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충남의 잔소리]30회

<여설> 필자가 지나간 회에서 운명이란 피하려야 피할 수 없고 거부하려야 거부 할 수 없는 자기만이 짊어지고 가야할 자기의 몫이라 했다. 그래서 피할 수 없고 거부할 수 없는 운명이니 후복한 운명이건 박복한 운명이건 무조건 그 처한 운명에 대해 사랑하라했다.

다시 말해 후복한 운명이 닥쳤을 때 그 운명을 사랑하면 그 후복한 운명이 더욱 빛을 내게 됨이요. 또한 뒤에 올수 있는 박복한 운명에 대비할 수 있게 됨이다.

이와 반대로 박복한 운명, 즉 불우한 운명이 닥쳤을 때도 그 운명을 사랑하면 새로운 지혜와 능력이 창출되고 그로인하여 후복한 운명을 열어가는 길이 펼쳐질 수 있는 것이다.
필자는 앞으로 2회에 걸쳐 후복한 운명을 사랑한 사람의 삶과 박복한 운명을 사랑한 사람의 삶을 우리 역사의 인물을 통해 조명해 보기로 하겠다.


조선시대를 살다간 여류명사 두 분의 삶이 바로 이러하다 할 수 있다.
한분은 조선시대 『연산군』때 태어나 『명종』때까지 48세의 삶을 살다간 『율곡』(이이)의 어머니이며, 조선중기 여류화가인 『신사임당』이고, 또 한분은 『신사임당』보다 60년 후인 『명종』에서『선조』때까지 27세의 삶을 살다간 『홍길동전』을 지은 『허균』의 누이이며 조선중기의 여류시인인『허난설헌』이다. 이 두 여류명사 중 한분인『신사임당』은 후복한 운명의 삶을 살았고 또 한분인 『허난설헌』은 박복한 운명 즉 불우한 운명을 살았지만 두 분 모두가 각기의 운명의 삶을 적극적으로 사랑하였기에 후세까지 그 이름을 전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필자는 대조적인 운명인 두 여류명사의 삶을 자세히 조명하여 보겠다.
이를 통하여 각기 자신에게 처한 운명을 사랑하는 지혜와 용기와 희망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연산군에서 명조 때까지 48세를 후복한 운명의 삶으로 살다간 『신사임당』(평산 신씨, 호는 『사임당』)의 삶을 조명해 보겠다.

『신사임당』의 아버지는 진사가 되었지만 벼슬은 하지 않고 평생을 선비로서 만 산 도덕군자였다.
그녀의 어머니는 비록부녀자이지만 부모로부터 학덕을 배우고 쌓은 지성인 이었다.
이러한 어머니 덕분에 『신사임당』도 일찍이 어머니로부터 학문과 현모양처로서의 예의범절을 익혔고 이것이 바로 남편을 출셋길에 오르게 하고 또 아들을 대학자로 키운 원동력이 된 것이다.

『사임당』이 남편인 『이 원수』를 지혜롭게 내조하여 성공시킨 일화를 소개하면, 『사임당』이 남편의 학업을 위해 남편을 서울로 올려 보내면서 10년 후 학업을 마치면 만나기로 약속했다.
그러나 남편이 처자식이 그리워 약속을 지키지 못하고 자주 집으로 내려오자『사임당』이 이래서는 안 되겠다고 하고 바느질 그릇에서 가위를 끄집어내어 남편 앞에 놓고 비장한 목소리로 ?나는 세상에 희망이 없는 몸이라 어찌 오래 더 살기를 바라겠습니까.
당신이 약속을 지키지 못한다면 스스로 자결이라도 해서 내 인생을 마칠까 합니다.?이 말에 남편은 정신이 번쩍 들어 공부에 매진할 것을 결심하고 서울로 올라와서 공부에만 매진하여 마침내 뜻을 이루었다 한다.

또한 『사임당』의 시 당숙인『이기』가 우의정으로 있을 때 남편이 그 집을 자주 드나들며 교류하였다.
『이기』는 『윤원형』과 결탁하여 『을사사화』를 일으켜 선비들에게 큰 화를 입혔던 사람인데 『사임당』은 당숙이기는 하지만 권세만을 탐하는 사람이라 가까이 하지 말 것을 남편에게 권하여 남편『이 원수』는 아내의 말대로 『이기』와 발길을 끊어 뒷날 화를 당하지 않았다 한다.
얼마나 지혜롭고 현명한 내조자 이며 양처(良妻)로서의 『신사임당』인가.

『신사임당』은 자애롭고 엄한 어머니로서 아들 『이이(율곡)』를 조선시대 대학자요, 정치가로써 키웠으니 오늘날까지 현모양처의 표상으로써 모든 여성들의 귀감이 되고 있는 것이다.

『신사임당』은 이처럼 현모양처의 대명사로서의 삶뿐만 아니라 조선시대 여류 서,화가로서의 삶을 살았다.
이는 바로 『신사임당』의 타고난 서, 화의 재능을 자신의 후복한 운명이 디딤돌이 되어 주었기 때문에 그 재능을 마음껏 갈고 닦아 빛을 내게 할 수 있었던 것이다.

『신사임당』의 후복한 운명을 다시 한 번 살펴보면 , 우선 『신사임당』은 부모와 가정환경, 교육에 있어서 어느 것 하나 부족함이 없는 후복한 운명을 타고났다.
비록 여자이지만 어질고 학문이 깊었던 그녀의 어머니로부터 혼인 전에 학문과 예의범절을 공부하였고, 그것이 바로 남편과 자식을 성공시킨 현모양처로서의 바탕이 되었으며 또한 서, 화의 타고난 재능을 마음껏 갈고 닦을 수 있는 여건이 된 것이다.

두 번째는 『신사임당』은 출가 후에도 조선시대 여자들이 겪는 시집살이나 남편의 구속을 받지 않고 비교적 자유롭게 자녀교육과 서, 화의 작품 활동을 할 수 있었으니 이는 바로 그 당시로서는 좀처럼 만나기 어려운 너그럽고 이해 많은 시부모와 남편을 만난 후복한 운명이라 할 수 있다.
특히 남편은 아내인 『신사임당』의 작품 활동을 적극 격려하고 후원해 주었다 한다.

셋째로는 『신사임당』은 자녀에 대한 운도 후복하였다.
『이이(육곡)』를 비롯한 세 자매가 모두 『신사임당』의 뜻에 따라 대학자와 예술가로서 성공을 하였던 것이다. 이만하면 조선시대의 여자로서는 무척 후복한 운명의 삶을 살았다 할 수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신사임당』은 이러한 자신의 후복한 운명에 도취되어 당시 사대부 집안의 안방마님으로만 머물지 않고 자신의 후복한 운명을 디딤돌로 하여 자신의 삶을 적극적으로 개척하여 현모양처로서, 예술가로서 그야말로 가정과 자식과 자기 자신 모두를 빛내었으니 이러한 삶이야말로 후복한 자기 운명을 적극적으로 사랑하여 더욱 빛을 발한 삶이 아니겠는가.

지금 나의 운명이 후복 하다고 생각한다면 절대 그 후복함이 영원하리라는 착각과 교만에 빠져있지 말고 겸손하게 그 운명을 사랑하면서 더욱 빛을 발할 수 있도록 쉼 없는 노력을 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리고 뒷날의 박복한 운명에 대비해야 하지 않겠는가. 『신사임당』보다 60년 후인 『명종』에서 『선조』때까지 27세를 박복한 운명의 삶으로 살다간 『허난설헌』(본명 : 초희 , 호 : 난설헌) 의 삶을 조명해 보겠다.

『난설헌』은 경상 감사를 역임한 『허엽』과 둘째부인인 김 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난설헌』의 집안은 아버지 『허엽』을 비롯한 자녀들이 모두 문장에 뛰어나 당시의 사람들은 이들을 허씨 5문장(허엽, 허성, 허봉, 허난설헌, 허균)이라 불렀다.

그러나 이들 모두는 불행한 생을 마감하였다. 아버지 『허엽』은 경상 감사를 지냈고 동서분당의 영수가 된 인물이나 『난설헌』이 18세 때 객사를 하였고 『난설헌』의 작은 오빠인 『허봉』역시 『전한』,『창원부사』를 지냈으나 병조판서인 『이이』를 탄핵했다가 『갑산』에서 3년의 유배 생활 후 각지를 떠돌아다니는 유랑생활을 하다가 『난설헌』의 26세 때 객사했다.
『홍길동전』을 지은 동생 『허균』은 형조, 예조판서까지 지냈지만 역적의 누명을 쓰고 50세에 처형당했다.
『난설헌』역시 불우한 삶으로써 안동김씨 집안의 『김성립』에게 시집을 갔으나 부부관계가 원만치 못했고 고부갈등도 심했다 한다. 거기에다 딸, 아들 모두를 잃었다.
『난설헌』은 이처럼 몰락해가는 집안에 대한 안타까움과 자식 잃은 아픔, 부부간의 불화, 고부간의 갈등 그리고 당시 여성 억압에 대한 분노를 오로지 타고난 시와 문장으로 승화시켰다.

그녀는 시, 문장을 쓸 때는 항상 화관(花冠)을 쓰고 향을 피워놓고 지었는데 그녀가 지은 시와 문장은 집 한 채에 가득 찼다고 한다.
그녀는 27세의 짧은 생을 살았는데 그녀가 죽음에 앞서 자기의 죽음을 예견하는 시를 지었는데 그 시의 내용 중 ?부용꽃 스물일곱송이가 붉게 떨어지니?하는 시구가 있다.

『난설헌』은 그 뒤 27세 되던 해에 아무병도 없었는데 어느 날 갑자기 몸을 씻고 옷을 갈아입고서 집안사람들에게 ?금년이 바로 3.9수 즉 27세에 해당되니 오늘 부용꽃이 서리에 맞아 붉게 되었다?하고는 유연히 눈을 감았다 한다.
『난설헌』은 그렇게 향년 27세로 요절했다.

집안에 가득 찼던 그녀의 작품은 모두 불태우라는 그녀의 유언에 따라 모두 불태워졌다 한다. 그러나 그녀의 작품 중 일부는 동생 『허균』이 명나라 시인에게 주어 중국에서 시집 『난설헌집』이 간행되어 격찬을 받았고 일본에서도 간행되어 애송 되었다 한다.
이처럼 『난설헌』은 자신의 불우한 운명을 조선시대 보통 여성들처럼 가슴의 한으로만 품지 않고 더 적극적으로 사랑하여 타고난 예술적 재능 즉 시와 문장으로 승화시켜서 여류시인이며 문장가로서 오늘날까지 그 명성을 전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 지금 나의 운명이 박복한 것은 하늘이 무엇인가 나의 길을 암시해 주고 있음이요.
그 길을 위한 지혜와 능력을 내려 주시는 것이다.
『난설헌』에게는 박복한 운명이 여류 시인으로 승화 시킬 수 있는 길이요. 지혜가 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지금 나에게 처한 박복한 운명 속에서 하늘이 나에게만 내려 주신 나의 길이 무엇인가를 빨리 찾아서 노력해야 하지 않겠는가.

=======================================================================

   
 

필자김충남 교수는 서예가이며 한학자인 일당(一棠)선생과 '정향'선생으로 부터 한문과 경서를 수학하였다. 현재는 『대전광역시 평생 교육문화센터』 『서구문화원』, 『 대전광역시 인재개발원』등 사회교육기관에서 일반인들에게 명심보감과 사서(대학 논어 맹자 중용)강의 활동을 하고 있다. 금강일보에 칼럼 『김충남의 생활 명심보감』『김충남의 한자어 마당』을 연재하고 있다.  

  또 어려운 한문이나 경서의 뜻을 쉽고 논리적이고 현대적 정서에 맞게 강의 할 수 있도록 하는 강의서를 집필중이다(김충남의『명심보감』, 김충남의『대학』, 김충남의『논어』, 김충남의『맹자』, 김충남의『중용』, 김충남의『생활한자』, 김충남의『고사성어』) 손전화 010-2109-5123

필자김충남 교수는 서예가이며 한학자인 일당(一棠)선생과 '정향'선생으로 부터 한문과 경서를 수학하였다. 현재는 『대전광역시 평생 교육문화센터』 『서구문화원』, 『 대전광역시 인재개발원』등 사회교육기관에서 일반인들에게 명심보감과 사서(대학 논어 맹자 중용)강의 활동을 하고 있다. 금강일보에 칼럼 『김충남의 생활 명심보감』『김충남의 한자어 마당』을 연재하고 있다.  

필자김충남 교수는 서예가이며 한학자인 일당(一棠)선생과 '정향'선생으로 부터 한문과 경서를 수학하였다. 현재는 『대전광역시 평생 교육문화센터』 『서구문화원』, 『 대전광역시 인재개발원』등 사회교육기관에서 일반인들에게 명심보감과 사서(대학 논어 맹자 중용)강의 활동을 하고 있다. 금강일보에 칼럼 『김충남의 생활 명심보감』『김충남의 한자어 마당』을 연재하고 있다.  

필자김충남 교수는 서예가이며 한학자인 일당(一棠)선생과 '정향'선생으로 부터 한문과 경서를 수학하였다. 현재는 『대전광역시 평생 교육문화센터』 『서구문화원』, 『 대전광역시 인재개발원』등 사회교육기관에서 일반인들에게 명심보감과 사서(대학 논어 맹자 중용)강의 활동을 하고 있다. 금강일보에 칼럼 『김충남의 생활 명심보감』『김충남의 한자어 마당』을 연재하고 있다.  

필자김충남 교수는 서예가이며 한학자인 일당(一棠)선생과 '정향'선생으로 부터 한문과 경서를 수학하였다. 현재는 『대전광역시 평생 교육문화센터』 『서구문화원』, 『 대전광역시 인재개발원』등 사회교육기관에서 일반인들에게 명심보감과 사서(대학 논어 맹자 중용)강의 활동을 하고 있다. 금강일보에 칼럼 『김충남의 생활 명심보감』『김충남의 한자어 마당』을 연재하고 있다.  

저작권자 © 디트NEWS24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