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당은 ‘비민주적 합리주의자의 플랜 B’

  김학용 주필  
 김학용 주필

재작년 대선 때 한 정치학자는 필자에게 “안철수가 대통령이 되면 ‘문민독재’가 될 것”이라고 했다. 박근혜 후보가 당선되면 권위주의적인 독재가 우려되지만 안철수가 되면 그에 못지않은 문민독재가 될 것이라고 했다.

‘문민독재’ 우려되는 ‘비민주적 합리주의자’

안철수가 유명한 정치인으로 부상하기 전부터 그를 관찰해온 IT업계의 지인은 그를 ‘비민주적 합리주의자’로 규정한다. 벤처업계에선 사실상 모든 오너가 비민주적 합리주의자라고 했다. 결정 과정에서 다른 사람의 의견을 최대한 수렴하지만 결정은 자신이 독단적으로 내리고 책임도 진다는 논리다. 이는 모든 기업에서 하는 방식일 것이나 벤처 성공신화를 이룬 안철수는 특히 더 확실한 ‘비민주적인 합리주의자’라는 것이다.

그동안 안철수의 ‘비민주성’은 그리 부각되지 않았는데 이번에 그 점이 여실히 드러났다. 그의 합당 결정은 벤처기업 오너의 방식 그대로였다. 전적으로 그의 독단이었다. 그의 결심은 책사요 최측근인 윤여준도 몰랐다. "합당을 하려면 대선불출마 선언부터 해야 한다"는 그의 멘토그룹 6인회의 주문도 거부되었다고 한다.

독단이 아니었으면 합당 결정이 가능했겠느냐며 불가피성을 이해하는 반응도 있다. 지역의 한 정치인은 "기존 정치인들도 힘들었을 결정이었다. 안철수가 과감한 결단력을 보여준 점은 평가해야 한다"고 했다. 틀린 말은 아니다. 현실 정치인에게 결단력은 중요한 자질이다.

그러나 과정을 무시하는 결단력은 위험하다. 안철수는 가장 중요한 결정을 혼자 했다. 이보다 위험한 방식이 어디 있나? 민주주의에선 절차와 과정이 무시된 결단력을 인정하지 않는다. 그게 용인되면 바로 독재정치가 된다. 안철수의 독단은 민주적 방식으로 결코 나올 수 없는 결정을 했다는 뜻도 된다. 

새정치 주인공에서 ‘말 바꾸기 대표 선수’로

사람들이 떠올리던 안철수 이미지는 ‘착하고 합리적인 사람’이었다. 정치권에 들어오면서 ‘착한 안철수’에 대한 생각이 바뀐 사람도 많지만 그중 ‘합리적인 정치인’이란 생각은 가지고 있었다. 적어도 자기가 방금 한 말을 깡그리 뒤집을 사람으로 여기지는 않았다.

안철수의 합당은 자신의 이미지를 완전히 뭉개버렸다. “민주당과의 연대는 국민이 용납하지 않을 것이다” “100년 가는 정당을 만들겠다” “선거만을 위한 정치공학적 연대는 없다”던 그의 말은 한 달도 안돼 100% 식언이 되었다. 그의 전격적인 ‘합당 선언’- 스스로는 제3지대 신당 창당이라고 하나 모양새를 갖춰주는 민주당 입당에 불과하다고 봄 -은 완전한 자기 부정이었다.

전 국민들을 상대로 몇 번씩이나 강조하던 원칙과 약속을 언제 그랬냐는 듯 뒤집었다. 합리적인 사고의 소유자라면 힘든 일이다. ‘믿을 수 있는 안철수’로 포장된 새정치의 주인공인 그에겐 더욱 어려운 일이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말을 과감하게 부정했다. 졸지에 ‘말바꾸기 대표선수’가 되었다.

그는 왜 표변(豹變)한 것일까? 많은 사람들은 합당도 합당이지만 사건의 그 주역이 새정치의 주인공이란 사실에 더욱 놀랐다. 합당의 진짜 이유가 무엇인지는 아는 바 없다. 다만 2가지로 생각해 볼 수는 있겠다. 하나는 필자 생각이고 또 하나는 지인의 생각이다.

실패 모르던 성공신화 주인공의 회피

나는 실패에 대한 그의 두려움이 가장 큰 이유였다고 본다. 아마 가장 일반적인 생각일 것이다. 그는 학생으로도, 벤처기업인으로도 실패한 적이 없다. 중도에 포기한 적은 있어도 스스로가 인정하는 실패의 경험이 그에겐 없는 듯하다. 실패와 포기는 다르다. 포기는 스스로에게 변명이 가능한 실패다. 가령 이런 것이다. 어떤 시험을 보러 갔는데 시험문제가 너무 어려웠다. 답안지를 제출하면 낙방이 예상되는 경우 중간에 시험을 포기하면서 ‘낙방 확인’은 피하고 싶은 심리다.

그가 정치판에 처음 나오면서 서울시장 자리를 박원순에게 넘긴 것은 ‘남는 게 더 많은’ 기분좋은 포기였다. 대선 때는 문재인에게 후보 자리를 빼앗겼지만 그때도 완전한 패배는 아니었다. 문재인 세력의 술수를 당해낼 수 없어서 자신이 눈물의 양보를 한 것이지 결코 순수한 패배는 아니었다. 그는 그렇게 자위했을 것이다.

그는 지방선거를 앞두고 처음으로 ‘철저한 실패’를 향해 가고 있었다. 여론의 지지율은 계속 하락하고 있었고, 이 때문에 지방선거에 광역단체장 후보조차 못낼 지경이었다. 그대로 선거를 치른다면 처음으로 ‘분명한 패배’가 될 판이었다. 지방선거는 중간에 포기할 수도 없는 고약한 시험이었다. 그는 김한길의 도움으로 그 시험을 피하게 됐다. 합당한 이상 민주당이 패배하더라도 안철수만의 실패는 아니다.

애초의 ‘안철수 신당’ 작업에 참여했던 지역 인사는 “신당은 밖에서 보는 것과 너무 달랐다”고 했다. 다들 상이 차려지기를 기다릴 뿐 상을 차리겠다고 나서는 사람은 없었다는 것이다. 안철수씨의 합당 선언에 처음엔 황당했지만 그의 선택을 이해한다고 했다. 현실적 어려움이 그만큼 컸다는 얘기다.

"말 바꾸기는 신경 안 쓸 사람".. 합당은 ‘플랜 B’일뿐?

지인의 분석은 좀 다르다. 그는 합당을 처음부터 준비된 ‘플랜 B’로 보고 있다. 그는 “안철수의 합당은 플랜 B로 전략적 수정을 한 것일 뿐 실패의 두려움 때문에 신당을 포기할 사람은 아니다”고 말한다. 그는 “안철수는 ‘내가 지금 욕을 먹더라도 큰 일을 할 수 있는 위치에 가면 국민을 위해서 뭔가를 보여줄 수 있다’고 확신하기 때문에 자기 말을 바꾼 정도 가지고는 크게 신경쓰지 않을 사람”이라고 했다. “또 안철수의 선택은 대부분 합리적인 결정이어서 그의 비민주성에 대한 문제점은 잘 드러나지 않는 편”이라고도 했다.

‘플랜 B’는 - 특히 안철수의 기존 이미지를 염두에 둔다면 - 황당할 정도의 해석이다. 그러나 그가 이번에 보여준 결단력이나 독단성과는 맥이 통하는 분석이다. 자기를 따르는 수많은 동지들을 하루아침에 황당하게 만들면서 빗발치는 항의를 받고서도 며칠 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여유로운 미소를 띠는 모습은 우리가 그동안 보아온 안철수의 얼굴이 아니었다. 지인의 해석이 맞다면, 사람들이 ‘호랑이굴에 들어간 사슴’이라고 비아냥대지만 안철수의 머릿속엔 정말 '호랑이 기운’ 같은 게 꿈틀대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가 정말 플랜 B를 준비할 만큼 치밀하면서도 비민주적이고 독단적인 스타일이라면 효율성 못지 않게 절차가 중시되는 현대 사회에서 위험하기 짝이 없는 정치인이다. 그는 결단력에서 기존 정치인들조차 놀랄 정도의 솜씨를 보여주었지만, 독단적 결정 방식에선 ‘이 사람이 권력을 잡으면 독재정치가 될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도 들게 했다. 보는 사람에 따라 생각보다 ‘위대한 안철수’였고, 보기보다 ‘위험한 안철수’였을 것이다.

새정치 프리미엄 사라져 미래 불투명

어느 쪽이든 그는 더 이상 ‘새정치’의 주인공은 아니다. 실패의 두려움에 대한 회피든 독단성 강한 벤처기업가의 결단이든 그는 자기 자신까지 부정해버림으로써 또 한 명의 구태 정치인이 되고 말았다. 새정치의 주인공으로서 가지고 있던 권력 프리미엄도 소멸될 것이다.

제자 자공(子貢)이 공자에게 어떻게 하면 정치를 잘할 수 있는지 물었다. 공자는 세 가지를 말해주었다. 첫째 먹을 것을 풍부하게 하고(족식 足食), 둘째 국방을 튼튼히 하며(족병 足兵), 셋째 백성의 믿음을 얻는 것(민신 民信)이라고 했다. 부득이하다면 마지막까지 지켜야 할 게 백성의 믿음이라고 했다. 정치인에게 신뢰의 중요성은 지금도 매한가지다. 안철수는 자신까지 부정하는 합당으로 신뢰를 잃게 되었다.

이제는 구태 정치 수단으로 권력 추구해야

민주당에 들어간 이상 당내 권력 투쟁은 불가피할 텐데 과거의 안철수 파워는 발휘되기 어려울 것이다. 그는 구태 정치인들과 같은 수법 같은 방식으로 싸워야 한다. 이번에 들어갈 때 그에 필요한 세부적 전략까지 준비했는지는 모르나 그 정도의 ‘재주꾼’은 적지 않으니 그의 미래는 불투명하다.

새정치의 주인공이라 해도 권력 싸움에서 승자가 되는 경우는 많지 않다. 술수에 능한 인물들이 운이 좋아 잡기도 하지만 성공하는 지도자는 될 수 없다. 그런 식으로 혹여 권력을 얻는다 해도 국민이 원하는 정치를 하지 않기 때문이다. 안철수의 합당은 과감한 결정이긴 하였으나 새정치를 버리는 카드여서 궁극적으론 실패가 될 수밖에 없다. 합당은 한번은 겪어야 할 실패를 미룬 것에 불과하다. 안철수는 이번에 민주당 장사만 해주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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