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깨끗하게 선거운동해서 고배 마셔

″개인적으로는 성공만을 해 온 제게 또 한번 성장할 수 있는 계기가 됐습니다. 앞으로 4년 동안은 자숙과 공부의 시간이 될 것입니다″

대전광역시 서구의회 김용분 의원(40, 대전시 서구 내동)은 이번 6. 13 지방선거에서 민주당 대전시의회 의원 후보로 출마해 낙선의 쓴잔을 마셨다. 그도 믿어지지 않는 일이었고 그가 서구 의회에서 의정 활동을 하면서 수 없이 괴롭혔던 공무원들조차 그의 낙선을 일종의 파란이라며 경악했다. 김씨 역시 그 동안 마음 고생이 심한 듯 수척한 얼굴이었지만 보름여가 지난 현재는 다음 일정을 계획할 수 있을 정도로 안정이 됐다고 말했다.

그는 ″낙선에 대해 전혀 예상치 못했기 때문에 충격이 심했다. 3일 동안 맥을 놓고 울기만 했다″며 당시의 심정을 토로했다. ″지방선거기간 임박해 퍼지기 시작한 반 민주당 정서가 결정적이었다. 인물 위주, 정책 위주의 선거가 되지 못해 아쉽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 동안 앞만 보고 걸어와 내 자신을 돌아볼 겨를이 없었다. 책 한 권 제대로 읽을 시간이 없었다. ′아픈 만큼 성숙해 진다′고 4년 동안 나 자신을 채워 나갈 것이다. 지방자치를 위해 어떤 방법으로든 발 벗고 나설 것″이라며 차기에 도전할 것을 시사했다.

다음은 김용분 전 서구의회 의원과의 일문일답이다.

- 6. 13 지방선거 이후 어떤 일을 했나

″발표가 나오는 14일 새벽까지 잠을 잤다. 남편은 새벽 1시에 낙선 결과를 알았지만 워낙 곤히 잠을 자고 있어 내게 알리지 않았다. 새벽 2시가 되어서야 알게 됐다. 그날 아침 선거 사무실에 출근해 사무실을 정리하면서 그 동안 도와주신 분들에게 전화를 드렸다. 지금도 전화는 계속 드리고 있다. 또 구 의회 홈페이지와 시민단체 홈페이지를 통해 ′낙선 인사장′을 게재하고 서구 주민들에게도 인사장을 보내드렸다. 도마, 한민, 변동 시장 등을 돌며 구민들의 따뜻한 성원을 받기도 했다. 올 초부터 충남대학교 야간 행정대학원에서 지방자치학 석사과정을 밟고 있었지만 5월 이후 학교에 제대로 나가지 못해 뒤늦게 시험을 보고 리포트를 제출하며 바쁜 시간을 보냈다. 지난주 말에는 남편과 거제도로 여행을 다녀왔다. 오늘은 구 의원 퇴직자 재산등록으로 정신없이 하루가 지났다. 매우 바쁘게 지냈다.″

- 예상과는 달리 낙선을 했는데

″남편과 선거 직후 ′우리는 왜 떨어지리라고는 한번도 생각하지 않았을까′라고 말했을 정도이다. 처음에는 믿을 수 없었다. 주변에서도 믿을 수 없었던지, 결과가 나오자 울먹이며 전화를 한 사람들이 많았다. 낙선 인사장을 쓰는 내내 내가 왜 이것을 써야 하는가 이유를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선거 운동기간 발로 뛰면서 많은 사람들을 만나 보면서 당선의 확신을 느꼈었다. 언론은 물론 공무원들까지 걱정하지 말라며 당선은 그야말로 따 놓은 당상이라고 말할 정도였다. 결정적인 원인은 민주당이라는 당적을 가졌기 때문으로 해석하고 있다. 선거기간 동안 대통령의 세 아들 문제가 불거지기 시작해 반민주당 정서가 팽배했다. 또 시의원 선거의 한계점도 작용했다. 시장, 구청장 후보들은 유권자들이 모두 잘 아는 인물들이다. 구의원 역시 ′동네 일꾼′으로 유권자들이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구의원 보다 유권자 분포가 넓고 시의원을 알고 있는 유권자들은 드물다. 인물 선거가 되지 못했다는 것이다. 유권자들은 당을 보고 투표를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해석하고 있다. 비례대표 정당별 득표율에서 민주당이 12% 정도를 차지한 것에 비해 내가 얻은 득표는 31%를 차지한 것이 이를 증명한다. 낙선의 고배를 마신 한나라당 오봉길 후보측에서 ′김의원이 한나라당 표를 다 빼앗아 갔다′는 말을 할 정도였다.″

- 어떤 방식으로 선거 운동했나

″발로 뛰었다.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민주당에서는 시장이나 시군구장 후보를 내지 않았기 때문에 중앙당 차원에서의 지원은 거의 없었다. 정당 인지도도 기대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가족과 환경연합 등 시민단체의 자원봉사자들과 함께 뛰었다. 지난 두 번의 구의원 출마 때는 친정, 시댁 할 것 없이 반대했지만 이번 선거에는 적극적인 도움을 줬다. 어떤 후보는 선거 운동 전에만 1억원을 뿌렸다는 소문도 들렸고 선거 막판에 가서는 8천여만원을 더 뿌렸다는 얘기도 들었다. 그렇게 할 수도, 하고 싶지도 않았다. 내가 할 수 있는 방법은 그 동안의 활동 결과를 알리고 최대한 많은 사람들을 직접 만나는 것이었다. 연설회에서는 다른 후보들과 차별화 됐다는 평을 많이 받았다. 발바닥에 물집이 여러 번 생겼다 없어졌다. 정말 열심히 뛰었다. 하지만 좀더 열심히 했으면 바뀌었을지도 모를 것이라는 아쉬움은 남는다″

- 선거제도의 문제점을 지적하자면

″중앙 정당의 하수인을 뽑는 제도에 불과한 지방자치 선거에서 정당 공천제도는 없어져야 한다. 특히 시·구 의원 선거는 더욱 그러하다. 모두 무소속으로 출마를 시켜 정책대결, 인물 대결을 시켜야 한다. 중앙 정치에 좌지우지되는 한 지방자치의 발전은 없다. 또 현재와 같은 동시 선거는 없어져야 한다. 물론 선거비용 감소의 측면에서는 긍정적이라고 할 수 있지만 나무는 보지만 숲은 못 보는 것이다. 유권자들의 관심을 감소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투표율이 이를 보여준다. 한꺼번에 5번의 투표와 10여명의 후보자들을 검증해야 하는 일은 쉽지 않다. 선거법 강화도 음성적인 금권 선거를 조장한다는 의미에서 재고돼야 한다. 95년 지방선거에서는 출마자가 아닌 사람도 명함을 돌릴 수 있었고 유권자에게 편지도 쓸 수 있었다. 편지는 유권자들을 감동시키고 정책을 알릴 수 있는 적극적인 방법이지만 이 마저 차단됐다. 때문에 후보자들은 자신을 알릴 방법이 없어졌다. 돈이 개입하지 않을 수 없다. 또 선거 공영제를 확대해서 돈 없고 정당 없는 후보들도 입후보할 수 있게 보장해야 한다″

- 무소속에서 민주당 당적을 얻어 출마했는데


″차선의 선택이었다. 그 동안 구의회에 있으며 무소속으로써의 많은 한계를 느꼈다. 선거가 있기 전부터 자민련, 한나라당으로부터 여러번 입당을 권유받았다. 두 당은 내 이념과 맞지 않아 차선으로 민주당을 선택했다. 하지만 선거기간 동안 터져 나온 대통령 세 아들 비리 사건이 터지면서 반 민주당 정서가 커지고 낙선의 결정적인 이유가 됐다. 또 대전시장, 서구와 유성구 구청장 후보로 민주당 후보들이 나오지 않는 등 인지도 측면에서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 구의원에서 시의원으로 출마한 이유는

″네가지 이유가 있다. 첫째, 한 곳에 오래 머물면 매너리즘에 빠진다. 초선 의원이 가장 열심히 하고 그 다음은 재선의원이다. 3선 의원들의 나태함을 많이 봐왔다. 나조차도 그렇게 될까 걱정스러웠다. 두 번의 구의원 경험으로 서구에 전반에 지식을 갖고 있었고 이를 나태함보다는 시 차원으로 한 단계 높이는 것이 생산적이라고 생각했다. 둘째, 여성 지역구 의원이 한 명은 나와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 동안 비례대표 의원만 있었다. 구의원 역시 대전에서는 내가 최초였다. 여성 유권자들에게 여성도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었다. 셋째, 지역단위로 국한된 시민운동의 활동영역을 시 전체로 넓히고 싶었다. 시민들이 잘 살기 위한 것이 시민운동의 근본 목적이다. 마지막으로 개인적인 성취감이 없었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 패인은 무엇이라 생각하나

″세 가지이다. 첫째, 민주당의 당적을 가졌다는 것이다. 당시 선거기간 동안 대통령의 세 아들 문제로 반민주당 정서가 팽배했다. 차선의 선택이 이렇게 빗나갈 줄은 몰랐다. 둘째, 돈을 너무 안 썼다. 운동 기간 중 홍보물과 연설회에 대부분을 투자했다. 발로 뛰며 유권자들의 이야기를 듣는 것에 치중했다. 내 능력을 알 릴 수 있는 방법을 택했다. 하지만 그 동안 계속 되 온 금권선거의 구태의 희생양인 많은 유권자들은 자극적인 현실에 더 호감을 가졌던 것 같다. ′누구는 얼마를 쓰고, 누구는 얼마를 썼다′는 얘기가 나왔지만 그러고 싶지는 않았다. 셋째, 유권자들의 문제이다. 나를 선택하지 않은 사람들에 대한 아쉬움이 아니라 투표에 참여하지 않는 사람들이 문제이다. 투표율이 사상 최저였다. 더러운 정치, 잘못된 선거 관행을 개선하기 위해 모든 유권자들이 나서야 하지만 더럽다는 이유로 자신의 권리를 포기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물론 내 잘못이 가장 크다. 좀더 열심히 뛰었더라면 1,000표 정도는 극복했을 것이라는 아쉬움이 남는다.″

- 이번 선거로 얻은 것과 잃은 것이 있다면

″그 동안 승리만 알고 살아온 내게 교만도 없지 않아 있었다고 생각한다. 패배의 경험은 좀 더 성숙할 수 있는 기회가 될 것이다. 이번 낙선은 쓴 약이다. 아픈 만큼 성숙한다는 말을 믿는다. 또 정당 지지도가 12%인 상황에서 31%의 지지를 받은 것은 나름대로 내 능력을 인정받았다는 증거이다. 유권자들에게 희망을 느꼈다, 내가 얻은 표는 깨끗한 표라고 확신한다. 낙선의 아쉬움은 있지만 잃은 것보다는 얻은 것이 더 많은 선거였다.″

- 그 동안 구 의회에서는 어떤 활동했나

″구민들이 직접 피부로 느낄 수 있는 일들을 했다. 항상 발로 뛰었다. 아파트 옹벽에 그림 그리기와 화단 꾸미기 같은 작은 일에서 특별 위원회 활동을 하면서 지역의 문제점들을 이슈화시키는 일까지. 구민들이 더 잘 아실 것이다. 항상 민원을 들으면 ′된다′ ′안 된다′를 직접 말씀 드렸다. 불가능한 미원은 담당 공무원을 대동해 그 이유를 설명해 드렸다. 처음 공무원들 사이에 ′못 살게 군다′평이 있었지만 2∼3년 후에는 ′합리적인 사람′이라는 인식이 박혔다. 정적 관계인 공무원 팬들이 많다. 돌아가신 이현구 서구 청장님에게도 인정받았다. 얼마 전 홍시장님과 전화 통화를 했다. 홍 시장은 ′나는 나이가 먹어서 그렇지만 김 의원은 나이도 젊고 능력 있고 합리적인 사람인데 낙선한 것이 아쉽다. 당은 다르지만 참 멋진 사람′이라는 말을 들었다″

- 앞으로 어떤 일을 할 것인가

″지금까지 너무 바쁘게 살았다. 구의원을 시작한 서른 셋에서 마흔 살까지 7년간 앞만 보고 살았다. 주어진 일에 최선만을 다하며 살았다. ′난 젊은 여자다. 여자니까 잘해야 한다. 젊으니까 더 열심히 해야한다′라는 신념으로 살아왔다. 지난 7년간 헛되지 않게 살았다. 차분히 책 한 권 읽을 시간조차 없었다. 당분간은 책을 읽으며 내면을 살찌우는 시간을 갖겠다. 또 충남대학교 행정대학원에서 지방자치 석사, 박사 과정을 밟으면서 대전시의 발전 방향에 대한 학문적 접근을 할 것이다. 그 동안 서구 의회에 있으면서 시민단체 운동에 소홀했던 것이 사실이다. 남편은 시민단체에서 상근 근무라도 하라고 말한다. 고려중이다. 이웃 사람들과 수다를 떠는 평범한 아주머니도 되고 싶다. 그 동안 소홀했던 가족들에게 못 했던 정을 쏟고 싶다. 앞으로 4년 동안 한가한 시간은 되지 않을 것 같다″

- 지지자들에게 한마디

″감사의 말씀을 말로 표현할 방법이 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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