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7년 부도 뒤 호주서 자살 생각..."목공 동호회 활동에 행복"

   
10여년 전 부도를 맞아 공중분해 된 영진건설의 이종완 전 회장.  지금은 유성문화원 뒤편에서 목공소를 차리고 목공예 동호회 활동을 하고 있다.
95년에 부도가 나고 97년에 파산신청을 하면서 공중분해 된 영진건설. 없어진 지 이미 10년이 지났건만 영진 아파트와 중앙로 지하상가가 아직까지 하자가 나오지 않을 정도로 시멘트와 철근 등을 아끼지 않고 쏟아부었던 진정한 쟁이 들의 건설사였다.

이 영진건설의 수장이면서 지역 경제인들의 정신적 지주였던 이종완 회장(75).

유성문화원 뒤편에 자리한 취봉 목공예사에서 만나 그동안 하지 못했던 이야기, 하고 싶었던 이야기를 풀어 냈다.

이 전 회장은 “어떻게 나를 알고 찾아오게 됐어? 이미 오래전에 잊혀진 사람인것을...”라며 말문을 열었다.

취봉 목공예사는 이 전 회장의 호를 따 목공예 DIY를 하는 곳이다. 하루의 대부분 시간을 이곳에서 자신이 기획한 20kg짜리 쌀 뒤주를 만들고 있다. 일본에서 생산되는 편백나무(히노끼)로만 만든다. 피톤치드가 가장 많다는 편백나무의 향이 쌀을 오래도록 보존해 준다.

그는 “내가 회사 운영을 제대로 하지 않고 사기치거나 부정한 방법으로 경영을 해왔다면 지금 대전에서 이렇게 살 수 없었을 거야. 또 어떻게 알았는지 예전에 인연이 있는 사람들이 곧잘 찾아 오곤해”라고 근황을 소개했다.

기자가 앉자 마자 그는 가장 먼저 영진건설의 부도 이야기를 꺼냈다.

“95년에 첫 부도가 나고 97년에 파산신청을 했다. 그런데 법원에서 법정관리를 하도록 지시할 정도로 인심을 잃지 않았지만 더 이상 움직일 수가 없었다”고.

파산 신청하면서 6개 자회사들이 날아가고 가장 안타까운 것이 골프장을 잃은 것이다. 그는 "내가 지금 골프를 치지 않는데, 어찌 해서 골프장에 갈 기회가 있었어. 지금도 근무하는 당시 직원들이 현관 앞에까지 나와서 반겨주는데, 코끝이 징~ 하더만"라고 말했다.

영진건설은 95년에 첫 부도가 나면서 수주도 못하고 있는 사업만 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다 2년 후 외환위기의 어려움 속에서 파산하고.. 이 회장은 99년에 이렇게 살아서는 안되겠다 죽자는 생각으로 호주 멜버른으로 갔다.

   
기계로 뒤주의 지료가 되는 편백나무를 자르는 이 전 회장.

"아무도 모르는 먼 곳에서 물에 빠져 죽던 어떻게 죽으면 내가 누군지도 모르니까 여기 있는 다른 사람들에게 피해도 안줄 거 같았다"는게 이유였다.

하지만 호주에 있던 3년 동안 인생을 다시 배워서 돌아왔다.

당시를 회상하며 이 전 회장은 "97년도인가 부산 최대 백화점의 회장이 부도가 나면서 자살한 사건이 있었는데, 그만큼 부도가 나면 경제인들은 죄인이다. 그래서 아무것도 못하고 쓸쓸히 잊혀지는 것이다. 결심하고 영어가 짧지만 전자수첩 하나 들고 무작정 호주로 갔다. 죽으러"라고 말했다.

그 곳에서 단칸방에 세들어 살면서 운동화 신고 배낭 메고 수퍼에 가서 반찬을 사다가 밥 해먹으면서 책을 읽었는데, 그 책 안에서 새로운 삶을 찾았다.

일본의 경제학자 이이다 후미히꼬가 전세계의 정신과의사들이 겪은 전생치료와 관련한 자료들을 묶어 펴낸 ‘환생의 과학이 인생을 바꾼다’는 책이었다.

이 책은 전생에 겪었던 일 때문에 지금의 인간관계가 설정된다는 것. 사이 안 좋은 모녀사이가 전생에 삼각관계에 빠져 서로 미워했었다는 것 등이다.

이 책을 읽고 그는 “회사 돈을 떼먹은 사람들을 괘씸하게 생각했는데, 내가 전생에 돈을 떼어먹어서 그런것이다는 생각을 하니까 스트레스도 받지 않고 마음이 편해졌다”면서 이 책을 권했다.

또 읽은 책이 ‘전생을 기억하는 아이들’이었다. 이 책을 열 번 읽으면서 마음을 가라 앉혔다.

그는 고통을 받고 있는 사람이 있으면 주려고 책을 찾아봤지만 이미 절판이 되어 있어 출판사를 찾아가 100권을 사비로 제작해 사람들에게 나눠 주었다.

2002년 월드컵 당시 돌아온 그는 먼저 컴퓨터를 배웠다. 충대 동문인 교수가 컴퓨터 쓰는 법을 가르쳐 주었고 가장 하고 싶었던 노래를 다운받는 법도 배워서 운전할 때마다 음악을 틀어놓고 따라 부르고 있다.

그 다음 관심을 가진 것이 목공예. 나이 70이 넘어서 새로운 것에 도전한다는 게 쉽지는 않다. 하지만 건축을 전공으로 했기에 목공이 어렵지 않았고 기초와 전문가 과정을 거치고 유성문화원 뒤에 취봉목공예사를 차렸다.

   
20kg이 들어가는 뒤주는 피톤치드가 가장 많은 일본산 편백나무(히노끼)로 만든다.

“모든 욕심을 버렸다면 부처님이고, 예전엔 100이었다면 지금은 30, 40 정도로 내려갔다. 지금은 취미생활하면서 하루 하루 사는 것이 정말 행복하다. 부인과 함께 반찬거리 사러 나오는 것도 재미있다. 예전에는 너무 바빠서 꿈조차 꾸지 못하는 것이었다”고 말했다.

사실, 대전상공회의소 회장을 하면 30여개 단체의 회장으로 추대가 된다. 하루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모를 정도로 바빴다. 또 민간인으로는 처음으로 지역 기관장회 회장을 맡으면서 정치권과도 연결이 됐다.

당시 도지사인 심대평 대표나 홍선기 대전시장은 모두 고등학교 후배기에 충남도하고도 잘 지낼 수 있었다.

하지만 모든 것에서 떠나 버린 지금은 한 달에 한 번 대전고 출신 언론인들이 주축이 된 퇴직언론인 모임에 나가는 것과 행정중심복합도시 보상추진협의회 위원장직을 맡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그는 “예전에는 남에게 주는 것이 습관이 되어 있어서 받는 것은 많이 어색하다. 또 주는 것도 다 잊어 먹었는데, 그럼에도 예전에 신세를 졌다면서 찾아와 감사 인사를 하면서 봉투를 건네는 사람들이 있어요. 내가 가진 것 없이 이렇게 살고 있어도 행복한 이유가 여기에 있어. 나를 잊지 않고 있다는 것에 감사하며 살아요”

두시간 남짓 가진 인터뷰 동안 언급된 인사들만 따져도 30여명 가까이 됐다. 당시 정계, 재계, 법조계, 학계, 경찰 등 수 많은 인사들과 친분을 쌓았던 이 전 회장.

새로운 삶을 산다는 것에 감사하며 오늘도 나무를 깍고 있다.

이종완 전 회장 손전화 011-434-5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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