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선미의 세상읽기]과학벨트 백지화로 충청권 분노 폭발

과학벨트에도 제2의 정운찬 총리 등장할까?

“2007년 대선도 없었던 일로 해야” “충청도가 표 낚는 낚시터에 불과한가?” “야구방망이로 뒤통수 맞은 것 같다” “장사치 보다 못한 망언” “세종시에 대한 패배주의적 증오심 버려야” “정권의 앞날이 평탄 할 수 없다” “사기행위 자백”

도저히 한 나라의 대통령을 향한 말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거칠고 격한 표현들이다. 여기에 차마 옮길 수 없는 더한 표현들도 있다. 보통 때라면 기름진 음식으로 무거워진 몸을 부여안고 TV 앞에서 뒹굴며 한껏 게으름을 떨었을 긴 명절 연휴가 끝나기도 전에 충청권 여론은 폭탄을 맞은 듯 요동을 치고 있다.

지난 1일 신년 좌담회에서 밝힌 이명박 대통령의 ‘충청권 국제과학비즈니스벨트 유치 백지화’ 발언은 덕담을 주고받아도 시원치 않을 우리 사회에 또 다시 분란과 갈등을 부추기고 있다.

세종시 문제가 채 아물지도 않은 상태에서 나온 또 한 번의 충청권에 대한 공약 파기뉘앙스는 ‘유치 백지화’가 아닌 ‘합리화’라는 청와대의 해명에도 불구하고 벌집을 쑤셔 놓은 듯 민심이 사납게 들끓고 있다. 게다가 이번에는 팩트(fact·사실)까지 왜곡해 논란을 더 부추기고 있다.

청와대 해명에도 불구하고 사실 왜곡으로 더 분노

이 대통령은 좌담회에서 국제과학비즈니스벨트 충청권 조성과 관련 “선거 유세에서는 충청도에서 표를 얻으려고 관심이 많았을 것”이라며 “거기에 얽매이는 것은 아니고 공약집에 있었던 것도 아니다”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이 같은 이 대통령의 주장은 사실이 아닌 것으로 드러났다. 과학벨트 충청권 조성 공약은 이 대통령의 대선공약집 대전. 충북. 충남 편과 18대 한나라당 총선공약집에도 적시되어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자유선진당은 이 같은 사실을 확인하며 충청 과학벨트와 관련한 이명박 대통령의 발언을 담은 USB 메모리를 청와대에 전달하기도 했다.

공약은 지켜져야 한다고 하지만 정책에 따라 바뀔 수도 있다. 공약을 얼마나 잘 이행하는지 현실가능한 공약인지를 점검하는 메니페스토 운동도 있지만 한 쪽에서는 공약은 당선 즉시 잊어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선거 과정에서 나온 공약은 그만큼 표를 의식한 선심성 약속이 많다는 이야기일 것이다.

또 공약으로 유권자들을 현혹할 생각은 없었지만 실제 정책으로 실현시키려다 보니 현실과의 괴리나 재정상의 문제, 정책 조율로 포기해야 할 때도 있다. 또 어떤 경우는 공약 자체가 너무 허무맹랑해서 다시금 생각해야 할 경우도 있다.

‘공약집에 있었던 것도 아니다’라지만 공약집에 버젓이

하지만 이 경우는 다르다. 있는 사실 조차 없다고 발뺌하는 것은 한 나라의 지도자가 할 일은 아니다. ‘백지화’ 발언 보다 더 불쾌하고 대통령에 대한 신뢰를 떨어뜨리는 것이 바로 없다고 한다고 해서 없어지지 않는 ‘팩트’의 문제다.

안상수 한나라당 대표 아들의 서울대 로스쿨 부정입학 의혹이 민주당에 의해 제기됐을 때 진보 지식인으로 분류되는 조국 서울대 교수가 한 말이 있다. 로스쿨 내부자인 조 교수는 부정입학이 아니라는 근거를 제시하며 “안상수는 밉더라도 팩트는 팩트다... 정치가 공방 수준에 머물 때 팩트는 최고의 선동이 될 수 있다”라고.

이 대통령이 미처 공약을 기억하지 못했을 수도 있다. 그렇게 믿고 싶다. 하지만 세종시 문제로 한 번 뜨겁게 덴 충청권 민심과 여론은 이를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 청와대측도 이 부분에 대해서는 설명하지 못하고 있다.

백지화 발언보다 공약 부정이 더 불쾌하고 신뢰추락

그래 이 부분은 그렇다고 치자. 하지만 현 정부는 세종시 수정안을 내놓았을 때 세종시에 과학벨트를 넣는 것을 제시했다. 이유는 세종시에 자족기능을 강화하기 위해서라는 설명이 따랐음은 물론이다.

또 국토연구원과 과학기술부는 세종시가 과학벨트의 최고의 입지라고 낯 뜨거울 정도로 강조했다. 그런데 이제 와서 그것이 바뀌었다는 말인가. 아니면 세종시 수정안을 관철하기 위한 조작이었다는 것인지 자가당착도 이런 자가당착이 없다. 대통령과 정부 스스로 신뢰를 떨어뜨리는 일이 아닐 수 없다.

세종시에 이은 대형 공약 백지화로 또 다시 충청권 여론을 들끓게 하고 있는 국제과학비즈니스벨트(과학벨트)의 입지는 4월 중 결정될 것으로 알려졌다. 당초 법 발효에서 입지선정, 기본계획 확정 등의 절차를 밟는 데 석 달 가까이 걸리리라는 예상으로 상반기 중에 마무리 짓겠다는 방침에 비췄을 때 속전속결이다.

청와대는 “불필요한 논란이 벌어지고 있기 때문”이라고 이유를 설명했지만 불필요한 논란은 청와대에서 먼저 지폈다. 왜 나만 미워하느냐는 아이들 말처럼 왜 충청권만 갖고 그러는지 모르겠다.

세종시가 과학벨트 최고의 입지라던 정부의 자가당착

충청권에 대한 공약 흔들기는 이제 그만큼 했으면 됐다. 이집트 로제타 혁명을 이끄는 구호 “무바라크 키파야(충분하니 이제 물러나라는 뜻의 아랍어)가 절로 떠오를 지경이다.

세종시 만으로도 충분하니 더 이상 충청권의 인내심을 시험하지 않았으면 좋겠다. 이 대통령이 “공약을 지킬 것”이라고 밝히지 못하는 이유는 “법 절차 때문”이라는, “과학벨트를 ‘제2의 세종시’로 보지 말라”는 청와대 참모들의 말을 정말로 믿고 싶다. 그러기에는 세종시로 인한 트라우마가 너무 크지만 말이다.

그런데 이번에도 정운찬 전 총리와 같은 ‘전도사’가 등장할까 겁난다. ‘과학벨트 문제’가 ‘세종시 문제의 재판’이 될 것이라는 예측이 현실로 드러나며 빚어지는 불안감에 겹쳐지는 ‘충청권 흔들기의 추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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