新 청백리상(일명 ‘持己秋霜’상) 국민제안

법을 다루거나 국정을 운영하는 고위 공직자들이 즐겨 쓰는 좌우명 가운데 ‘지기추상 대인춘풍(持己秋霜 待人春風)’이란 문구가 있다. 채근담에 나오는 말이다.

‘자신을 지키기 위해서는 가을 서릿발 같이 엄격하지만 사람을 대함에 있어서는 봄바람 같이 따뜻하고 부드럽게 하라’는 뜻이다. 공직자의 ‘자기관리 철학’을 엿볼 수 있는 신조요, 덕목이다.

좌우명은 가슴 속의 스승이다. 실천이 문제이겠지만, 이런 좌우명 한마디 가슴에 품고 살아간다면 크게 욕먹을 일도 없을 것이다. 공사(公私)를 구분하는 지혜도 거기서 나온다.

내 책장의 오래된 서적 가운데《위대한 생애》라는 박정희 전 대통령 휘호집(1989년, 민족중흥회 발행)에도 ‘持己秋霜 待人春風’이란 문구가 나온다. 1976년 ‘원단(元旦) 휘호’인데, 박정희 전 대통령의 좌우명으로 알려져 있다.

▲[사진설명] 필자의 애장서적인 박정희 전 대통령의 휘호집《위대한 생애》(1989년, 민족중흥회 발행, 비매품)에 수록된 1976년 원단(元旦) 휘호 ‘持己秋霜 待人春風’ - 서예에 관심이 많았던 필자는 이 휘호집을 당시 '민족중흥회' 로부터 받고 마치 큰 보물을 얻은 느낌이었다. 민족중흥회에서는 이 휘호집을 애장하고자 하는 이에게 특별히 우편으로 보내주면서 소포의 겉봉도 사무적인 필치로 대충 쓰지 않았다. 받는 사람의 주소와 성명 삼자도 붓글씨로 또박또박 온갖 정성을 다해 썼다. 겉봉 글씨 한 자 한 자에서 이 휘호집을 제작한 분들의 깊은 정성과 혼이 고스란히 느껴져, 필자는 우편물 봉투마저 버리지 못하고 책갈피에 기념물처럼 보관하고 있다. 이 휘호집의 편집위원장인 李永根 박사는 '편집후기'에서 이런 소회를 피력했다. "박정희 대통령에 대한 우리의 입장은 결코 글이나 말로써 표현할 대상이 못된다. 또, 그 분과 오랫동안 같은 길을 함께 하면서 우리의 피와 정신 속에 속속들이 스며든 알맹이들을 구체적으로 표현할 재주도 없다. 다만, 그분이 남긴 커다란 흔적들을 必死의 힘으로 옮겨 놓았을 뿐이다." '필사의 힘으로 옮겨 놓았다'는 그 한마디가 전국에 걸쳐 모아놓은 이 방대한 분량의 친필 휘호를 대하는 이를 숙연하게 하고, 책자의 무게까지 가늠케 한다. 세월이 아무리 흘러도 역사적 가치를 느끼게 해주는 국가 지도자의 정신적인 유산이라 생각한다.

근자에는 검찰과 경찰 등 주로 법을 다루는 고위 공직자들이 취임할 때마다 ‘외유내강(外柔內剛)’형 이미지를 드러내는 말로 인용되기도 한다.

지난 10일자 칼럼(경찰서장의 ‘직위해제’보다 중요한 것)에서 ‘일선 경찰 지휘관의 직위해제 보다 중요한 것은 직원 한 사람 한 사람의 반듯한 직업윤리 의식과 의식개혁이 먼저’라고 했더니, 현직 경찰 간부가 이런 반응을 보였다.

“공직자 의식개혁과 관련하여 직장에서 저명인사 특강도 수없이 들어봤고, 자체 소양교육도 자주 이뤄지지만, 국민을 실망시키는 불미스러운 일들은 여전히 발생한다. 걸핏하면 국가 사정기관의 상시 감찰활동을 강화해야 한다고 하지만, 칼럼에서 지적한 것처럼 개개인의 ‘자각(自覺)’만큼 중요한 것은 없다”면서 “구체적인 실천 방안이 문제”라고 했다.

그래서 내가 새삼스럽게 제안한 것이 ‘공직자 좌우명 갖기 운동’이다. 가정의 거실에도 좋고, 사무실 칸막이벽에라도 좋다. 좌우명 한 줄 거울처럼 바라보고 살아간다면 ‘자기 최면효과’도 있을 것이다. 좌우명은 삶의 기본적인 태도를 결정짓는 중요한 덕목으로 작용한다.

누가 뭐라고 해도 소신이 뚜렷한 공직자의 반듯한 직업윤리 의식은 감독자의 잔소리에서 나오지 않는다. 자각(自覺)에서 비롯된다.

1970년대 후반, 내가 처음 공직을 시작했을 때, 대전경찰서(현재 대전중부서)에서 근무했던 ‘황 판사’라는 별명을 가진 경찰간부의 일화가 직원들 사이에서 크게 화제가 됐다. 1982년 청백리상을 받은 황인수 경정이었다. 그는 자기 자신에게 추상 같이 엄격한 사람이었다.

그의 부인이 생활비를 벌기 위해 행상을 하다가 노점 단속반에 걸려 붙잡혀 왔을 때도 예외 없이 즉결재판을 받게 했다. 심지어 아내가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가다가 통금(야간 통행금지)에 걸렸을 때도 자신이 즉심 주무 책임자인 보안과장(지금의 생활안전과장)이었지만 가차 없이 즉결심판에 넘겨 벌금을 내게 했다.

요즘 국회 인사 청문회에 등장하는 일부 주요 인사들의 반듯하지 못한 공직생활과 공사(公私)를 구분하지 못하는 부끄러운 처신과는 크게 비교가 된다.

이뿐만이 아니다. 불우 청소년이나 어려운 주민들에게는 많은 선행을 베풀었다. 자신은 도시락을 싸가지고 다니면서도 밀수품 단속에 공을 세워 받은 보상금을 고아원에 보내는가하면, 구두닦이 등 불우 청소년을 위해서는 야간학교를 열기도 했다.

36년 동안 경찰 생활을 하면서 청렴성은 인정받았지만 승진 인사에서는 줄을 댈 줄 몰랐다. 자기의 노력과 실력이 아닌, 추천 방식으로 승진한 적이 없다. 그야말로 ‘지기추상 대인춘풍(持己秋霜 待人春風)’의 본보기였다.

이 세상에서 가장 쉬운 일은 남에게 충고하는 일이고, 가장 어려운 일은 자기 자신을 바로 바라보는 일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대인춘풍(待人春風)’은 쉬울지 몰라도, ‘지기추상(持己秋霜)’을 실천하기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공직자란 모름지기 지연, 학연, 혈연으로 맺어진 지인들의 온당치 못한 갖가지 청탁을 슬기롭게 물리칠 수 있어야 한다. ‘식사 한 번 하자’는 것은 정이 듬뿍 담긴 말이지만, 이해관계 없이 공직자에게 공연히 비싼 밥과 술을 사는 것이 아니란 점에도 유의해야 한다.

가족들의 처신도 마찬가지다. 아내의 씀씀이가 크고 사치스런 생활을 한다면 공직자인 남편을 욕 먹이는 일이다. 공직자의 평소 ‘자기 관리’란 인연 맺고 사는 사람들과의 엄격한 공사(公私)구분과, 가족들의 처신까지 잘 챙겨 보는 일도 포함한다.

새로 출범하는 박근혜 정부는 ‘대인춘풍 지기추상의 표본’이 되는 공직자를 뽑아 ‘新 청백리상’(일명 ‘持己秋霜’상)을 주는 제도를 만들면 어떨까? ▣

※ 이 칼럼은 금강일보 2013년 1월 24일자에 게재된 글입니다.

윤승원 / 수필가. 대전수필문학회장 역임. 금강일보 논설위원.
         
신간 에세이집《靑村隨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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