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해'보고

 

대체 이 나라가 누구의 나라요?

 

<기고> 송 명 석(영문학 박사 무일희망교육실천연구소장) 

모처럼 주말에 영화를 한편 봤다.

이병헌이 주연한 영화 <광해, 왕이 된 남자>를 본 사람이 700만 명을 넘어섰다. 영화 자체는 당연히 상상의 날개를 펼쳐 상황을 설정했지만, 그 근간에는 대동법과 중립 외교 등을 광해군의 주요 치적으로 삼는 시선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광해의 재평가'가 밑바탕에 깔려 있다는 말이다. 영화 속 ‘광해’는 신하들에게 둘러싸여 자신의 발언조차 함부로 책임 질 수 없는 왕이었다. 그러나, 그 속에 누구보다 진정 나라와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대동법을 시행하고자 했으며 명에게 대립한 유일한 조선의 왕이었다. 영화는 영화니까 허구와 사실의 경계 속에 있다. 영화에서 말하고 싶은 것은 '역사 속 광해의 하나의 모습만이 아닌 또 다른 모습, 광해가 진정 이루고자 한 개혁의 모습은 아니었을까? 

실제 광해군은 권좌에서 쫓겨난 후 '혼군'(나라를 어지럽힌 군주)이라고 비난받았다. 그러나 오늘날 한국의 국사 교과서는 물론 북한 역사서도 적어도 외교와 관련해서는 광해군을 긍정적으로 평가하고 있다. 명과 후금 사이에서 '실용주의 중립 외교'를 펼쳤다는 평가다. 평가가 바뀐 지 100년도 안 되지만, 광해군 재평가는 많은 한국인의 상식이 됐다.

이런 상식에 정면으로 반기를 든 책이 나왔다. 오항녕이 지은 <광해군, 그 위험한 거울>(너머북스 펴냄)이다. <조선의 힘>(역사비평사 펴냄, 2010년)에서 한 장을 할애해 광해군 담론을 분석한 오항녕이 본격적으로 광해군 시대를 다룬 책이다. '광해군에 대한 21세기의 반정(反正)'을 표방한 이 책의 핵심 주장은 광해군이 철저히 실패한 군주였다는 것이다. '광해군=혼군'이라는 인식의 부활이다. 한편 한명기의 <광해군>(역사비평사 펴냄)에서는 광해군을 '탁월한 외교 정책을 펼친 군주'로 평가하며, 오항녕이 부정적 시각의 역사비평을 완전 뒤집었다. 한명기는 광해군을 혼군이라 몰아붙이는 건 "광해군 죽이기"이다. 그가 재구성한 광해군은 임진왜란으로 피폐해진 민생을 어루만지고 국가를 재건하기 위해 노심초사한 군주다.

오항녕과 달리, 한명기는 대동법을 광해군의 업적으로 본다. "흩어졌던 백성들이 다시 모여 든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대동법에 호응한 백성들과 "대동법 때문에 나라를 망쳤다"며 반발한 기득권 세력 사이에서 광해군이 대동법을 유지한 것은 하층민에 대한 정권 차원의 양보였음이 분명하다는 평가다.

 

하지만 영화에서는 ‘왕이된 남자’를 통하여 광해를 평가하기 이전에 하고 싶은 말을 대신전한다. 영화는 영화이기 때문이다. 작가는 이 점을 통해서 관객들에게 그 뭔가의 카타르시스를 주고 싶었고, 대리욕구를 해소시키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시의 적절한 현실 정치에 적시타를 때린 셈이다.

다음은 영화의 광해가 조정 대신들에게 호통 치는 장면이다.

작작들 좀 하시오!!나에겐 사대의 예보다 내 백성들의 목숨이 백곱절, 천곱절더 소중하오~!!그래, 2만의 군사를 보내겠소. 하지만 금에도 서신을 보낼 것이요. 명과의 관계 때문에 군사를 보내기는 하나 금과 싸우고 싶은 생각은 전혀 없다. 부디 조선의 청년들이 무사히 고국으로 돌아올 수 있도록 선처해 달라.

암튼 나는 이 대사를 듣는 중에 눈시울이 붉어졌으며 가슴이 통쾌하기까지 했다.

 

브리태니커 사전에는 광해군을 “조선 제15대 왕(1608~23 재위) 광해는 임진왜란 때 세자로서 난의 수습에 힘썼으며, 즉위 후에는 자주적·실리적 외교로써 명·청 교체의 국제 정세에 대처했다. 또한 공납제의 폐단을 개혁하기 위해 경기지역에 대동법을 실시했다. 대북파의 집권에 불만을 품은 서인세력의 반정으로 폐위된 왕으로서, 인조 15년(1637) 3월 제주에 유배 된 지 4년이 지난 인조 19년(1641년) 7월 1일에 67세의 나이로 일생을 마쳤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나는 이 영화를 보고 이런 엉뚱한 생각을 해보았다. 우선, 오항녕이 재구성한 광해가 재평가된 광해보다 실제에 훨씬 근접한 것이라면, 적어도 논리적으로는 <광해, 왕이 된 남자>가 설 자리를 잃는 것 아닌가 하는 객쩍은 생각이 든다. 설정 자체가 불가능한 상황이 생길 수 있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누구나 엉망진창이었다고 인정하는 연산군 시대를 다룬 영화, 예컨대 '광해군 버전 <왕의 남자>' 같은 것이 나올 수도 있지 않을까? 말이다. 물론 상상력을 바탕으로 한 예술 장르에 역사적 사실과 논리의 잣대를 지나치게 들이댈 필요는 없다. 

 

그리고, 조선왕조실록이나 그 당시 사학가들은 광해군을 '왕'이 아닌 '폭군'으로 평가했다는 점을 너무 가볍게 생각하는 것 아닐까? 후대의 역사학자 한 두 명의 엇갈린 판단 중에 선택해야 한다면 그 당시를 살아온 선조들의 판단에 비중을 두는 것이 맞다.

 

또한, 광해군에 대한 두 시각. 개혁 꿈꾸다 쓰러진 안타까운 군주였나, 시대적 과제보다 자신의 왕위에만 집착하며 쫓겨난 한심한 군주였나. 이에 대한 판단은 좀 더 세시한 사실 파악과 사실의 비중과 가치에 대한 설득력이 논거들이 필요한 듯하다.

 

다음으로, 패륜적이고 부패하고 무능한 광해군,<잡채상서(이충)와 산삼재상(한효순)>이 이를 증명하고 춘향전 이몽룡의 시의 원전인 당시의 <“燭淚落時民淚落 (촉루락시 민루락) 歌聲高處怨聲高 (가성고처 원성고)">의 비방시가 이를 증명한다.

 

역사적 사실에 입각하여 각색한 영화이기 때문에 역사인식에 대한 단견을 피력하지 않을 수 없다. 단군신화는 일제 강점기 때 고조선까지의 역사를 단군이라는 한 인물로 축소시켜 버린 왜곡된 역사이다. 단군조선 고조선이라 해야 맞다. 환국 구리시대 단군조선으로 이어진 역사가 단군 신화로 재탄생된 것이다. 개천절 때도 이 부분이 이슈화되지 못한 것은 신기한일이다.

악마는 세세한 부분에 심어져 있다고 하는데, 우리는 무심코 보지만 그 세세한 부분을 여과 없이 받아들인다. 그것이 잘못된 역사의 무서운 점이고, 식민사관이 무서운 점이다. 역사교과서를 사실에 근거하여 재 편찬해야 한다. 논쟁의 부분은 논쟁이 있다고 밝혀야한다.  

필자는 감히 우리 역사는 조금의 진실성도 없다고 생각한다. 역사계에 주류와 비주류가 싸워서 꾸준히 논쟁을 만들어가야 한다. 중국·일본이 역사왜곡을 한다고 하지만, 우리만큼 심하진 않을 것이다. 그들은 민족적 관점으로 왜곡을 하는 반면 우리는 반민족적 관점으로 왜곡을 한다.  

'광해군일기'가 승리자의 기록이라서 신빙성이 없다? 그럼 일본의 지배를 받은 우리가 쓴 당시의 역사는 믿을 수 없는 건가? 반독재투쟁을 한 사람들이 쓴 박정희시대의 역사는 신빙성이 없는 건가? 1987년 전두환 정권을 무너뜨린 세력들의 전두환에 대한 평가는 부당한 것인가? 괜한 심통을 부려본다.  

그래서 영화는 영화로 보아야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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