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30년간 동네 쓰레기 줍고 다니는 김성문옹

   
30년간 동네를 돌아다니면서 쓰레기를 줍고 있는 김성문옹. 사진 촬영을 위해 쓰레기를 찾았으나 일대에는 보이지 않아 낙엽으로 대신했다.<중구청 소식지 제공>
“나는 바보여” 30년간 쓰레기만 줍고 다니는 김성문(74)옹이 말문을 열었다. 김옹은 매일 새벽에 일어나면 그가 사는 대사동 영진아파트 주변의 담배꽁초 등 쓰레기를 줍는 것으로 하루 일과를 시작한다. 김옹은 대사동에서 중구청 맞은편의 김옹의 사무실인 부흥실업(대부업)까지 출근길에 쓰레기를 줍는다. 그리고는 하루에도 몇 번씩 주변을 돌며 쓰레기를 줍거나, 무단 방치된 쓰레기를 분리수거하여 환경미화원이 수거해가도록 정리해놓는다.  

주위사람들은 나이도 많은 김옹의 솔선수범을 만류하기도 했다. 그러나 김옹은 인생철학이 확실하다. “내가 조금 손해 보면 상대방이 편해진다”는 것이다. 김옹이 쓰레기를 줍게 된 계기는 30년 전 보문산에서 만난 한 재일동포 할아버지 때문이다. 그 교포 할아버지는 한숨을 내쉬면서 ‘내가 조국이라고 한국을 지금까지 7번이나 왔는데, 이제 다시는 오지 말아야겠다”고 말하는 것을 들은 당시 40대 중반의 김성문씨는 왜 그러시냐고 정중히 물었다. 교포 할아버지는 “각종 오물과 가래침으로 너무 더러워서 전염병에 걸릴 것 같다”며 “일본에는 이렇게 더러운 곳이 없다”고 말했다.

얼굴이 화끈 달아오른 김씨는 쓰레기를 주으면서 “그래도 한국에 와야죠”라고 간청했다. 그 교포노인은 “젊은이를 생각해서 한 번 더 한국에 오지”라고 대답했다. 공주 우성면 우성리가 고향인 김옹은 9남매의 막내로 어렵게 살다가 12세 때 고향을 떠나 숱한 고생을 하며 살았다. 다리 밑에서 가마니를 덮고 살았던 시절은 지금도 잊지 못한다. 교만한 마음이 들 때마다 “올챙이 시절을 생각하자”며 자신을 다독인다.

김옹은 일생 세 가지 원칙을 갖고 산다. 첫째, 거짓말을 하지 말자. 둘째, 시간을 지키자. 셋째, 돈을 빌리지 말자. 지금도 고생을 모르는 젊은이들에게 ‘이틀씩 굶어봤냐, 빚쟁이 10~20명씩에게 당해봤냐, 다리 밑에서 가마니 덮고 자봤냐’를 물어본다. 김옹은 “배고픈 사람이 배고픈 사람을 이해하고, 어려움을 당한 사람이 어려움을 당한 사람을 이해한다”고 역설했다. “요사이 한국이 잘 살게 된 것도 일제시대 혹독한 체험을 한 조상들의 덕분”이라며 “돈 좀 있다고 좋은 것 입고 거들먹거리며 관광 다니는 것”을 질타했다.

“요즘 사람들은 돈버는 기술은 가졌으나, 돈 쓰는 기술은 갖지 못했다”며 2남1녀의 자녀들에게 ‘하루 한 시간씩 자원봉사해라’ ‘수익의 5%는 좋은 데 써라’ ‘술, 담배 먹지 말고 그 돈을 좋은 데 써라’ ‘쓸 줄을 모르면 우체국의 남돕기 통에 넣어라’고 가르친다. 김옹은 또한 “내가 어려웠을 때 남이 나를 도와주지 않았더라면 내가 이 자리에 있지 않았다”며 남 돕기를 실천하고 있다. 주말에 김옹은 목척교나 대전역 주변의 노숙자 곁에 가서 몰래 봉창에 몇 천원씩 넣어주고 온다. 그 돈은 일주일에 두 번 점심을 굶어서 만든 돈과 노인수당 9만원으로 마련한다.

“지나친 욕심이 화를 부른다”며 대학교수인 막내딸이 간호학과 대학교수로 재직하는데 “환자들에게 부모보다도 더 잘해드리라”고 말한다는 김옹은 자신명의 재산은 한 푼도 자식들에게 안 주고 사회에 환원하겠다는 의지를 밝혔다. 7가지의 병을 가지고 살아 조금만 휴지를 주워도 허리가 아프지만 사는 날까지 세상의 은혜에 보답하는 마음으로 쓰레기를 줍겠다고 생각하니까 건강도 좋아지는 것 같다고 웃으며 말했다.

김옹을 취재하면서 또 한 분의 도인을 만난 기분이다. 김성문(金聖文)옹은 물질만능의 살벌한 생존경쟁 시대에 한줄기 빛이었다. 진정 세상을 달관한 철학가이며 인생고수가 우리 주위에 존재한다는 사실이 행복하기만 하다. <신도성 중구소식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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