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하길 목요언론인클럽 사무총장  
정하길 목요언론인클럽 사무총장

우리나라 TV드라마가 온통 ‘출생의 비밀’로 뒤범벅되어 있다. 그것도 ‘눈물의 불륜’, 혹은 ‘한 순간의 바람기’에서 잉태되는 정도가 아니라 천륜을 거스르는 반인륜적 행태를 보이고 있다. 짜증을 넘어서 화가 치밀 정도다.

얼마 전 높은 시청률에 힘입어 국민드라마로 융숭한 대접을 받으며 이 시대 아버지들의 눈물 속에 대단원의 막을 내린 ‘내딸 서영이’(KBS). 극중 서영의 시어머니는 누군가가 내다버린 아이를 수 십 년 간 애지중지 키웠다. 그런데 알고 보니 남편과 직장 부하 여직원과의 불륜에서 나온 아들이다. 그런데 남편조차도 그 아이가 자신의 아들인 것을 모르고 키웠다가 일이 불거지고 DNA검사를 통해서 나중에서야 알게 됐다.

불륜으로 낳은 아이를 몰래 데려다 키우는 것은 애교(?)

요즘 주말연속극으로 뜨고 있는 ‘최고다, 이순신’(KBS).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이미지에 악영향을 끼친다며 법원에 ‘제목 사용금지 가처분신청’까지 접수되면서 유명세를 타기도 했다. 이 드라마 역시 남편이 옛 애인을 만나 바람을 피워 태어난 아이가 주인공이다. 다만 ‘서영이’와의 차이점은 남편이 아이가 ‘자신의 씨앗’임을 알면서도 누군가 아이를 버린 것처럼 아내를 속이고 데려다 키우게 했다는 것이다.

그래도 이 정도면 오히려 애교(?)로 봐줄 만하다. 일일드라마 ‘오자룡이 간다’(MBC)는 극 속에 ‘출생의 비밀’이 하나로는 부족해 둘이나 숨겨놓고 있다. 한 여인이 죽은 여자친구 아들(오자룡)을 친아들처럼 여기고 키워 결혼까지 시키고, 그 사실을 아들이 알고 상심할까봐 마음 졸이는 양부모이야기는 눈물을 훔치게 만든다.

그런데 이 드라마의 또 다른 한 축인 그룹 회장집으로 장가간 사위 쪽 사정은 완전 다르다. 사위는 아내의 불임을 핑계로 따로 살림을 차려 애를 낳고 두 집 살림을 한다. 아내와 헤어지고 싶지만 재산 때문에 절대 그럴 수 없다.

재산을 차지하기 위해 천륜도 저버려

  아침드라마 '사랑했나봐'(MBC / TV화면 캡처)  
아침드라마 '사랑했나봐'(MBC / TV화면 캡처)

여기에 이 사위의 어머니라는 사람은 이를 말리기는커녕 며느리를 속이고 아들의 여자를 두둔하며 한 술 더 뜬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이 아이를 전문기관 입양아로 속여 아예 대놓고 데려다 키우려고 한다. 오로지 제 자식을 위해서라면 인륜이고 천륜이고 없다.

하나 더. 이 드라마에서 그 사위와 그의 어머니는 어느 재벌 회장의 아들이 ‘오자룡’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죽었다고 거짓말을 하고 이를 숨긴다. 회장의 재산을 자신들이 차지하기 위해서다.

그래도 여기까지는 ‘사랑의 비극’, ‘추악한 야망’이 낳은 신파극쯤으로 봐줄만하다. 시간대를 주부들이 주로 시청하는 아침으로 옮기면 가히 천인공노할만한 반인륜적 드라마가 판을 치고 있다.


복수심과 헛된 야망으로 점철된 한 여인이 저지른 끔찍한 선택이 불러온 비극을 다룬 ‘사랑했나봐’(MBC). 미혼모(아이 아버지는 군복무 중)인 그녀는 병원에서 같은 날 낳은 자신의 아기와 친 자매처럼 한 집에서 성장해온 친구가 낳은 아기를 몰래 바꿔치기한다. 그런 뒤 친구의 아기는 군복무 중인 가난한 애인의 집 앞에다 몰래 버린다.(자신은 애를 낳다가 죽은 것처럼 위장하고) 군에서 제대한 그 애인은 그 아이가 자신의 딸인줄 알고 홀로 키운다. 반면 그 여인은 친구의 남편(그룹회장의 아들)을 부추겨 이혼하게 만든 뒤, 자신이 그와 결혼한다.

서슴지 않는 ‘아이 바꿔치기’

  아침드라마 '삼생이'(KBS / TV화면 캡처)  
아침드라마 '삼생이'(KBS / TV화면 캡처)

모든 것이 계획적이다. 그녀는 오직 자신만 알고 있는 출생의 비밀을 숨긴 채, 재벌가의 며느리로 친구의 딸(실제로는 자신의 딸)을 키우며 살아가다가 기어이 들통이 나면서 모든 것이 꼬이게 된다. 네 집안이 서로 제 아이를 되찾겠다고 뒤죽박죽 난리다. 특히 제 딸을 위해서라면 남의 딸은 어떻게 되든 상관없다는 그녀의 황당하고 기막힌 언행 하나하나에 분노를 치밀게 한다. 대사 한마디, 표정 한 가지, 말초신경을 자극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이런 악독한 모성애에 절대 뒤지지 않는 부성애도 있다. 역시 아침부터 얼굴을 찌푸리게 하는 또 다른 아침드라마 ‘삼생이’(KBS). 60, 70년대 시대적 배경만 ‘사랑했나봐’와 다를 뿐, 한 가난한 남자가 하룻밤 불장난으로 생긴 제 딸을 부잣집(한의원 원장) 딸과 바꿔치기한 것은 똑같다.

여기서 더한 것은 그 남자는 부잣집 딸(삼생이)을 자신의 딸을 낳은 여자에게 ‘제 딸이라고’ 속여 그녀에게 주어버리고, 실제 딸과는 원장을 모시며 그 집에서 같이 산다. 원장은 당연히 그 아이가 자신의 딸이라는 데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런데 그 딸은 모든 사실을 알면서도 천연덕스럽게 원장을 “아버지”, 실제 아버지인 그 남자를 “아저씨”라고 부르며 함께 살아간다. 도덕이고 양심이고 뭐고 없다. 앞으로 물려받을 한의원의 재산 때문이다. 보통의 인간이라면 도저히 그렇게 할 수 없는 일이다.

또 다른 공중파의 아침드라마 ‘당신의 여자’(SBS). 역시 ‘출생의 비밀’은 공통사항이고, 재벌가 집안에서 가난한 고아출신 여성이 며느리로 들어오는 것을 막기 위해 살인도 서슴지 않는다. 급기야는 그 여성의 아이를 유괴하려다가 아이가 교통사고를 당하게 만든다. 여기서 잠깐, ‘갑작스런 교통사고’ 역시 빼놓을 수 없는 막장드라마의 필수 소재다.

‘기억상실’, ‘갑작스런 교통사고’ 등도 뻔한 소재

  아침드라마 '당신의 여자'(SBS / TV화면 캡처)  
아침드라마 '당신의 여자'(SBS / TV화면 캡처)

뿐이 아니다. 얼마 전 시작된 새 주말드라마 ‘원더풀 마마’(SBS). 돈 많은 부잣집 중년여인의 재산 상속 등을 둘러싼 가족이야기다. 몇 회 쯤 지나서 보니 이 여인의 주머니에 오래된 아기 사진이 한 장 들어있다. 아직 스토리가 전반부라 확실히는 알 수 없으나, ‘출생의 비밀’을 엿보게 하기에는 충분하다. 과연 또 어떤 비밀이 숨겨져 있을까?

‘출생의 비밀’과 함께 감초처럼 빠지지 않는 것이 ‘기억상실’, 아니면 ‘혼수상태’다. 비밀을 감추기에 너무도 편한 방법이다. 보는 사람입장에서 식상할 수밖에 없다. 그렇지만 입으로는 지탄을 하면서도 궁금해 하고 또 보게 된다. 그래서 작가도, 연출가도 그런 유혹을 떨쳐낼 수 없는가 보다.

드라마 제작 관계자들의 더 많은 고민과 노력 필요

논픽션인 드라마는 글자 그대로 허구다. 반면 극의 전반적인 흐름은 당시의 사회세태를 반영하게 되어있다. 만약에 이같은 막장 사례가 우리 사회에서 그리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는 것이라면, 그건 심각해도 보통 심각한 일이 아니다. 그렇지는 않으리라고 본다. 모름지기 시청률은 높여야겠으나 새로운 소재를 발굴할 수 있는 역량은 부족하다보니, 노력은 하지 않고, 말초신경만을 자극하려는 값싼 의도로밖에는 해석할 수 없다.

이제 우리 TV드라마들도 이런 편의주의적이고 선정적인 매너리즘에서 벗어나야한다. 한 주 동안 안방으로 날아드는 연속극이 온통 ‘반천륜, 비인륜, 불륜’으로 가득 채워진 이 세태를 자라나는 우리 아이들이 어떻게 받아들이겠는가. 드라마 제작 관계자들의 더 많은 고민과 노력이 필요하다. 그럴 수 없다면 시청연령대를 ‘19금’으로 상향이라도 해야 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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