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우의 족보이야기]-(119)장흥위씨(長興魏氏)

   
뿌리공원에 조성된 장흥위씨 조형물.전면/대전 중구

        작품명

선조의 혼(魂)

조각가

류 훈

작품설명

장흥 위(魏)씨 선조들의 유서 깊은 역사를 바탕으로 세련되게 재구성한 작품이며 전체적 형태는 한글 ‘위’자를 모태로 직선과 곡선의 통일된 조화 속에 문중의 화합(和合)을 의미하며 우측의 기둥은 문중의 비상을, 상단의 원은 충효의 정신과 문중 의 번영을 기원하는 뜻을 담았다.

   
뿌리공원에 조성된 장흥위씨 조형물.후면/대전 중구

<뿌리공원에 새겨진 장흥위씨 유래>

? 장흥 위씨(魏氏)의 시조는 회주군 휘(諱)경(鏡)이다. 공은 당나라 한림학사로 638년 신라 27대 선덕여왕 7년에 도예지사로 동래하여 벼슬이 아찬에 이르렀으며 고려 때 회주군 으로 추봉 되니 회주는 곧 장흥(長興)이다. 그러나 약 300년간의 세계 실전으로 고려 초기 대각관 창주(菖珠)를 중시조로 삼아 세계를 잇고 있다.

5세 계정(繼廷)은 고려 문종 때 문과에 급제하여 선종·숙종·예종 등 4조에서 삼중대광, 검교태사, 수태보, 문하시중, 판이부사, 상주국 등을 역임했다. 타계하자 충렬 시호와 함께 예종묘정에 배향됐다.

 또한 고려 고종 때 원개(元凱)·문개(文凱)·신개(信凱) 3형제는 예부시에 장원급제하고, 원개는 한림학사 추밀원부사로 활동하다 출가, 정혜사에 있을 때 원나라 황제에게 청전표를 올려 송광사의 징발된 토지을 회복시켰다. 그가 입적 하자 충렬왕은 원감국사 시호를 내렸다.

조선조에서는 합문판사였던 충(?)이 이성계의 역성혁명을 불복하였다 하여 출사자가 200년간 없었으나 그 후 부터는 문·무과 급제자가 배출되고, 특히 임진 및 병자 양란에는 호남모곡도유사 대용(大用)은 형조참의에, 덕의(德毅)도 병조참의에 추증, 해남현감 대기(大器)는 호서수군절도사에, 언양현감 덕화(德和)는 호조판서에 의주부윤 한량(漢良), 북도능전지를 저술한 창조(昌祖)는 호조참의 등 무공이 지대하다. 또한 호남 실학의 거목, 옥과현감 백규(伯珪)는 90여권의 저서를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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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진우 해설>

 

                                                              위씨(魏氏)

우리나라 위씨(魏氏)는 가평위씨(1명).고흥위씨(1,100명).관산위씨(1,536명).광산위씨(364명).수령위씨(84명).장흥위씨(24,654명).전주위씨(429명).함흥위씨(2816명).해남위씨(171명) 등 총 9본관에 인구는 지난 2000년의 조사에서는 28,675명이었다.

문헌에 의하면 위씨(魏氏)의 뿌리는 주나라 혜왕(惠王)때 진헌공(晉獻公)에 봉해진 필만(畢萬)의 후손으로 알려졌다.

                                            장흥위씨(長興魏氏)

                              자연 그 자체가 그대로 부처의 경지-원감국사

                          실학의 거목으로 독자적인 경세철학(經世哲學)체계화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보다 91년 앞선 조선전도(朝鮮全圖)그린 석학 위백규

   
장천재(長川齋)

전남 장흥 천관산 동쪽 기슭에 자리잡고 있는 장천재는 장흥 위씨의 상징적 제각(祭閣)이다. 울창한 숲과 천년의 신비를 간직한 듯 우람한 태고송(太古松),사시사철 흐르는 계곡 등 주변의 풍광과 어울러 있는 제각은 장흥위씨와는 뗄래 야 뗄 수 없는 관계를 맺고 있다.<출처-장흥위씨 사진>

장천재는 본래 장천암지(長川庵祉)라고 한다. 조선 중종 때 강릉참봉(종9품)을 지냈던 19세 위진현(魏晉賢)이 장천동에 어머니 평산 신(申)씨를 위해 묘각을 지었다고 한다.

장흥위씨 문중에서는 1659년(효종) 때 암자를 철거하고 그 자리에 제각을 지었다. 그 후 1705년(숙종 31), 1724년(경종4), 1747년(영조23) 등 세 차례에 걸쳐 재수(再修)한 뒤 1873년(고종10) 지금의 제각형태로 중건(重建)했다고 한다.

그런데 장천재의 건축양식은 매우 특이하다. 대부분의 제각은 ‘ㄱ’자, ‘ㄷ’자, ‘ㅁ’자 형태로 지어졌다. 그러나 장천재는 한문의 ‘工’자 형태다. 이는 어느 공간에서도 주변의 자연과 풍광을 조망할 수 있게 하는 구조라는 것이다. 그래서 이곳을 찾는 시인묵객이 많았던 모양이다.
장천재는 제각이자 강학(講學)과 시회(詩會) 등 다양한 장소로 이용되어 왔다. 관산에 살고 있는 주민들은 남자든 여자든 형태야 어떻든 인연을 맺고 있다. 남자는 그곳에서 글을 배운다. 그리고 음력 그믐 날 제야의 행사에 참여한다. 여자들도 명절이면 그곳에서 놀이를 하며 지낸다.

시회(詩會) 또한 장천재의 전통이다. 주로 문중 어른들이 여름 한가한 때 피서를 겸해 시회를 연다. 시기는 유두, 칠석, 백중인데 농사에 장원한 집이 주관한다. 더구나 외지에서 다른 성씨의 선비들이 찾아오면 시회를 열어 접대한다. 이것이 외지의 선비를 접대하는 위씨들의 손님 접대방식이다.

한편 장천재는 1978년 지방유형문화재 제 72호로 지정됐으며, 앞 시대를 살았던 유명인사의 시 등 편액이 40개가 걸려있다.

   

                   하산사(霞山祠)-전남 장흥군 장흥읍 평화리 다전등 언덕

하산사는 장흥 위씨 시조 등 오현조(五顯祖)의 위패를 모신곳이다. 여기서는 해마다 5월 첫 일요일이면 전국의 종친들이 모여 시조 위경, 중시조 위창주, 5세 위계정, 14세 위충, 15세 위덕룡의 제사를 지내고 있다.

장흥위씨(長興魏氏)는 주나라 혜왕 때 진헌공에 봉해진 필만의 후손으로 당나라 관서지방의 홍농(弘農)사람인 위 경(魏鏡)이 당나라 한림학사로 서기638년(신라 27대 선덕여왕 7년)에

선덕여왕이 당나라에 도예지사(道藝之士)를 청(請)했을 때,당나라 태종이 파견한 8학사(八學士) 중의 한사람으로 우리나라에 들어와 벼슬이 아찬에 이르렀다.

 위 경(魏鏡)은 신라에서 문하습비후(門下拾非侯).아찬(신라의 17관등 중 6번째 벼슬 ).상서시중(尙書侍中:상서성의 으뜸벼슬)을 역임하고 고려때 회주군(懷州君:회주는 장흥의 옛 지명)에 추봉해졌기에 후손들이 관향을 장흥(長興)으로 하였다.

그러나 문헌을 잃어 세계(世系)를 자세히 알 수 없자 신라 말에 시중(侍中:신라때 집사성의 으뜸벼슬)을 역임한 위창주(魏菖珠)를 1세조로 받들며 세계(世系)를 이어왔다.

문헌에 나타난 위씨(魏氏)의 본관은 13본이 전하나 모두 세거하는 지명이며 현재는 장흥위씨(長興魏氏)단본으로 전한다.


역사에 기록된 위씨 가문의 인물로는 위창주(魏菖珠)의 5세손 위계정(魏繼廷)이 고려 문종때 문과(文科)에 급제하고,이부상서(吏部尙書:정3품 장관).문하시랑 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정2품재신반열 부총리).문하시중(門下侍中:종1품 으뜸벼슬로 백관을 통솔하고 서정을 총리한 정승)을 역임하였다.위계정(魏繼廷)은 특히 고려 선종.숙종.예종 등 4조에서

삼중대광(三重大匡:정1품품계)으로 검교태사(檢校太師:정1품명예직),수태보(守太保),판이부사(재신이겸임)를 역임하고,상주국(上柱國:상주국은 문종 때 국가의 공훈자에게 주기 위해 제정한 훈호(勳號)로 정2품관에게 주는것)의 훈호를 받았다.

 그가  타계하자 충렬 시호와 함께 예종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충렬공의 손자인 위원개(魏元凱),위문개(魏文凱), 위신개(魏信凱) 3형제는 현재의 장흥읍내  법원 뒤 쌍봉산(雙峰山) 아래서 살면서 수학(修學)하고, 고려 고종 35년과 다음해인 36년에 다같이 과거에 장원급제한데 이어 막내도 급제하였다.

이로인해 당시 장흥부민(長興府民)들은 이 산(山) 밑에서 태어나 성장한 3형제가 연이어 장원급제하고 막내마저 급제를 하자, 쌍봉 중 큰 봉우리를 장원봉(壯元峰)이라 하고, 작은 봉우리를 거말봉(居末峰)이라 일컬었다고 한다.

위원개(魏元凱)는 한림학사(翰林學士:문신가운데 뽑힌 뛰어난 학자로 한림원.수문전 등의 종3품이나 정4품 벼슬)와 추밀원부사(樞密院副使:왕명을 출납하고 궁중의 숙위를 맡아보던 추밀원의 정3품)에 올랐다.

장원급제(壯元及第)후 지었다는 위원개(魏元凱)의시(詩 )가 전하는데 다음과 같다

月宮丹桂最高枝(월궁단계최고지) 월궁의 계수나무 가장 높은 가지를
去年今年兄弟折(거년금년형제절)거년과 금년에 우리형제가 꺾었구나

또, 시에
黃金榜首吾曾占(황금방수오증점)황금의 장원급제 일찍이 내가 차지했는데
丹桂魁科子亦收(단계괴과자역수)장원의 월계관을 그대 또한 거두웠네
千萬古來稀有事(천만고래희유사)천만 고래에 드문 일이라
一家生得二龍頭(일가생득이룡두)한집에 두 마리용을 길러 얻다니

세인들이 이르기를
誰知巖下如斗舍(수지암하여두사)누가 알았으랴 바위아래 작은집 오두막에서
養得天池幾箇龍(양득천지기개룡)천지에 몇 마리용을 길러 얻을 줄이야.

 위원개는 영가서기(永嘉書記)로 출발해서 사절(使節)의 한 사람으로 일본에 가기도 했다. 그는 몽고의 침략으로 나라의 어지러움을 한탄하다 마침내 불가에 귀의한다. 과거에 장원급제해서 관직생활을 한지 꼭 10년 만이다. 강화 선원사에서 원오국사에게 구족계(具足戒)를 받고 승려의 길을 걸었다.

법휘(法諱)는 충지(沖止), 자호는 복암(宓庵)이다. 법명을 법환(法桓)이라고 하다가 충지(沖止)로 고쳤으며 법호는 복암노인(宓庵老人)이다.1266년(고려 원종7)에 경남 김해현 감로사(甘露寺) 주지가 됐다.
원오국사가 열반하자 뒤를 이어 수선사(修禪社)제 6세주가 되었으며, 원나라 세조(世祖)의 요청으로 북경에 가서 극진한 대우를 받고 금란가사(袈裟).벽수장삼(碧繡長衫).백불자(白佛子) 등을 선사 받았다.

위원개는 45세에 정혜사에서 주석하였으며,이때 위원개는 "자연 그 자체가 그대로 부처의 경지'임을 깨닫고 운수행각을 멈추게 된다.

"부처님 소리가 바로 맑은 시냇물 소리인데,무엇때문에 다시 드날리리"

1293년 1월10일 삭발목욕한뒤 옷을 갈아입고 문인(門人)들에게 "생사가 있는것은 인생의 길이다.나는 마땅히 가리니 너희는 잘있거라"는 말을 남겼다.

이때가 세수 68세, 법랍(法臘) 39세였다.위원개가 세상을 뜨자 충렬왕은 시호(諡號)를 원감국사(圓鑑國師)라 하고, 탑액(塔額)을 보명(寶明)이라 지어주었다. 원감국사의 원비(原碑)는 송광사 감로암(甘露庵)에 있으며 탑은 복암 서쪽 200m 중봉(中峰)에 있다.

특히 원감국사는 시문에 능하였다. 그의 시문이 ‘동문선’에 실려있다는 것은 이를 대변하고 있다. 송광사는 국사의 선교관(禪敎觀)을 파악하기 위해 여러 승려와 학자들로 하여금 본격적인 연구활동을 벌이고 있다.

   

           조계총림 전남 순천시 송광면 신평리의 <송광사> 대웅보전

송광사는 16국사를 비롯, 가장 많은 고승대덕을 배출해 삼보사찰가운데도 승보종찰로서 널리 알려져 있다.

한편 위문개는 평탄한 관리생활을 했다고 한다. 그는 장원급제한 후 한림학사(翰林學士) 보궐(補闕)을 거쳐 지금 순천시인 평양군사(平陽郡事)를 역임했다. 막내인 위신개는 후사가 없기 때문에 현재 위씨 성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모두 그의 후손이다. 

<위원개 유시>

 遺詩(유시) : 遺偈(유게)

閱過行年六十八(열과행년육십팔) 세상살이 내 나이 68인데
及到今朝萬事畢(급도금조만사필) 오늘 아침 모든 일 다 끝냈네
故鄕歸路坦然平(고향귀로탄연평)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이 평탄하니
路頭分明未曾失(로두분명미증실) 가는 길 분명하여 헛갈림 없네
手中縡有一枝空(수중제유일지공) 수중에 겨우 지팡이 하나
且喜途中脚不倦(차희도중각불권) 도중에 다리 피로하지 않으니 또한 기쁘네 

위문개(魏文凱,1228~1289)는  맏형 원감국사가 1226년생이니, 만약 3살터울이면 1229년 정도가 될 것이다. 국사의 祝舍弟文凱就官韻에는「月宮丹桂最高枝 去年今年兄弟折」즉 "월궁의 계수나무 가장 높은 가지를 거년과 금년에 형제가 꺾었구나" 하며 축하한 시(詩)가 있다. 이 시(詩,芝峯類說 文章卷)로 보면 형이 1244년(甲辰)에 春?(禮部試)에 합격했으니, 1245년(乙巳)에 장원급제한 것을 알 수 있다.(p.192)


위문개는 급제 이후 개경(開京)에서 보궐(補闕,정6품)을 거쳐 맏형이 정혜사(定慧社) 있을 때인 1274년쯤에 平陽郡守(전남순천)로 부임해 재직하다 1277년 해주군수(海州郡守)로 옮겼으나 신병을 앓다 1289년(乙丑)에 타계했다고 "朝遼東路按察副使洪公革書"에 있다.(원감국사집 p.281~282)
 한편 사서(史書) 나타난 위문개(魏文凱) 이름은 고려사(高麗史)에는 문경(文卿)으로 기록되어 있다고 한다.

3형제중 막내인 당후공(堂後公) 위신개(魏信凱,1250~?)에 대한 기록은 자세하지는 않다. 과거의 급제시기도 두 형은 1244?5년과 1248?9년 설(說)이 있지만 위신개 경우는  1250년 이후로 추정한다. 위씨 족보에는 과거에 급제했다는 사실과 후손이 끊겼다는 정도 이외에는 아무 것도 수록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원감집(圓鑑集)에 의하면, 위신개는 당후(堂後)라는 관작과 경상도 양주군수(梁州郡守)로 재임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즉 위원개가 경상남도 김해시 신어산(神魚山)감로사(甘露社) 주지로 있을 때 자주 만났으며, 정혜사(定慧社)로 옮겼을 때 마침 평양군수(平陽郡守)로 부임한 위문개와 계족봉(鷄足峯)의 산사에서 한 이불을 덮고 잤다는 소식을 전해 듣고 같이하지 못한 것을 아쉬워하는 시(詩)가 함께 수록되어 있다.(원감국사집 p.27)다음은  당후공의 시(詩).

당후공(堂後公,신개)의 시(詩)


 世亂今年勝去年- 세상 어지러움 금년이 지난해보다 더하니
 四方何處不騷然- 사방 어느 곳인들 시끄럽지 않으리
 陟岡?自勞相望- 메 뿌리에 올라 부질없이 바라보기도 괴로운데
 蓋被無因得共眠- 이불 덮고 같이 잠잘 인연도 없어라.<위씨 대종회 및 문헌참고>

 장흥위씨는 10세손 위 온(魏溫)이 평장사(平章事:중서문하서의 정2품 부총리)를 거쳐 문하시중(門下侍中:정사를 총괄하고 서정을 총리한 종1품 정승)에 올라 가문을 크게 증흥시켰다.조선시대에도 위 씨(魏氏)가문은 많은 인물을 배출하였는데,

 위덕의(魏德毅)는 임진왜란 때 선조가 의주로 몽진(蒙塵:임금이 난리를 피하여 안전한 곳으로 옮겨감) 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석 달을 걸어 의주까지 찾아가 왕을 보필하였으며,

명나라 장수 여응종(呂應鐘)으로부터 "동국(東國)의 산은 오직 천관(天冠:장흥에 있는 산)이요,사람은 덕 의(德毅)가 있을 뿐이다."는 극찬을 받았다고 한다.

 또한 임진왜란 때 고경명(高敬命).김천일(金千鎰) 등과 함께 전공을 세우고 형조참의(刑曹參議:정3품)에 제수된 위대용(魏大用)과 이순신 휘하의 조전장(助戰將)으로 율포(栗浦).목포 등지에서 왜적을 무찔러 수군절도사(水軍節度使:수군을 통솔하던 정3품 무관)에 오른 위대기(魏大器)가 용맹을 떨쳤으며 영조때 호조참의(戶曹參議:정3품법무차관보)를 역임한 위창조(魏昌祖)등이 유명하였다. 


이 외에도 호남지방 실학(實學)의 거목 위백규(魏伯圭)는 시(詩).서(書).화(畵)에 모두 능해[삼절(三絶)]로 불린 조부(祖父) 위세보(魏世寶)로 부터 글을 배웠으며,그는 제자백가(諸子百家:춘추전국시대의 여러학파)는 물론 천문.역학.지리 등을 모두 섭렵,당대의 석학(碩學)이었다.

그는 자신의 독자적인 경세철학(經世哲學)을 체계화했고, 90여 권의 책을 저술하여 백과전서격 학문을 집대성하였으며 김정호의 대동여지도(大東輿地圖)보다 91년이나 앞선 조선전도(朝鮮全圖)를 그렸다.

장흥위씨는 조선시대에 위익원이 1880년 별시문과(別試文科:나라에 경사가 있을때나 병년(丙年)마다 보던 과거)에 장원급제 한것을 비롯,문과(文科:대과)에 12명,무과(무관을뽑던과거로 시험은 무예와 병서에 12명,사마시(司馬試:생원.지사를 뽑던 과거)에 27명 등 51명의 과거급제자를 배출하였다.


 인구조사에 의하면 장흥위씨는
1985년에는 총 5,420가구에 인구는 22,726명이었고,2000년에는 총 7,711가구에  24,654명이었다.

장흥(長興)은 전라남도의 남쪽에 위치하는 지명으로  757년(신라 경덕왕 16)에 오아(烏兒)로 개칭되어 보성군에 속하였다. 고려초에 정안현(定安縣),현종때 장흥부(長興府),1265년(원종6)에 다시 회주목(懷州牧)으로 승격되었고,1392년(태조1)에 수령현의 중령산에 성을 쌓고 중심지로 했으며,1413년(태종13)에 장흥도호부(都護府)로 승격되었다.1896년 전라남도로 이관되었다.

1914년 군.면 폐합으로 웅치(熊峙).회천(會泉) 2개면이 보성군에 이관되었으며,1936년 부동면을 장흥면으로 개칭하고,남상.남하양면을 용산면(蓉山面)으로 고읍면(古邑面)을 관산면(冠山面)으로 개칭하였다.1980년 관산면이 관산읍으로 대덕면이 대덕읍으로 승격하였다.

 
              김진우

김진우(金鎭宇)-금석문(金石文)-비문(碑文:지석.신도비.묘갈명 등) 연구 *족보전문가 *.민족문제연구소회원 *단재 신채호선생기념사업회 연구위원*지방자치실무연구소회원 ,<지은책>- "한국인의 역사"(교과서에 없는 역사,한국인 교양서.도서출판 춘추필법(春秋筆法)펴냄).공주고.고려대경영학과졸업.한국과학기술원(KAIST) 수료.(한국성씨연구소는 삼성의료원과 함께 2009년 "대한민국 성공기업" 선정 ).2010년 MBC드라마넷 한가위특집  출연,kbs국제방송 2010년 10월~11월 방송(2009년 올해를 빛낸 '장한한국인상' (문화)수상).다음 카페 <사단법인 뿌리문화>,2011년 KBS.MBC(대전) 추석특집,블로그.카페 blog.naver.com/sewoora.cafe.naver.com/sallija<한국인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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