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충남의 잔소리]42

『공자』는 사상가로서 유학(儒學)을 열어 인(『仁』)의 사상과 ‘자기를 갈고 닦아 세상을 위해 일하라.’ 고 하는 수기치인(修己治人)의 실천 덕목을 세상 사람들에게 설파하였다.
공자는 3천여 제자들을 배출 시킨 위대한 교육자였다. 그래서 훗날 중국 황실에서는 공자를 ‘성인의 경지에 이른 위대한 선생’ 이라는 뜻의 ‘지성선사’(至聖先師)로 존칭하였고 ‘영원히 빛날 스승의 표본’ 이라는 뜻의 만세사표(萬世師表)라는 시호를 내렸던 것이다.

또한 공자는 仁德정치로서 태평성대의 세상을 이루고자 하는 야망을 펼쳐 보려 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한 실패한 정치가였지만 후세의 유학자들은 실제로 왕의 자리에 오르지 않고서도 왕으로서 덕을 갖추고 왕의 버금가는 정치를 하였다고 하여 소왕(素王)이라 칭하였다.
이처럼 유학자들이나 후세 사람들은 공자를 ‘성인’으로 추앙하고 있으나 막상 ‘공자’는 자신을 성인이라 하지 않았다.

공자 자신이 받드는 성인은 요, 순 임금이었고 자신은 단지 ‘배움에 만족을 모르고 가르치는데 싫증을 내지 않는 사람’ 이라고 자신을 평하였다.
『도올』도 ‘공자는 결코 성인이 아니다 단지 성인의 길을 개척한 한 인간 일 뿐이요, 끊임없이 성인이 되고자 하학이상달(下學而上達)한 호학(好學)의 인간 이었다.’ 라고 공자를 평했다.

지금부터 73세의 생애를 살다간 공자를 보통 사람보다 훨씬 격이 높은 성인으로서가 아니라 평생을 세상에 대한 뜻과 야망, 학문과 가르침의 일생으로서 살다간 군자로서의 ‘공자’ 의 생애를 살펴보겠다.
공자는 70여 평생의 자기의 생애를 회고하면서 인생과 학문에 대한 깨달음과 지혜를 터득해 가는 과정을 이렇게 술회했다.

▲ 공자는 15세에 지학(志學) 즉 ‘학문에 뜻을 두었다.’ 라고 술회 하였다.
공자의 이 시기는 참으로 불우했다. 2살 때 아버지를 여의고 홀어머니 밑에서 빈천하게 자랐다.
따라서 당시의 지체 높은 집안의 자녀들처럼 관학(官學)에 들어가 체계적인 공부를 할 수 없었다.
그러나 공자는 비관이나 자포자기를 하지 않고 오로지 배워야겠다는 일념으로 거의 독학하다 시피 하여 ‘예(禮)’ 에 대한 공부를 하였다.

• 요즈음에 있어서의 15세 나이는 중학교 2학년에 해당된다 할 수 있다.
학교 공부의 기초는 바로 중학교 2학년 때라 할 수 있는데 이때 학업에 대한 의지나 기초를 잃으면 그 이후의 고등학교, 대학교 과정은 힘들 다 할 수 있다.
또한 이때는 기억력이 제일 왕성한 때이라 이때 외운 내용은 나이가 먹어도 기억에 남는다.
그러므로 이러한 나이의 자녀를 둔 학부모들은 이때의 자녀들이 학업에 대한 의지나 기초를 잃지 않도록 각별히 유념해야 될 것이다.

▲ 공자는 30의 나이에 이립(而立), 즉 ‘세상에 알려지고 세상에 나섰다.’ 라고 술회하였다.
공자의 이 시기는 홀어머니를 봉양하면서 결혼을 하여 아이를 낳았고 그리고 권세가 집안의 창고관리인, 목장 관리인 등의 천한 일을 하면서 생계를 유지해 나갔다.
공자는 그러면서도 자강불식(自强不息)하여 즉 쉬지 않고 학문에 정진하여 드디어 학문의 경지가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고 제자들을 가르치기 시작하였다.

• 요즈음 30의 나이는 15년간의 모든 학교 공부를 마치고 바야흐로 세상에 대한 뜻을 세우는 나이 즉 취업을 하거나 자기의 일을 펼치는 나이라 할 수 있다.

▲ 공자는 40세 불혹(不惑) 즉 ‘미혹되지 않았다.’ 라고 술회 하였다.
당시 공자의 나라인『노』나라에서는 끊임없는 하극상(下剋上 : 아랫사람이 윗사람을 치고 오르는 일)으로 정세가 불안하였고 민심이 혼란하였다.
그러나 공자는 이러한 때에도 자신의 철학이나 사상, 학문에 대한 소신을 굽히지 않고 권력의 유혹에도 흔들리지 않고 안빈낙도(安貧樂道)하면서 오로지 학문과 교육에만 전념했다.

• 인생에 있어서 40대는 가장 유혹에 흔들리기 쉬운 나이라 할 수 있다.
 즉 40대는 돈과 명예, 권력, 이성에 대한 집착이 강한 때이고 그래서 이러한 유혹에 흔들리기 쉬운 나이이고 또한 어느 때보다 욕심이 넘치는 때라 할 수 있다.
따라서 40대에는 어느 때보다 자기 자신을 삼가고 조심하여 부적절한 돈, 명예, 권력, 이성에 대한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하여서 순간의 유혹에 빠져 일생을 망치는 일이 없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또한 매사에 욕심이 앞서지 않았나를 살피고 또 살펴야 실수나 과오가 없을 것이다.

▲ 공자는 50에 지천명(知天命) 즉 ‘하늘의 命(天命)을 알았다.’ 라고 술회 하였다.
공자의 이시기는 공자가 현실 정치에 적극 뜻을 갖게 된 시기였다. 공자는 51세에 ‘중도’ 라는 고을의 장을 시작으로 지금의 ‘국토해양부장관’ 과 ‘법무부장관’에 해당하는 벼슬을 하면서 인덕(仁德)정치의 뜻을 펼쳐나가려 했지만 현실정치의 벽과 반대세력에 의해 뜻을 실현하지 못하고 물러나야 했다.

공자는 이러한 현실정치에 참여 하면서 인덕(仁德)정치를 펼치는 것이야 말로 하늘이 자신에게 내려 준 명 즉 천명(天命)임을 알았던 것이다.

• 보통사람에 있어서 의욕과 열정만으로 세상사를 자신했던 40대와는 달리 50대가 되어서는 세상사가 인간의 의지와 노력 외에 그 어떤 하늘의 섭리 즉 천명에 의한 것임을 알게 된다.
그래서 안 될 일에 절대 억지를 부리지 않고 쓸데없는 욕심에서 조금은 벗어나게 된다.
그러므로 지금하고 있는 일이 비록 만족스럽지는 않더라도 그것이 나의 분수이고 하늘의 명임을 알아야 한다.

▲ 공자는 60에 이순(耳順) 즉 ‘남의 말을 순순히 들을 수 있게 되었다.’라고 술회하였다.
공자의 이 시기는 고국인 노나라에서 인덕(仁德)정치의 뜻이 좌절되자 고국인 노나라를 떠나 여러 나라를 유랑하면서 각 나라의 왕들에게 인덕(仁德)정치를 권했으나 어느 나라의 왕도 받아들이지 않았고 심지어 공자의 道에 대해 비방을 하는 자들도 많이 나왔다.

그뿐만 아니라 여러 나라를 유랑하는 동안 식량이 떨어져 굶기도 하고 또한 생명의 위협을 당하는 등 고난이 절정에 달한 시기였다.
그러나 공자는 이러한 좌절과 고난 속에도 오히려 세상사에 대한 이해의 폭이 넓어지고 또한 다른 사람의 비방에도 거슬리지 않고 받아들일 수 있는 달관에 까지 이르게 된 것이다.

• 보통 사람의 나이도 60이 되면 산전수전의 세상사를 경험한지라 세상사에 대한 어느 정도 달관의 경지에 이르게 되어 세상사에 대한 여유와 너그러움의 폭이 넓어진다.
그러므로 상대방으로부터 섭섭하고 불쾌한 말을 들어도 젊었을 때처럼 화를 내거나 서운해 하지 않고 어느 정도 여유를 갖고 너그럽게 이해하여 받아들이게 된다.

이처럼 나이가 먹을수록 귀가 순해져서 남의 말을 이해하고 너그럽게 받아들이기는커녕 어떤 사람은 거꾸로 귀가 어두워져 완고해지기만 하고 자기 고집만 내세우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러므로 남에게 서운하거나 불쾌한 말을 들었을 때는 역지사지(易地思之)하여,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하여 이해하고 너그럽게 받아들일 줄 알아야 존경받는 노인이 될 것이다.

▲ 공자는 70에 종심소욕불유구(從心所慾不踰矩) 즉 ‘내 마음 내키는 대로해도 법도를 어기지 않았다.’라고 하였다.
이를 줄여서 ‘종심’(從心)이라고도 한다. 이시기의 공자는 고국인 『노나라』는 물론이고 14년간 각국을 다니면서 인덕 정치의 뜻을 펼쳐 보려 했으나 모두 뜻을 이루지 못하고 고국 『노나라』에 돌아와서 모든 정치의 뜻을 단념하고 마지막으로 시, 서, 예, 악 등 고전 학문 연구에만 몰두 하였다.

이때 공자는 몸과 마음이 성현의 道와 일치하였다.
다시 말해 ‘하학이상달’(下學而上達) 즉 ‘자신의 道가 하늘의 이치와 통했다.’라고 한 것이다.
공자는 임종 수일 전에 손에 지팡이를 들고 문전을 걸으면서 하늘을 바라보고 한탄하며 노래했다.
?태산이 무너지고 대들보가 허물어지며 슬기로운 철인(哲人)이 시드노라?하며 자기의 죽음을 예견하고 73세(기원전479)에 서거했다.

• 우리 인생에 있어서 70은 서서히 인생의 갈무리를 준비해야 할 시기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마음을 서서히 비워 노욕(老欲)을 부리지 않도록 해야 하고, 그러나 인생을 갈고 닦음에는 한 치의 소홀함이 없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해 재물, 명예, 권력 등에 대한 욕망은 버리고 인(仁), 예(禮), 지(知), 신(仁)의 인간의 본성을 죽는 그 순간까지 갈고 닦아서 아름다운 인생의 마침표를 찍을 수 있도록 마음가짐을 다져야 할 것이다.
‘행백리자반구십리’(行百里者半九十里) 즉 ‘백리 길을 가는 자는 구십 리를 가고서도 아직도 절반이 남았구나.’하는 마음으로 ‘남은 십리 길도 최선을 다하라.’는 말처럼 생을 마감하는 날까지 인생의 정도(正道)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삼가고 조심하여 그 인생의 아름다운 마침표를 찍을 수 있도록 다짐하고 또 다짐하여야 할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종종 정치 지도자나 권세가들이 마지막 노욕(老欲)을 부리다가 쌓아 온 명예까지 몽땅 다 잃고 추악하게 추락하는 모습을 많이 보지 않는 가, 그러기에 ‘살아서 백년 명예 지키기 어렵고, 죽어서 백년 이름 지키기가 어렵다.’ 하는 것이다.

‘개관사정’(蓋棺事定)이라 하지 않는가.
즉 그 사람에 대한 평가는 관 뚜껑을 덮은 뒤 즉 죽은 뒤에 평가하게 된다는 말이다.
이처럼 우리는 죽는 순간까지 흐트러짐이 없는 인생이 되도록 마음의 고삐를 놓지 말아야 할 것이다.
그렇다, 뜨는 해의 찬란함 보다 더 아름다운 것은 지는 해의 노을이 아니겠는가.

지금까지 공자의 생애에 대한 술회를 통하여 몇 가지 삶의 지혜를 되새겨 보자.
• 자기 인생에 대한 확고한 목표를 가지고 살아라.
• 평생 배움의 뜻과 노력을 게을리 하지 마라.
• 욕망의 유혹과 지나친 욕심을 항상 경계하라. •
상대방에 대하여 역지사지(易地思之)의 마음으로써 넓게 이해하고 용서하라.
• 죽는 순간까지 인생의 정도(正道)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삼가고 조심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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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김충남 교수는 서예가이며 한학자인 일당(一棠)선생과 '정향'선생으로 부터 한문과 경서를 수학하였다. 현재는 대전광역시 평생 교육문화센터와 서구문화원 등 사회교육기관에서 일반인들에게 명심보감과 사서(대학  논어  맹자  중용)강의 활동을 하고 있다. 금강일보에 칼럼 ?김충남의 생활 명심보감?을 연재하고 있다.

  또 어려운 한문이나 경서의 뜻을 쉽고 논리적이고 현대적 정서에 맞게 강의 할 수 있도록 하는 강의서를 집필중이다(김충남의『명심보감』, 김충남의『대학』, 김충남의『논어』, 김충남의『맹자』, 김충남의『중용』, 김충남의『생활한자』, 김충남의『고사성어』) 손전화 010-2109-5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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