에 수출하고 있다.

밸브란 배관 속 유체 흐름을 제어하는 장치. 흔히 볼 수 있는 수도꼭지가 가장 기초적인 밸브다.

삼진정밀은 상하수도 밸브 분야에선 독보적인 1위 기업이다. 상하수도 밸브로 시작한 삼진정밀은 이제 오일, 가스, 화학용 특수밸브 제조와 중공업, 우주항공 분야까지 확대해 밸브 분야 세계 1위에 도전해 볼 수 있게 됐다.

나로호 우주발사체에도 납품했는데 여기에 쓰인 밸브는 단위면적(㎠)당 500㎏의 무게를 견딘다. 상하수도용 밸브보다 50배 이상 뛰어난 내구성이다. 이 뿐만이 아니라 각종 플랜트에 쓰이는 밸브는 섭씨 영하 200도의 초저온을 견디기도 한다.

밸브 직경도 1㎝에서 수m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정 회장은 “가장 기본적인 밸브에서부터 글로벌 선도기업만 생산하는 고부가가치 제품까지 두루 생산한다”며 “특허 200개는 기계산업에 종사하는 국내 중소기업 전체를 놓고 봐도 1~2위를 다투는 수준”이라고 했다.

대전이 1등하는 분야 몇 개?…삼진정밀의 자부심

정 회장은 우스갯소리로 “대전에서 과연 1등을 하는 분야가 몇 개나 있겠느냐”며 자존감을 드러냈다. 대전에서 국내 ‘1위’를 차지하는 산업분야는 극히 드물다. 이런 가운데 특장차 분야의 이텍산업, 밸브 분야의 삼진정밀은 단연 국내 1위다.  

그럼에도, 정 회장에게 아쉬운 게 한 가지 있다. 훌륭한 인재에 대한 갈증이다. 지역의 우수한 인재가 외지로 유출되면서 중소기업들의 구인난은 심각하다고 했다.

삼진정밀은 대전이 갖고 있는 인프라를 십분 활용한다. 대덕연구개발특구 내 각종 연구소를 비롯해 카이스트 등 대학, 수많은 벤처기업 및 연구 인력 등과 함께 공동으로 기술개발을 하고 있다. 그는 이를 ‘개방형 혁신(Open Innovation)’이라고 표현했다.

혁신의 방법을 되묻자 “혁신은 고객의 머릿속에 있는 미래”라고 했다. 최고경영자부터 임원, 팀장 등 너나할 것 없이 혁신을 외치지만 이처럼 명쾌하게 정리해 주지는 못한다. 그는 의외로 간단명료했다.      

지난해 계열사 등 세 개의 회사를 모두 합쳐 800억 원에 가까운 매출을 올렸다. 매출 1000억 원대 기업으로 도약하기 위해 수(水)처리시스템 분야로 사업 영역을 넓히고 있다. 직원 수도 280여명으로 늘어났다.

최근 밸브기술을 기반으로 필터, 통신, 전기전자 등 다양한 기술을 융합하고 있다. 대전시, 건설기술연구소, 과학기술연합대학원대학교(UST)와 함께 개발한 ‘독립형 마을정수장치’가 그 첫 성과물이다. 이 기계 한 대면 300명이 먹을 물을 만들어 낼 수 있다. 아프리카 등 식수 여건이 취약한 국가에서 요긴하게 쓰일 수 있다.

삼진정밀은 정보기술(IT)로 밸브 속 유량을 모니터링하고 원격 제어할 수 있는 시스템도 개발했다. 이 기술은 상하수도관 파손을 막기 위해 자치단체들이 도입하고 있는 유수율 제고 사업에 널리 활용되고 있다.

‘일신 일일신 우일신(日新 日日新 又日新)’…‘변화’가 생명

그에게 경영 철학을 묻자 거침없이 ‘변화’라고 강조했다. 삼진의 핵심은 ‘변화’라는 것.

그래서 그는 ‘일신 일일신 우일신(日新 日日新 又日新)’의 자세를 계속 가져가고 싶다고 했다. 이는 그의 집무실 한쪽 벽면에 한자로 적혀 있는 글귀다. ‘날로 새롭게 하고, 날로날로 새롭게 하고, 또 날로 새롭게 한다’는 뜻으로 <서경(書經)>의 상서(商書)에 나오는 말이다. 말 그대로 끊임없이 도전하고 변화를 주고 싶다는 것. 임직원들에게도 늘 강조하는 말이다. 

그는 “스스로가 가장 두려운 것이 ‘내가 우물안 개구리가 아닌가’라는 것”이라고 했다. 그래야 변화에 능동적으로 대처할 수 있다고 했다.

학창시절 내성적인 성격 탓에 혼자 있길 좋아했다는 그다. 그런데 최근 동창들을 만날 때 마다 듣는 소리가 ‘엄청 변했다’는 것이다. “공무원교육원에 가끔 강의 나갈 때면 준비 자료 없이 2시간은 거뜬히 떠들 수 있다”고도 했다. 성격도 변하더라는 것. 

그에게 또 다른 성공 방정식은 ‘긍정’과 ‘끈기’다. 어려운 고비 때마다 긍정적인 사고와 끈기를 가지고 대처하다보니 어느새 문제가 해결되더라는 것. 그럴 때마다 ‘하늘이 또 나를 시험하는 구나’라며 긍정적으로 생각한다.

앞으로의 계획을 묻자 엉뚱하게도 “락(樂)!, 노는 것”이라며 웃었다. 또래 기업인 7명과 모임을 하는데 “지인들과 신나게 놀고 싶다”고 했다.

누구냐고 묻자 이두식(이텍산업) 대표를 비롯해 정찬근(한스코), 주동근(에스알아이텍), 송규섭(에이펙), 강은모(유성관광), 김정림(우일수산) 대표를 일일이 거명했다. “(웃으며)업종이 같으면 신경 쓰일 텐데…, 선의의 경쟁자들이다. 고민도 털어놓고 서로 격의 없는 대화를 나눈다”고 했다.

그에게 ‘락’은 여유를 즐기는 것이다. 현업에 매달리다보니 여유 없이 앞 만 보며 살아 온 자신이 어느 때는 큰 것을 못보고 지나치는 경우도 있다고 했다. CEO로서 현재의 사업을 이끌어 가는 것도 중요하지만 미래를 내다보고 이끌어 갈 수 있어야 하지 않겠냐는 게 그의 생각. 결국 미래를 내다보는 기업을 설계하는 것에 앞서 여유를 가져야 새로운 시장도 개척할 수 있다는 게 그의 지론이다.

그는 “제조업에서 나아가 엔지니어링과 서비스가 융복합된 회사로 키우는 게 목표”라며 “그래서 IT와 소프트웨어 기술을 접목한 기업으로 변화해 가고 싶다”고 했다. 내수시장 업계 1위 자리에 올랐듯이 계속 변화한다면 세계 밸브시장 1위도 가능하다는 구상이다.


 
[정태희 삼진정밀 대표 약력]

-1958년 충남 태안군 소원면 파도리
-단국대 경영학과 학·석사 및 박사과정
-범죄피해자지원센터 후원회장
-대전지방국세청 자문위원회 부회장
-대전상공회의소 부회장
-정부조달우수제품협회 부회장
-중소기업융합대전세종충남연합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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