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남지사 후보탐구-③박태권]문체부 차관,충남지사...JP돌풍 뚫어

 박태권 전지사는 디트뉴스가 연재하는 충남지사 후보탐구의 게재순서에 이의를 제기해왔습니다. 디트뉴스는 정치권 관례인 다수당, 국회의원 당선횟수를 기준으로 박상돈 의원(열린우리당), 이완구 전의원(재선), 박태권 전충남지사(초선) 순으로 게재했음을 밝힙니다. 또한 반론권을 보장해 본인들의 소명을 적극적으로 반영했습니다. 그러나 박전지사는 소명에도 응하지 않고 보도도 원치 않는다고 밝혔습니다. 이에따른 책임도 디트뉴스에 있음을 알렸습니다. 그럼에도 디트는 ‘알권리’ 차원에서 박전지사의 후보탐구를 게재하며, 앞으로 출마를 공식화하는 후보들에 대해서도 연재할 계획입니다.<편집자 주>

박태권 전충남지사
 박태권 전지사(59)는 충남지사 후보군으로 가장 먼저 부각됐다. 심대평 충남지사의 3선 연임제한으로 무주공산이 된 충남지사를 놓고 한나라당을 제외한 열린우리당, 자민련, 신당세력의 출마후보군들이 아직 수면아래 있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한나라당 내에서는 공식,비공식적으로 뒤늦게 출사표를 던진 당내 이완구 전용학 전의원과는 2강 1약의 3파전 경합이다. 두차례 여론조사에서 박전지사는 이전의원과 앞서거니 뒤서거니 순위다툼을 벌였다. 대전일보 창간 55주년 여론조사에서 박전지사는 지지율 1위(11.5%)를 기록하며 2위 이전의원 (7.4%)를 따돌렸으나 월간조선 8월호에서는 2위 이전의원(7.3%)에 뒤진 3위(6.8%)로 쳐졌다.

 박전의원은 독재군사정권에 맞선 민주화 운동의 주역으로 충청권 민주세력 결집에 지대한 역할을 했다. 당시 민주화 운동을 이끌던 정치인 중 충청권에서 활동하고 있는 현역 정치인은 몇 되지 않는다. 

 □도지사가 될만한 장점 5가지

 △민주화 운동(1)...JP 돌풍에 맞서 서산에서 국회의원 당선

 박전지사는 군사독재에 맞서 민주화 운동을 주도했던 민추협에서 동고동락하면서 문민정부의 산파역을 맡았다.

 당시 연금상태였던 YS와 망명중이었던 DJ가 민추협을 발족할 때 참여해 YS와 인연을 맺었다. 민추협 출판문화국장을 지내기도 했으며 YS의 사조직인 민주산악회(민산) 서산지부장을 맡아 충청권 민주청년 세력을 결집시켜 나갔다. 그러나 87년 대선에서 YS와 DJ가 야권후보 단일화에 실패, 정권창출은 좌절됐다.

 대선 이듬해인 88년 13대 총선에서 박전지사는 JP가 미국에서 귀국해 창당한 신민주공화당의 거센 돌풍이 휘몰아치는 가운데서도 서산태안에 출마해 당선되는 저력을 보여줬다. 24개 지역구 가운데 박전지사와 민정당 김현욱(당진) 이긍규(서천), 민주당 황명수(아산), 무소속 유한열(금산) 만이 자민련 돌풍을 뚫었다.

 △민주화 운동(2)...헌정사상 첫 문민정부 탄생 밑거름

 충청도에 민주당의 교두보를 마련한 박전의원은 광주특위 위원, 민주당 원내부총무, 민자당 정책운영실장 등을 맡아 의정활동을 펼쳤다. 정부의 특혜속에 충남서산 천수만의 간척으로 막대한 이익을 얻었으나 피해농민 5천세대에 적법 보상을 하지 않은 현대건설에 재보상할 것을 국회에 청원, 결국 이를 관철시켰다. 당시 정책활동을 담은 ‘천수만의 밀물과 썰물’을 발간하기도 했다.

 또한 농수산물의 원활한 유통을 위해 정부가 설립한 농수산물 유통공사의 자회사인 한국냉장이 노량진수산시장을 인수하면서 수산시장의 변호사비와 추징금 벌금 등 37억여원을 대납한 사실을 추궁, 전국적 주목을 받았다. 1988년 광주사태청문회에서는 전두환의 압력에 의해 계엄을 선포하였던 이희승 계엄사령관에게 '허수아비'라는 호칭을 붙여서 당시 유행어를 만들기도 했다. 

 97년 14대 총선에서 낙선한 박전지사는 최형우 전내무장관이 회장으로 있던 민산 본부장을 맡아 ‘YS 대통령 만들기’에 지대한 공을 세웠다. 최전장관과는 동국대 동문으로 직계다. 대선후보 경선에서 YS는 민정계의 이종찬(JC)과 맞붙어 고전하고 있었다. 이때 박전지사는 친 이종찬계로 쏠려 있던 충청권에서 전세를 역전시켰다. 박전지사의 뚝심이 YS정권탄생의 밑거름이 됐다.

 △초대 문화체육부 차관 발탁.... 꼼꼼한 충남도지사

 ‘YS대통령 만들기’에 결정적 공을 세운 박전지사는 YS정권 출범 첫 내각에서 초대 문화체육부 차관으로 파격 발탁됐다. 당시 언론들은 프로필에서 “말수가 적으나 맡은 일은 빈틈없이 마무리하는 성실형”이라고 소개했다. 박전지사는 차관시절, 박찬호 선수가 병역문제로 미국 메이저리그 진출이 좌절될 뻔했으나 직접나서 해결했다.

 사상 첫 지방자치단체장 선거를 앞두고, 박전지사는 충남도지사로 전격 임명됐다. 충남도 관계자들은 “비록 짧은 재임기간였지만 각 지역현안, 내부살림 형편, 충남의 장기발전계획, 행정업무의 흐름 등을 자세히 파악하고 꿰뚫고 있던 꼼꼼한 도지사였다”고 박전지사를 기억하고 있다.

 △민주산악회의 저력....심대평 충남지사와 맞서 30% 득표

 지난 2002년 충남도지사에 출마, 심대평 자민련 후보의 3선연임 저지에 나선 박전지사는 25만 1,005표(33.0%)를 얻어 석패했다. 심지사는 50만 8,796표(67%)를 얻어 3선연임에 성공했다.

 박전지사는 당선에 실패했지만 98년 도지사 선거에 나선 한나라당 한청수 후보가 얻은 11만9,216표 보다 두배 이상의 득표를 끌어올렸다. 기대이상의 선전였다. 민산 시절부터 동고동락하며 맺어진 끈끈한 정과 조직력이 이같은 선전에 큰 보탬이 됐다는게 언론의 평가다. 민산은 YS정권을 탄생시킨 이후 세력이 크게 약화됐지만 지난 92년 대선당시 전국 313개 지부에 3백만 회원을 확보할 정도로 YS정권창출에 막강한 버팀목이었다.

 심대평 후보가 박전지사를 누르고 승리했지만 자민련은 충북과 대전에서 패배, ‘충청권 맹주’ 자리를 내주었다. 한나라당은 비록 충남도지사 자리를 자민련에 내주었지만 대전시장을 차지하는 등 충남의 기초단체장 선거에서 크게 약진했다.

 △충남지사 역임과 출마.... 준비된 도지사

 박전지사는 충남도지사에 출마하면서 7대 핵심공약을 내걸었다. 충남도의 현안인 도청이전을 약속했다. 신축되는 도청과 그 주변을 古都의 품위를 지닌 친환경적인 한옥타운으로 건설해 관광메카로 건설할 것을 밝혔다. 또한 충남도의 공직자 여성비율이 전국 최하위라며 여성 정무부지사 임명을 공약했다.
 
 서해안 시대에 대비해서는 경비행기,헬기, 여객선 등 참단 교통환경망을 통해 최첨단 산업인프라 구축을 약속했으며, 천안아산에 경륜장과 국제 레저스포츠레저 타운을 건설해 수도권의 여가 인구를 유치하겠다고 밝혔다. 이외에도 농산물을 특화브랜드화 시키고 독거 저소득층 노인을 위한 실버타운 건설 등의 비전을 제시했다.

 □도지사가 안될 3가지 약점

 △정권잡자 마자 신분 수직상승....“YS 정실인사 수혜자”

 'YS대통령 만들기'의 선두에는 민산이 있었고, 정권을 잡자마자 이들 핵심 멤버는 그야말로 눈부실 정도로 관직 진출에 성공했다. 박전지사는 YS 정권이 출범하자 46세의 나이로 문화체육부 차관에 발탁됐다. 당시 언론은 “행정경험이 거의 없는 민주계 출신이 정실인사에 따라 요직을 독점한다”고 비판했다.

 박전지사는 동국대를 졸업한뒤 민추협과 YS의 사조직인 민산과 인연을 맺기 전까지 대열요업(주) 운영본부장과 ‘마니커’로 알려진 금하유통에서 대표이사로 근무한 것이 주요 경력이다. 민추협 출판문화국장과 민산 본부장을 맡았지만 국정운영이나 행정경력과는 거리가 먼 정치결사체다. 충남지사 임명 또한 당시 언론들은 첫 지방자치단체장 선거와 연결지어 해석했다.

 △화무십일홍(花無十日紅).... 백일천하로 끝난 충남도지사

 YS의 정권창출 일등공신으로 출세가도를 달리던 민주계는 1년도 안돼 줄줄이 낙마했다. ‘열흘 붉은 꽃 없다’(花無十日紅)이란 말처럼 민산 출신의 박전지사의 영욕도 여기서 벗어나지 못했다. 초대 민선지사가 유력하던 박전지사의 충남지사 재임은 ‘사전선거운동’의 덫에 걸려 백일천하로 끝났다.

 박지사와 충우회는 연초 서울 중국음식점 하림각에서 대규모 ‘고향의 밤’행사를 가졌다. 이 자리에는 충청출신 지역구 의원과 고위 공직자, 관내 시장군수 등 1천여명이 참석했으며 시가 5만원 상당의 장쾌삼이 선물로 돌려졌다. 이같은 사실을 안 민주당은 “초대 지방자치단체장 선거를 겨냥한 사전선거운동”이라며 공세를 퍼부었다.

 박지사측은 “공식행사에서 이뤄진 관례적인 것”이라고 항변했지만 선관위는 “선거를 앞둔 시점에서 금품을 제공하고 자신을 선전하는 듯한 인상을 준 것은 직무의 한계를 벗어나 사전선거운동의 소지가 있다”며 주의조치를 내렸다. 정치권의 거센 공세를 받던 박지사는 결국 134일만에 충남지사에서 자진해 물러났다.

 △당적바꿔 인천에서 출마...도지사는 한나라당 소속으로 출마

 박전지사는 13대 총선에서 서산태안 지역구에서 당선된 이후 13년간 세번의 국회의원 출마와 한번의 도지사 출마에서 모두 낙선했다. 당적도 두차례 변경했다. 92년 14대 총선에서는 한영수 후보에게 패했다. 이어 96년 15대 총선에서는 자민련 변웅전 후보에게 패했다.

 박전지사는 97년 신한국당 대선 후보경선에서 이인제 후보를 지지했으나 이후보의 경선불복으로 당내 입지가 좁아졌다. 결국 DJP 공동정권을 출범시킨 자민련으로 당을 옮겼다. 지역구도 서산태안에서 인천남동을로 옮겨 2000년 16대 총선에 출마했지만 물거품 됐다.

 와신상담하던 박전지사는 2002년 지방선거를 석달여 앞둔 2월 자민련 인천시지부장을 탈당해 한나라당으로 당적을 옮겨 충남지사 후보로 출마했다. 그러나 심대평 충남지사에게 25만여 표차로 패했다. 30%득표의 저력을 자신하는 박전지사는 충남지사 재도전에 총력전을 펼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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