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전용사 송봉헌씨(육군일등중사) 참전수기 최우수상

6.25 참전용사가 <디트뉴스>에 글을 보내왔다. 서구 도마동에 사는 송봉헌씨(77)가 쓴 이 글은 최근 보훈청에서 실시한 참전수기 부문에서 최우수상을 수상을 받았다. 26일 시상식을 가질 예정이다.

송씨의 가족들은 “394일동안의 전투현장에서 사선을 수없이 넘나들며 기록한 내용을 그냥 파묻기에는 너무나 아쉬워 기억을 더듬어가며 작성한 글”이라고 소개했다. 송씨의 글 전문을 소개한다./편집자 주

6.25 참전용사 송봉헌씨.
먼저 그 당시 내가 소속해 있던 제13연대의 상황을 설명하고자 한다. 13연대는 경기도 파주군 파평면 화석정 부근의 임진강변에 주둔했고, 직속상관은 참모총장 육군소장 채병덕, 제1사단장 육군준장 백선엽, 13연대장 육군대령 김익열, 제2대대장 육군소령 오여택, 제8중대장 예비소령 장시우, 제1소대장 육군소위 정민기이다.

연대의 병력 상황은 제1대대가 야외연습차 출동하였고, 제2대대가 예비대대로 영내에 주둔, 그 병력 중 1/3은 휴가가고, 2/3는 외출 중이었으며, 제3대대는 38선을 방어하고 있었다. 주번계통으로 주번사령은 육군대위 박상규, 주번부관은 육군일등상사 김경옥, 주번하사는 육군이등중사 한복남이었다.

Ⅰ. 운명의 첫날... 금파리 능선 저지로 적의 진로 차단

오전 5시 비상소집 나팔 시달로 운명의 새벽이 열렸다. 이에 응한 병력은 불과 30여명이었으나 이 중에서 전투에 임할 수 있는 병력은 2개 분대였으며, 그 중에 장교는 1명도 없었고 최고계급은 육군 일등중사였고 바로 나였다. 선발된 분대에 각각 L.M.G 1문과 탄약, 개인화기를 지급한 후 3/4(쓰리궈터)를 타고 막사를 뒤로한 채 사단의 주저항선으로 구축한 엄폐호 삼각지점(고랑포와 적성으로 갈라지는)을 목표로 출발했다.

안개 자욱한 이른 아침, 전운이 감도는 금파리 능선에 이르렀을 때 전방 약 500m 시야가 안개로 잘 보이지 않아 피아식별이 어려웠지만, 대로에 양렬로 유유히 다가오는 병력을 발견했다. 부득이 이곳 능선 양쪽에 각각 L.M.G을 배치, 진지를 구축 경계하도록 하는 한편, 척후병을 보내 적정을 살피되 만약 적군이면 무조건 발사하라고 지시했다. 초조한 순간이 2, 3분 경과, 조용하기에 안도의 숨을 쉬는 찰라 총성이 울려 퍼지고 동시에 사격명령을 시달하자 이에 당황한 괴뢰군은 더 이상 접근을 못했고, 이어 일전이 벌어졌다.

집에서 자녀들에게 자신의 '6.25 사변 394일'을 설명을 하고 있는 송봉헌씨, 그는 "평화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힘을 모아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이로 인하여 적의진로를 차단시킴은 물론 13연대 예비대대로서는 참전 제1호로 6.25전사에 수록되어야 타당하다고 생각되나 그렇지 못하니 통탄치 아니할 수 없다. 돌아보건대 아찔한 것은 당시 적군이 우리병력이 2개 분대임을 알고 그대로 추격했더라면 우리는 몰살당하였을 것이고, 문산 이남까지 침공을 받았으리라 하는 점이다.

이어 속속 휴가 및 외출에서 귀대하는 병력과 수송차량으로 부대 인근 두포리 도로변은 대 혼잡을 빚었다. 제일 먼저 정민기 소대장님이 우리 진지에 도착하시어 경과보고를 듣고 난 후에 적황을 살피려고 능선에 오르는 순간 소대장님께서 적탄을 맞고 쓰러지시니 어찌 하랴?

점차 전열이 정비되어 우리는 각자 소속으로 원대 복귀했고, 이어 2개 분대를 인솔하여 사단 주 저항선으로 구축한 엄폐호가 내려다보이는 능선의 좌측에는 제1분대장 장중사에게 작전 임무를 부여하고 우측은 나와 제2분대장 노만순하사와 함께 차폐호를 파고 L.M.G를 설치 방어에 임했다.

전황은 점점 치열해져 피아의 포화소리에 자신도 의식하지 못할 정도의 초 긴장상태였지만 마음속으로는 이런 상황이 며칠만 지나면 회복될 것이라 기대하였다. 그러나 부대로 영영 귀대하지 못할 운명이었음을 어찌 상상이나 하였으랴! 남부여대(男負女戴)하여 남하하는 피난민의 아비규환, 그 비참한 모습은 목불인견이었고 괴뢰군의 38선 전역(全域) 남침이란 골육상쟁의 비극이 전개되고 있었으니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군의 사기는 충천하여 첫 저지선을 고수하고 있었다. 오후 4시경 아군 장갑차와 비슷한 괴물체가 적성방면에서 다가오는 것을 발견, 먼저 L.M.G 2문이 일제사격을 가하고 이어 105㎜ 야포와 80㎜ 박격포탄이 명중 또 명중하였으나 유유히 약 500m까지 접근 정지하여 요지부동이라 괴물체의 기능이 파괴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잠시 후 뒤에 감추었던 포신을 앞으로 향하면서 순간 발사한 포탄이 제1분대 L.M.G진지 옆에서 폭발하였고, 이에 혼비백산하여 신속히 다른 곳으로 이동하여 진지를 설치하였고 피아포격은 계속되었다.

괴물체는 전차였는데, 지나친 표현이 아니라 당시 참전한 장병 중에 전차의 실물을 본 사람이 몇이나 될까 싶다. 또 적 전차를 파괴할 수 있는 무기가 없어 이 물체만 나타나면 후퇴를 거듭하여 후일 다부동까지 가게 되었으니 그 얼마나 수치(羞恥)였는가?

Ⅱ. 후퇴 시작... 한강 표류, 금포연안 경유, 수원 도착

해질 무렵 소총중대와 임무교대 후 인근에서 야영하였고, 이때 1분대장 장중사가 보이지 않아 걱정이 되었으나 찾아오리라 생각하였다. 피로에 지쳐 숙영하면서도 예감이 불안하여 일어나 살펴보았는데 보이지 않아 전날의 진지로 가서 보니 능선 넘어 절벽 아래의 바닥에 쓰러져 있으니 이를 어이 하리요! 피로에 지쳐 깜빡 졸다 괴뢰군 인기척에 놀라 방향감각을 잃고 실족했을 것이라 짐작되었다.

그러나 괴뢰군이 절벽 8부 능선에 붙어 있으니 속수무책으로 장중사의 시신을 매장해주지 못한 것이 지금까지도 가슴이 아프다.

26일과 27일도 동일한 장소에서 작전에 임하였으나 전황은 점점 격렬해지고 아군이 불리하게 되어, 3일간의 저지선이 무너지고 후퇴해야 하는 비참한 신세가 되었다. 이를 통탄하며 법원 전투를 끝으로 28일 새벽 벽제를 경유하여 행주나루까지 오게 되었다. 그곳 연도 양측에는 구급차에 실린 장사진을 이룬 부상병이 부지기수며 아비규환으로 살려 달라고 애절하게 울부짖는 신음소리 등 차마 눈뜨고 볼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누구하나 돌보아 주지 못하는 비정함은 전시심리일 것이다. 그때의 부상병 중 생존한 전우가 얼마나 있을까?

참으로 애석하여라! 이들을 뒤로하고 강변에 도착했는데 대병력은 선박이 없어 도강을 못하고 우왕좌왕하였다. 이미 서울은 27일 괴뢰군의 수중에 있었고 한강교는 폭파되고 후퇴로마저 차단되어 진퇴양난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강을 건너지 못한 약 1개 대대병력은 인천항까지 가서 우리 해군에게 구원을 의뢰하기로 중론을 모아 한강과 임진강이 합류되는 지점까지 왔다. 그러나 묘책은 없고 이곳에서도 내무서원(인민군 경찰)이 활보하고 있으니 독안에 든 쥐새끼 꼴이 되어 신세 처량하기 그지없었다.

그러나 정식 편제는 아니지만 중화기와 개인화기로 무장된 우리는 독자적으로 싸워서 본대가 있는 곳까지 가야한다는 굳은 신념으로 단결, 권오태 대위를 총책으로 부대를 재편성, 도강작전을 수립하고 행동을 개시하였다.

이곳의 기상 특징으로 조조와 석양은 운무로 시야를 가려 강화도 연안조차 잘 보이지 않았으나 정오경은 잘 보이기 때문에 자세히 살펴보았다. 사람은 보이지 않았으나 목선이 있어 이곳으로 오도록 일제히 고성으로 2, 3차 간청하여도 응답이 없어 부득이 사격을 가하고 재차 간청을 하자 노인 한 분이 노를 저어왔다. 천지신명께서 우리를 도우심에 감사드렸다.

목선 규모가 커 1차로 소대병력이 배에 올라 출발하여 강 한복판에 이르렀을 즈음 괴뢰군의 비 오듯 퍼붓는 일제사격에 전사자가 속출했고 강물에 투신하는 병사도 있었으며, 배 한편에서 포대없는 80㎜박격포로 응사하기도 하였다.

육지와 강상의 교전의 결과는 불문가지다. 잠시 후 총성은 그쳤으나 부상입은 전우들의 신음소리도 소리이려니와 사공이 사망하였으니 어이하리오! 인명은 재천이니 운명을 하늘에 맡기고 병력을 재점검했다. 신음하던 전우들은 하나 둘씩 말이 없고(전사하고) 무사한 전우는 10여명뿐이었다. 비상식량은 이미 고갈되어 오지도 가지도 못하는 3중고 속에 조수의 힘으로 떠내려갔다 올라왔다 하던 7월 3일, 안개 자욱한 아침 천우신조로 우리 목선이 연안 10m 지점까지 다다랐다. 이제 살았구나하는 마음에 만감이 교차하고 지친 몸 가누기조차 힘이 드나 물에 뛰어들었고 수심은 1m 정도였다.

갯벌이라 육지까지 나가는데 많은 시간이 걸렸고 인근 민가에 들러 자초지종을 말하여 식사를 제공받았다. 수일간 먹지 못해 굶주린 배와 피로로 찌든 몸에 곡기가 들어가자 술에 취한 듯이 정신이 몽롱해지고 죽음에 대한 염려조차 잊고 잠이 들었다. 이때 집주인이 그 상황을 좌익에게 밀고하였더라면 어찌 되었을까? 아마도 몰살되었을 것이다.

얼마간 잠에서 깨어 보니 해는 지고 어두운데 10여명의 전우들이 있었다. 이들과 진로를 숙의(熟議)한 바 각자행동으로 소속부대에 복귀하기로 하고 해산했다.

나는 아산 출신의 이봉성과 동행하여 인천을 목표로 출발하였다. 강화도에서 김포로 가는 도로에 도착하고 보니 도로는 장사진을 이룬 괴뢰군과 전차로 한 치의 공간도 없어, 묘책으로 운명을 하늘에 맡기고 적의 대열에 접근, 휴식 중에 용변보러 갔다 오는 것처럼 가장하며 대열에 끼었다. 탈출기회를 노리며 그들과 동일행동하기 얼마 후 기회를 포착 탈출, 사력을 다하여 30여 미터를 달려 동정을 살피니 조용하기에 안심하였다. 이는 천만다행으로 괴뢰군도 어두움과 장기간의 행군으로 피로가 쌓여 피아식별이 어려웠기 때문이리라 생각되었다.

무작정 남서쪽을 향하여 달리다보니 먼동이 텄다. 그러나 현재 복장(전투복, 철모, 소총, 군화 착용)은 백주행동에 장해요인이 되기 때문에 부득이 사복으로 변장하고자 민가에 들렸다. 민가는 마치 군인이 찾아올 것이라고 예측이나 한 것처럼 의복과 도시락을 주시니 그 고마움 어디에 비할 데가 없었다. 옷이 검정 겹저고리 회색 겹바지였는데 사연인 즉 부유한 가정이라 의복은 많았으나 후퇴하는 국군에게 주다 보니 주인 옷은 없고 머슴 옷만 있었던 것이다. 고마움에 눈물을 머금고 옷을 갈아입고 군화 대신 검정고무신을 신었다. 그동안 간직했던 콤파스(방향계)를 주인에게 주며 사용법을 설명하고 만수무강과 생전재우를 기약하며 그 집을 나와 산길에 들었다. 내 모습은 걸인 모습과 같았다.

소총을 완전 분해하여 사방에 버리고 군번과 철모는 땅에 묻어버리고 나니 누가 군인이라 칭하겠는가? 처량한 신세가 된 것을 삭이며 얼마쯤 가다보니 산모롱이에 빨갱이들이 장총을 메고 행인들을 검색하는 모습이 보여 딴 방향으로 피해가려고 했다. 그러나 그곳도 같은 상황이라 정면 돌파하리라 마음먹고 다가갔다. 예상한 대로 착검한 빨갱이가 정지하라기에 순순히 응하자마자 “너 이놈 국군이구나, 이리와” 하는 찰라 그놈을 치고 사력을 다하여 50여 미터를 도주하여 뒤를 살폈다. 현재 생사불명의 이봉성은 어디 간 데 없고 사격을 하기에 ‘네 놈이 쏘는 총에 맞을 내 아니다.’ 라고 다짐하며 길을 재촉, 석양에서야 부평 인근에 다달아 잠시 휴식하고 목표지점을 예상하며 이곳저곳을 가보았으나 허탕만 쳤다.

해는 지고 어두운 가운데 대로를 따라 가는데 “암호!” 수하(誰何)하니, 어찌 암호를 알 수 있겠는가? 대답을 못하고 우물쭈물 하니까 “손들어” 하기에 이에 순응하니 “괴뢰군 선발대로구나” 하며 어두운 창고에 가두었다.

갇힌 채로 있다 정신차려 동정을 살펴보니 이곳이 아군 헌병대 영창이고 이미 많은 무리가 심사대기 중이었다. 신원 미상자는 즉결처분한다고 하여 안심이 되었으나 익일 심사차례가 되어 대면하니 군번, 계급, 성명, 소속부대, 직속상관 관등성명, 전투지역 후퇴경로, 도강 못한 사유, 6月28日 이후 경위, 군장비 미 보존 사유, 군신분 망각에 대한 소감 등을 심문하기에 정확히 대답하니 저쪽으로 가라했다.

그곳에 가보니 십여 명이 두려움에 떨고 있어 이곳이 즉결처분 대상자 들로 분류된 장소라는 직감으로 때만 기다리고 있을 즈음 호명을 받았다. 그 순간 ‘천신만고 끝에 이곳까지 와 죽는구나!’ 생각하니 만감이 교차하고 눈물이 쏟아졌다. 이 기막힌 순간 ‘어이하리요!’ 헌병을 따라갔다.

그러나 내가 따라간 곳은 뜻 밖에 헌병대 사무실이고 내가 모르는 헌병이 미소로 자리를 권하여 응했다. “나도 13연대 출신이고 송중사는 나를 모르나 나는 잘 알고 있다.” 하며, “내가 용변보러 간 사이 1사단 실정을 모르는 헌병이 송중사를 심문한 서류를 보고 오심임을 알고 오라고 했으니 안심하라.”고 했다. 그 헌병은 개인장비를 지급하고 심사 완료된 병사들을 수원까지 인솔하도록 배려해 주었다. 그 고마움 잊을 길이 없다. 수인사(修人事)도 못한 채 1개 소대 병력과 나는 트럭에 승차하여 수원을 목표로 출발했다.

그날이 7월 5일, 피난민 대열의 아우성과 장사진으로 가는 데 지장을 받아 많은 시간이 걸려서 수원역에 다다를 무렵, 지금까지 본 적이 없는 Z기의 기총소사로 혼비백산했다. 최근까지도 탄흔이 남아 있어 이를 보면 과거를 회상하게 된다. 그때 그 Z기는 적기가 아니고 처음으로 출격하는 호주산 F80Z기로 피아식별이 어려워 시계 내에 운집한 군중이나 자동차를 무조건 사격하여 아군의 피해가 많았다.

그 와중에 본대를 찾아 갔으나 오폭으로 김익렬 연대장님은 부상 후송되고 부연대장님은 전사하였다고 했다. 모두가 침통한 분위기 속에서 대공(對空)표시로 궁여지책으로 백색광목을 사용하였으나 별효과를 보지 못했다. 전날 용인전투에 참가한 노만순 하사는 99식 소총 조작이 미숙한 부하를 배려하여 부하의 소총과 자기의 M1소총과 교체해주었다. 그러나 노하사는 99식 소총으로 공격하다 작동불능으로 전사하였다고 한다. 애석했다.

Ⅲ. 후퇴 전투... 15연대로 재편성, 특공대 활약, 낙동강 전투

수원에서 부대를 재편성하였는데 13연대가 아닌 15연대 1대대로 편입되었고 연대장은 최영희 대령, 대대장은 김진휘 소령, 4중대장은 김옥산 대위, 소대장은 김갑진 중위였다. 오산까지 가서 열차로 충주에 도착했는데 날은 어두웠고 나에게는 특공대를 인솔, 동량 부근에 있는 적전차를 파괴하라는 임무가 부여되었다. 이에 따라 수류탄으로 무장한 사병 12명이 출발에 앞서 대대장님께 신고를 하는데 “잘 다녀 오라.” 하시며 대대장님은 옆으로 돌아 서셨다. 사지에 자식을 보내는 어버이 심정이어서 그랬을 것이다.

죽음을 안고 목적지 동량 부근에 도착, 적정을 살폈는데 너무나 조용하기에 오정보라고 생각되었고 그곳에 가보니 음력 5월20일 달에 비친 현장에는 전차 흔적만 있어, 이미 철수하였다고 판단, 즉시 되돌아서 길을 재촉했다.

‘살아서 귀대하는 대원들의 마음은 똑 같았으리라.’ 이름하여 인명재천인 것이다. 가다보니 7월 6일 해는 중천에 머물고 농부들은 모심기에 열중인데 그 정경 나와 비교가 되리요! 허기진 배를 부여잡고 얼마쯤 갔을까, 농부들이 새참에 동정을 베풀어 주어 그 얼마나 고마운 지 꿀맛 같은 밥으로 배를 채웠다.

이제 갈 길이 막막했다. 무작정 남쪽으로 가다보니 괴산에 도착, 본대와 다시 만나, 미원, 보은, 상주를 경유, 함창 전투에 특공대로 참가하여 처음 백병전을 경험했다.

수원 재편성시 비로소 나는 1소대 1반장으로 보직을 받았고, 동시 소총 중대에 배속되어 낙동강 전투에 임하게 되었고 진지구축은 구미가 건너 보이는 강변에 L.M.G 2문을 거의 수면에 닿을 정도로 배치했다. 인근에 수박밭이 있어 음료수 대신 음용하기도 했다.

지형상 강폭이 가장 좁은 곳으로 괴뢰군이 필사적으로 도강을 시도하였으나 아군의 폭격에 적의 시체가 강에 쌓여 물은 피 빛으로 변하고 흐름이 일시 중단되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적군이 인해전술을 구사하여 이 방어선이 무너지고 인동을 경유하여 대한민국 최후 보루인 다부동 전투에 참가했다. 이는 한국 전사에 격전부대로 유명한 백선엽 장군이 지휘한 보병 제1사단이 전투한 곳이다.

Ⅳ. 최후 보루 다부동전투 수행...
 최초 부상, 처참한 유학산 전투, 몇 몇 사건들

나는 대대 O.P 인근 유학산이 올려 다 보이는 곳에 엄폐호를 구축, 방어 및 지원사격 임무를 수행했다.

당시 유학산은 주간에는 아군공격으로 아군진지가 되고, 야간에는 괴뢰군공격으로 적진지가 되고 이런 피아전투가 무려 10여회 계속되었다. 1회 전투에 투입되는 소대병력이 전사 및 부상으로 작전 후에는 생존자가 10여 명 불과하므로 매일 신병 보충이 있었다. 유학산에서는 지상과 공중 전투기와 직접 교신이 되었다. 여기에서 최초로 U.N군 전차도 목격했으며, 제1차 현지임관 및 전시사병 진급이 있었다.

적의 직사포격으로 나는 1차 부상을 입었는데 가슴과 팔에 파편이 박혀 응급조처를 받고 정상 근무했다. 초등학교 동창생인 김직춘이 8월15일 육군준위에서 육군소위로 진급하여 제1중대 소대장으로 부임, 고지탈환 작전 때에 공격 중 다리에 관통상을 당했다. 그러나 그는 개의치 않고 연락병 M.1소총에 의지한 채 고지탈환을 하는 순간 괴뢰군의 수류탄 투척에 산화하였다고 한다. 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시신이 풍비박산 되어 이를 수습하지 못하였으니 말이다. 이렇게 전사하여 그는 자손이 끊어지게 되었다.

다부동 전투가 얼마나 격렬하였던지 수차례 주간에는 아군진지가 되고, 야간에는 적진지가 되는 전투로 과장이 아닌 그야말로 300고지 유학산이 산화한 골육과 분쇄된 암석과 초목 등으로 본래의 형상은 사라지고 보기 흉한 몰골로 변했다. 특히, 이동할 때나 엄폐호를 구축할 때 시신이 부패되기 전에는 군화나 삽 또는 손에 살점이 달라붙고 부패된 후에는 여기서 발생하는 악취로 처음에는 주먹밥도 먹지 못했다.

신병보충과 관련하여 어느 날 김진휘 대대장님이 백선엽 사단장님께 병력보충을 상신하였으나 거절되자 “그러면 우리는 육탄 공격합니다!󰡓하시며 수화기를 내팽개쳤다. “O.P 전요원은 현재 군장으로 집합하라!”는 명령에 박격포, L.M.G M.1 칼빈, 기관단총, 수류탄 등으로 무장한 전 장병이 이에 응했다. “우리는 저 앞의 고지를 기필코 탈환하여야 하며 살아서 못 오는 최후임을 각오하고 나를 따라라!” 하시며 앞으로 나가자 따르지 않은 자가 없었다.

출발한지 얼마나 되었을까 대구방향에서 일단의 차량이 먼지를 날리며 급속도로 달려오고 이어 “보충 병력을 인솔하고 왔으니까 공격을 중지하라!”는 사단장님의 명령에 원위치로 복귀했다.

이곳에서 몇 가지를 회상하고자 한다.
첫째, 김진휘 대대장님의 전우애다. 대대장님은 공격을 명령한 직후부터 그 작전이 종료될 때까지 쪼그리고 앉아 쌍안경에서 눈을 떼지 아니하셨다.

둘째, 괴뢰군 다발총의 무력함이다. 나구성 전우는 고지탈환 작전 때에 복부에 십여 발의 총상을 입었음에도 며칠간의 가료로 정상 회복되어 참전하였다.

셋째, 병사의 자해행위다. 백주에 척후근무지 방면에서 총성이 나고 이어 다리에 관통상 입은 부상병이 와서 응급처치를 받은 후 후송된 지 얼마 안 되어 또 다시 총성이 났다. O.P요원이 수색차 긴급히 현장에 출동하였는데 이상은 없고, 앞서 부상병과 동일한 다리에 총상입은 병사가 왔다. 이를 이상하게 여겨 상처를 정밀검사한 결과 자해행위로 판정되었다. 사연인 즉 이들은 학도병이었으며 죽음에 대한 극도의 공포심에 현지를 탈출할 묘책으로써 서로 상대방 발에 총을 쏘기로 약속하고 실행했다. 그런데 먼저 총상입은 부상병은 도저히 총을 쏠 수 없었고 마침내 후송되고 나머지 학도병이 홀로 남았는데, 그가 강박감에 자기의 발등에 총을 쏜 것이다. 이로 인하여 그는 인근 교정에서 대병력의 주시 하에 즉결처분을 당했다.

끝으로, 개인신상에 대한 회고다. 전시에 직속상관의 불행(연대장 부상,부연대장 전사)으로 타부대에 편입되었는데 이것은 대단히 서러운 일이었다. 고아신세와 같았으며, 그때 천대받은 것을 잊으려 해도 지금까지 잊혀지지가 않는다. 이유는 평상시에는 엘리트로 인정을 받아 보직이며 정규 진급시 우선순위에 올랐는데, 편입된 하사관이라는 이유로 선임 후임 관계없이 무보직이었고 이등상사 진급에도 누락 되는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Ⅴ. 신령(경북) 전투와 팔공산(대구) 전투 수행

다부동전선이 교착상태일 때 동부전선의 괴뢰군은 신령을 공략했고, U.N군에 다부동전선을 인계하고 신령전투에 투입되었다. 아군의 공격로는 지형이 완만하여 북방으로 적을 격퇴시키는데 어려움이 없고 또한 괴뢰군은 20여 미터가 넘는 절벽에 투신 몰살되었다. 이어 팔공산전투에 참가하여 소총중대에 배속 엄호사격 임무를 수행했다. 이때 개전 첫날 금파리에서 부상 으로 후송되었던 정민기 소대장님과 다시 만나고 차용운 전우도 만났다.

이 전투에서는 가파른 산세로 공격하는데 어려움이 있어 일명 방망이 수류탄에 희생되는 전우가 속출하였다. 그러나 적의 분위기가 어수선함이 감지되고 바로 인천상륙작전이 성공, 서울수복이 목전에 다가와가 괴뢰군들의 동요는 불문가지였다.

팔공산을 탈환하고 북진이 시작되는 와중인데 전선은 조용하고 와야 할 아침 주먹밥도 아니 오니 어찌된 일인가? 후방을 살펴보아도 아군은 온데 간데 없었다. “아차 또 낙오되었구나” 하는 생각에 반원을 인솔 후퇴하다 보니 대대 C.P까지 오게 되었는데 이곳도 이미 철수하고 무인지경이며 북쪽 먼거리에서 가끔 포성만 들렸다. 이렇게 된 원인은 배속되는 L.M.G반은 통상 최전방에 배치함을 원칙으로 하고 상황 변동시에는 필히 연락하고 같이 이동해야 하나 이를 이행하지 않은 것에 있다. 이런 사유로 본대 복귀일이 2, 3일 소요되어 일일보고에는 전사 처리되는 사례가 세 번이나 있었다.

가다보니 노상에 적 전차가 있어 다가갔으나 정지상태였고 그곳에 ㅇㅇ부대에서 노획하였다는 표시가 부착되어 있었다. 이를 보고 비로소 북진이 기정사실임을 직감하고 본대를 찾아 헤매인지 2일 만에 만나게 되었는데, 어찌된 일인지 반가워해야 할 분위기가 침통했다. 사연인 즉 1소대장에게 인솔 미숙 책임을 추궁하고 있는 대대장님의 노여움을 모두가 두려워하고 있었던 것이다.

Ⅵ. 전진시작 ... 회인 공비 토벌 수행, 유형의 죽음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 앞으로 앞으로!
낙동강아 잘 있거라 우리는 전진 한다!

그 얼마 만인가? 괴뢰군의 불법 남침으로 평화로운 이 강산에 동족상쟁의 비극이 시작된 지 91일 만인 9월 24일 낙동강을 건너 구미, 추풍령, 영동을 경유하여 9월 26일(음력 8월 15일)에 한가위 새벽공기를 마시며 회인에 도착했고, 이곳에서 괴뢰군 토벌작전에 임했다. 이곳에서 개전 후 처음으로 산화한 전우의 시신을 불교의식으로 화장했다.

이 때 개인적으로 가장 가슴 아픈 일이 있다. 고향 산하 문의가 지척에 있었는데 괴뢰패잔병이 우글거리고 최후 발악을 하고 있어 부모님을 찾아뵙지 못하였으니 말이다. 그 애절한 심정 글과 말로는 표현하기 어렵다. 다행이 문의금융조합에 근무하는 분을 만나게 되어 글월로 안부를 전하였으니 행운이었다.

이곳에서 나로 인하여 억울한 죽음을 당한 초등학교 2년 후배 유형(柳兄)을 생각하면 죄의식에 사로잡히게 된다. 이유인 즉 어떻게 알았는지 유형이 내가 왔다고 환영하러 마을청년들을 이끌고 능선으로 올라오는데, 이를 발견한 ㅇㅇㅇ중대장이 불문곡직하고 권총을 발사했다. 아연실색하지 않을 수 없었고 차마 목불인견이었다. 그것도 참기 어려운 슬픔인데 하물며 시체를 깔고 앉아 담배를 피우며 여자포로와 희희낙락하여 울분이 터졌으나 전투시라 대응을 못했다(여자포로는 평양출신 괴뢰군 간호장교로 즉시 관계기관에 인계하였어야 되나 중대장과 동향출신이란 이유로 자신을 수행하도록 함). 후문에 의하면 유군은 손서행(孫壻行)이었다.

9월 29일 가덕 은행리를 경유할 때 초등학교 지복식 은사님 댁을 찾아갔으나 피난가시고 공포에 떨고 계신 사모님만 뵈었는데 송구한 심정 가눌 길이 없었다. 고은리를 지나 청주에 도착, 이곳에서 숙영하게 되었는데 부모님에 대한 그리움이 사무쳐 거리에 나갔다가 칠촌 질서(姪壻)인 오창진을 만났는데 반가움에 눈물이 맺혔다. 그도 그럴 것이 개전 후 처음으로 인척을 보았으니 말이다. 그는 경찰관으로 참전하여 무수한 격전 끝에 나와 같이 북진중이라고 했다. 긴 이야기를 못하고 고향 부모님께 “불효자식은 무사하니 내내 강령하시어 상면하기를 기원합니다.” 라는 전언 부탁을 하고 떠났다.

Ⅶ. 북진 제1보 ... 38선 고지를 넘어 승호리 진격

9월 30일 개전후 처음으로 U.N군 G.M.C에 승차, 고랑포까지 와서 38선 고지에서 진격명령 대기 중 10월 1일 새벽 드디어 북진 제1보를 디디니 만감이 교차했다. 도보행군으로 사리원, 황주를 경유하여 10월 18일 평양근교 승호리에서 야영했다. 19일 살얼음 낀 대동강을 건너 모란봉 김일성대학을 거쳐 김성애 묘를 지나 괴뢰군 대공포 자리에 우리 50㎜ 기관총을 설치, 기림리 방면에 사격을 가했다. 이것이 평양입성의 서곡이며 오후에 시가전이 전개되었다. 저항없이 무혈 입성하였고 반공투사들의 환영 인파가 부지기수여서 여기도 애국동포가 많이 있다고 생각되어 안심을 했다.

그러나 이곳까지 오는 동안 전투 한번없이 오직 북괴 수도 탈환에만 급급하여 소규모 패잔병들을 가벼이 본 일로 후일 쓰라린 치욕의 후퇴를 하게 되었는데, 이를 등하불명이라 하였던가? 동부 서부 중부 어느 전선을 막론하고 패잔병 소탕작전에 소홀하였으니 말이다.

Ⅷ. 괴뢰 수도 평양 입성...
 모란봉 대피, 평양 재입성, 특진, 무공훈장수여, 전시특별휴가

괴뢰 수도 평양 입성은 꿈만 같았고, 지난 몇 개월간의 일들이 주마등처럼 흐르고 감개무량했다. 밤이 되어 숙영준비에 만전을 기하기 위하여 가택수색은 물론 주위수색도 병행하고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여 이동로도 점검한 후 방에 들었다. 그런데도 삼엄한 경계를 하는 한편 직감적으로 포격대비책을 강구하여야 한다고 판단, 이불을 수거하여 벽 쪽에 수북이 쌓아 놓도록 지시하고서야 석식을 허락했다.

식후 대문밖에 경계보초를 세우고 나니 어두움이 깔리기 시작하고 반공투사들이 환영만찬을 준비하느라 불빛이 새어 나가게 되었다. 이로 인하여 불행한 사태가 발생하였으니 어이하리요? 야포탄이 인근에 한발 투하되고 이어 거듭 세 발의 포탄이 삼각지점을 형성하여 투하 집중포화로 그 지역이 초토화가 될 것으로 보였다. 아니나 다를까 포격은 시작되고 그 첫발이 우리 숙영지 한쪽 벽을 관통 폭발하여 폭진에 아수라장이 되었는데, 다행히 쌓아 놓은 이불 때문에 피해는 없었다. 계속되는 포격으로 부득이 모란봉 굴속으로 대피했고 익일 10월 20일에 재입성했다.

당시의 모란봉 굴속은 미로의 터널이었고 이미 지하벙커로 요새화되어 군수물자 비축장소로 활용한 흔적이 보였다. 숙영지에 와보니 애석하게도 산화한 보초병의 잔해가 이곳저곳에 남아 있어 이를 거두어 인근에 매장했다. 슬프다, 수많은 격전 끝에 평양 입성일에 산화하다니!

피폭 사연인 즉 UN군 야포 진지에서 본 기림리 불빛이 북괴군의 최후발악이라 판단하고 수행한 일이었다. 우리 측 조처로 통신망은 대대, 연대, 사단, 육본, KMAG를 경유해서 야포 O.P까지 상황(아군이 평양에 입성하였으니 사격중지 요청)이 시달되는 복잡한 연락체계와 야포부대의 오판(기동력이 월등한 UN군도 겨우 이곳까지 와 있는데 하물며 한국군이 도보로 평양입성은 불가함)으로 빗어진 결과이다.

북괴수도 선착 공로로 지금까지 진급에서 누락된 전 장병은 일계급 특진과 무공훈장 및 대통령기장 수여와 함께 전시에서의 3일간 휴식의 특혜를 받아 평양거리의 풍경이며 주거 형태를 살필 기회가 왔다. 첫째 가옥의 외관이나 내부구조와 가구류가 우리와 거의 비슷했다. 특히, 지하창고에는 왜정 때의 본견공단과 고급의류와 일본도를 보유하고 있었는데 이로 보아 부유층의 거주지라 보였고, 말로만 듣던 평양단밤을 맛보았다. 그러나 주민과 진지한 대화를 못하여 생활내면은 알 수가 없었다.

삼일간의 휴식 끝에 순천 개천을 경유, 청천강을 건너 약산을 지나 운산에 도착하여 진격 명령을 기다리고 있는 중이었다. 피난 못간 주민이 많아 이곳 생활상을 엿볼 기회가 와서 보니, 주거환경은 이곳이 그 유명한 운산 금광촌이었으나 허술한 가옥에 주방과 방의 구분이 없고 가구류 또한 초라했고, 채소류는 토굴에 저장하여 그때그때 꺼내어 조리하는 생활상을 보았고, 적개심인지 공포감인지 사람마다 무표정한 인상이어서 안쓰러웠다.

Ⅸ. 1.4후퇴 전조...
 중공군 출현, 진중일기 강취, 죽음의 문턱에서의 기적

전황은 이미 중공군 개입으로 중동부전선에서는 부분후퇴와 38선에는 괴뢰군이 길을 막고 있다는 비정보가 들리는 와중이었으나 우리전면에는 별 이상없이 진중근무에 임했다. 그러나 이 어찌된 일인가? 해가 지자 전방과 좌우 원근에서 피리, 꽹과리 소리가 요란하니 말이다! 이것이 중공군의 심리전술로 진중에서 적에게 정신을 산만하게 하여 전의를 상실하도록 하는 전술이었다.

그래도 특별한 군사행동 징후가 없어 경계근무에 임하던 어느 날 초저녁 지척에서 총성과 꽹과리 소리가 요란함과 동시 숙영지는 중공군의 기습으로 아수라장이 되었다. 급히 인근고지에 L.M.G.를 이동 배치시키고 경계 보초는 능선 너머에 배치하고 막 고지에 오르는 순간 느닷없이 여기저기서 중공군이 출현했다.

부득이 그 자리에 엎드려서 적의 거동을 살피니 10여명 중공군이 집결 산정으로 향할 즈음 이들에게 발각되어 일어났다. 불문곡직 배낭을 잡아당기기에 빼앗기지 않으려고 옥신각신 하였으나 결국 이를 강취 당하게 되었다. 천추의 한이로다! 사연인 즉 배낭에는 ‘진중일기’가 보관되었다. 하찮은 노트지만 나에게는 천금만금보다 더 귀중한 보화인 것이었다. 배낭만 빼앗긴 채 그대로 산중턱까지 굴러 내려가 동정을 살피니 여러 명의 중공군 중 장총 소지자는 한명뿐이고 또 한명은 조명탄 발사기를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기타는 비무장으로 급급래래(중국어)를 외치며 산정으로 사라졌다. 그때서야 나 자신을 의식하게 되었다.

전우들은 풍비박산이 나고, 이 세상에 아무도 없는 천애고아가 되어 또다시 후퇴를 하게 된 것이다. 이를 어찌 하리? 무작정 남쪽으로 가야한다는 생각으로 발길을 돌려가려 했으나 지척에 중공군이 있어 포기하고 죽은 듯이 엎드려 있는데, 중공군 하나가 와서 발길로 툭툭 차기에 온몸에 힘을 주어 사체처럼 하고 있었다. 중공군은 그래도 미심쩍은지 장총 한발을 내게 발사하고 사라졌다.

천우신조가 있어 어둡고 긴박한 상황에서 살아났다. 소총 개머리판에 장총 탄흔이 있는 바 2, 3㎝ 오차로 무주고혼(無主孤魂)을 면한 것이다. 그러나 갈수록 산이었다. 오십여 미터 거리마다 중공군이 있어 먼동이 트기까지 요리조리 피해온 것이 겨우 십리 길이 못되었다.

날이 새니 중공군은 어디로 사라졌는지 고요하고 여기저기서 생존한 전우들이 대로를 향하여 모여들어 후퇴하자, 백선엽 사단장님이 이를 저지하며 지프차 위에서 “후퇴하면 사살한다.” 라고 외치시니 가지 못하고 인근 논에 집결하여 점검해보니, 거의 대부분이 비무장이고 손가락을 물린 전우며 죽창에 찔린 전우가 많았다. 사연인 즉 처음 중공군에게 습격당할 때에 그들이 군장비를 먼저 강취하려 했고 그 과정에서 발생한 것이고, 그들은 사람을 해치거나 포로로 취급하지 않고 그대로 두었다. 북괴뢰군에게 이러한 상황을 당했다고 가정하여 보자. 어찌 되었을까?

곧 장비도 지급받고 재편성하여 방어임무에 임하였다. 작전상 야간후퇴하던 중 11월 하순경이라 기억되는데, 적설로 뒤덮인 산야에 선혈로 얼룩진 UN군의 시체를 보았다. 야전침낭 속에서 산화한 참상이었다. 애석하다, 누구를 위하여 이국 만리에서 무주고혼이 되었는가? ‘UN헌장의 고귀한 이념으로 자유수호에 참여하여 산화한 영령들이여! 그대들 없이 어찌 오늘이 있으리요? 심심한 애도를 표합니다.’

Ⅹ. 후퇴 전투... 박천부터 37도선 안성까지 

박천까지 후퇴한 우리부대는 이곳에서 전열정비에 시간이 많이 걸렸다. 대대장님도 운산에서 기습당한 이후 처음 만났다. 이때의 대대장은 육군중령 유재성님, 중대장은 육군소령 백남훈님, 소대장은 육군중위 신옥환님이었다.

민가에서 숙영하게 되어 그곳 생활상을 보니 가가호호 양돈양계를 했고 옥수수 소주는 가정의 필수품인 것처럼 풍부하며, 한냉지 사과의 진미는 대구사과와 비교할 수 없었다.

전황은 불리하여 후퇴의 연속으로 대동강 다리가 폭파되는 소리를 뒤로하고 사리원, 개성을 경유하여, 진격한 지 92일 만인 12월 31일에 고랑포까지 오게 되었다. 신정맞이 준비 와중에 또 언제 왔는지 중공군 습격으로 법원리까지 후퇴했고, 이곳에서 1951년 첫 식사를 하게 되었다. 원통함 형용할 길이 없었다.

일개 사병이 군 본연의 임무를 망각하고 왈가불가 못할 상황이었지만, 괴뢰군의 남침이며 중공군의 한국전 개입을 어찌 예견하지 못하였는지, 알고도 묵살내지 방치하였는지, 수뇌부를 원망도 했다.

유언비어인지는 모르나 당시 UN군사령관 맥아더 장군은 만주폭격을 본국에 강력히 요구하였으나 자칫 3차 대전으로 이어질 것을 염려한 미국 수뇌부로부터 소환 퇴역당하는 비운을 겪었다고 하였다. 그때 맥아더장군 전략대로 했더라면 통일한국 실현의 역사가 창조되었을 것이다. ‘한강수야 잘 있더냐’ 가 ‘한강수야 잘 있거라’ 로 바꾸어 부르게 되었으니 어이 하리요?

Ⅺ. 2차 전진... 관악산 전투, 삼각산 전투, 두포리 전투

1.4 후퇴로 37도선 안성까지 오게 되고 이곳에서 방어임무로 월동하고, 춘계 공세를 관악산 전투부터 시작했다. 이때부터 50년 세월이 지난 지금까지 잊지 못할 악몽이 남아있다. 사연인 즉 야영할 때 엄폐호 구축은 필수인데, 동토(凍土)로 야전삽으로는 땅을 파기가 힘들어 조금만 파고 그 위에 나뭇가지를 걸치고 짚단으로 방풍막이가 되도록 했다. 그 속에 옹기종기 모여 군장을 풀고 있으려니 냉기가 엄습하여 남은 짚단에 불을 지폈는데, 바로 방풍막에 인화되어 엄폐호는 전소되고 일부 개인화기며 탄약에 인화되어 폭발하니 속수무책이었다. 이 사고의 책임을 물어 즉결처분될 것이라 예상하니 만감이 교차하고 나의 생을 이곳에서 마감하게 되는구나 싶어 그저 애통할 뿐이었다.

먼동이 트고 때만 기다릴 뿐이었는데,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고 하지 않는가? 상황보고를 하지 않아 대대 O.P에서 알지 못한 데다 야간전투로 폭발음과 피아 소총소리며 조명탄 발사로 섬광이 번쩍이는 와중에서, 즉 이런 주변상황 때문에 생을 유지하게 되었다. 이는 조상의 음덕이라 여긴다.

관악산을 탈환하고 영등포 당산동 한강변에서 방어하다 도강작전을 수행한 후 마포를 경유, 삼각산 전투 때에 L.M.G. 소대반장에서 박격포소대 선임하사관으로 보직 발령되어 개전시부터 지금까지 생사고락을 함께 해온 전우들(문봉섭.박준석.성우경.황문수.차용운.김순학.이계선.박세교 등)과 작별하게 되었다. 이들은 내가 상사로 진급이 안되니까 일등중사로 진급되고서도 계급장을 패용하지 아니한 정의로운 전우들이었다.

그들 중 황문수는 왜정 군속 출신이고 고향이 아산군 탕정면이고 기혼이며 명사수로 사단 사격대회에서 우승한 경력이 있고, 사변 후 제일 먼저 고향편지를 받아보는 행운아였다. 이계선은 안성 일죽 출신이며 육척장신이고 힘이 세어 전투시에 50㎜ 기관총을 혼자서 메고 다니는 역사(力士)였다. 차용운은 아산 도고 출신으로 천주교 신자로 코앞에서 교전 중인데도 하나님께 기도하는 독실한 종교인이었고 여러 번 부상 후송되었으나 기어코 본대로 복귀하는 독특한 전우였다.

회고해보니 기이한 일로 주위가 격렬한 전투지역이라도 예감에 안심되는 곳이 있고, 예감에 불안한 곳에서는 반드시 불상사가 발생하는 영적인 그 무엇이 있다는 확신하게 되었다.

이날도 박격포 소대로 부임하면서 이변 발생 예감이 있어 불안하였는데, 아니나 다를까 그날 야간전투에 참가한 L.M.G. 고참 전우들이 전사 내지는 부상되는 불행을 맞게 되었다. 거기에 유명을 달리 한 황문수 중사가 있는데, ‘애석하고 애석하다! 그대 신병입대부터 지금까지 생사고락과 희비애락 그 모든 역경을 같이 보내고 이곳 삼각산에서 생을 마감하다니 슬프고도 슬프다! 고이 잠드소서!’ 비록 떠나온 곳이나 몇몇 전우들과 양지바른 곳에 유택을 잡아 매장할 때 함께 지내온 정의(情意)로 내 몸에 간직했던 태극기를 그의 시신에 덮어주고 명복을 빌었다.

박격포 소대로 부임하니 강창식 정순호 한홍기 이창근 박남식 이호대 윤정남 박찬경 임상묵 강신길 장삼준 채규선 강완희 등 13연대 출신이 있어 생소하지는 않아 다행이었으나 새로운 환경적응에 애로가 있었다. 이 소대는 6개 분대 3개 반 편제로서 반장은 장교로 보임(補任)되어 다른 소대와 다르기 때문에 선임하사관의 책무가 어려웠다.

귀소본능이라 하였던가! 공교롭게도 6.25날 괴뢰군과 첫 교전을 했던 13연대 연병장 부근 두포리까지 오게 되었다. 이때부터 휴전설이 입에서 입으로 전해져 왔다. 임진강을 경계로 방어하는 한편, 일부병사는 노무자를 인솔 임진나루를 건너가 휴전회담 장소로 가는 도로공사에 투입되었다. 양극 현상으로 한쪽에서는 쌍방 격렬한 전투가 전개되었고, 또 한쪽에서는 긴장은 되나 도로복구에 여념이 없었던 것이다.

Ⅻ. 비운의 순간... 사고와 부상, 전투수행 마감

이곳이 나에게는 천추의 한이 서린 곳으로 불구의 몸이 되어야 하는 비운의 장소이기도 하다. 서기 1951년 6월 26일 우리 박격포진지 북쪽에 U.N군 전차부대와 야포부대가 적과 대치 중인 오전에 느티나무 그늘 아래에서 통상적인 임무로 분대장과 반 선임하사관을 소집, 이상유무 확인과 지시사항을 전달하고 잠시 쉬는 사이 담배를 피우고 일어나는 찰나 천지가 진동하는 대전차 지뢰폭발(원인불명) 폭음과 함께 아수라장이 되었다. 나는 그 와중에 책임감에 허우적거리다 일어나 같이 있던 전우들의 상황을 확인하려고 했으나 입안에 흙이 가득히 차있어 말소리가 안나오고 보이지도 않은 상태로 기절하였다.

시간이 얼마나 경과하였는지, 정신이 들어 주위를 살피니 희미하기는 하나 들려오는 신음소리며 약 냄새로 병원임을 직감, 옆의 동료에게 물으니 이곳이 서울야전병원이이고, 6월 27일 아침이라 한다. 부상이란 이런 것인가? 정신이 멍하고, 얼굴은 퉁퉁 붓고, 모든 물체가 희미하게 보이며, 귀는 먹통이 되어 큰소리를 질러야 겨우 소통이 되었다.

이곳에서 10여 일간 치료받은 후 퇴원하여 원대 복귀하였으나 귀가 멍멍하여 대화가 어렵고 특히, 시각보다 청각을 더 중요시하는 진중 근무에 지장이 있었다. 차차 회복되리라 생각했으나 이런 증상이 점점 악화되어 이제는 농까지 흘러 도저히 그 상태로 임무를 수행할 수가 없어 대대 의무장교에게 자초지종을 이야기했다. 그러자 이곳에서는 치료를 할 수 없고 육군병원에서나 치료가 가능하다며 즉시 제36육군병원으로 후송 조처하여 주니 이날이 1951년 7월 23일이었다. 이것으로 나의 6.25사변 394일은 종말에 이르렀다.

후문에 의하면 인근에 있던 이호대 전우는 폭음에 놀라 급히 달려가 보았는데 누가 누구인지 분간할 수가 없는 전우들의 아우성 속에서 위생병을 찾아보았으나 생사불명이었다 한다. 그래서 그는 작업복 하의를 찢어 우선 응급조처부터 하고 병원에 보내려 했으나 후송차량이 없어 애타고 있을 때에 마침 이곳을 지나던 U.N.군 차량이 이 광경을 보고 병사가 하차하여 피투성이 부상병을 몸소 챙겨서 서울야전병원까지 보내주었다고 한다.

후일 이 사실을 이호대 전우로부터 전해들은 나는 그때 그분을 찾으려고 우리 재향군인회를 경유하여 미국재향군인회 등 유관기관에 의뢰를 하고 백방으로 노력하였으나 찾지 못했다. ‘애석하여라 그대여! 생존해 계시면 비록 뵈옵지는 못해도 부디 만수무강하시기를 기원하고, 유명을 달리 하였다면 고개 숙여 명복을 비옵니다!’

2007. 4

핸드폰 : 010-6480-0358


※ 후기

전쟁이란 있어서는 안 되고 문구(전쟁이란 말)도 또한 추방돼야 한다 왜? 많은 인명살상과 재산파괴와 자연환경 교란 등 지구상의 최악의 일이다. 전시의 군인에게는 본분을 완수할 수 있는 최상의 피난처며 안전한 곳, 진중이 있으나 민간인에게는 안전한 피난처가 없다.

6.25를 회상하여 보라! 비상사태 시에는 옥석을 가릴 시간적 여유가 없으니 모진 놈 옆에 있다 애매한 놈 매 맞는다고 했듯이, 후퇴시는 감옥의 수감자, 보도연맹의 수난자, 노근리 피폭 희생양민 등, 특히 인공(人共) 때는 반동분자라는 구실로 인민재판에 끌려가 공개 처형당한 군경가족과 우익인사들, 부유층 인사, 공무원과 그의 가족들이 수난을 당했다. 또한 대전형무소에 수감된 반공인사들을 우물에 집어넣어 집단학살하고, 이유 없이 인사들을 산골짜기에 모여 놓고 집단사살을 했다. 끌려가는 자식과 남편을 말리다 괴뢰군의 총 뿌리에 무참히 희생된 노부모들과 부인들, 울어대던 어린이들의 참상 등 이루 헤아릴 수 없는 만행을 도저히 다 열거할 수 없다. 특히, 부녀자들의 심신고난 어찌 입으로 다 표현할 수 있으리요?

그대들이여 그때 그 참상을 말로라도 전해 들었는가?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는가? 기억하고 있는가? 망각하지 아니 하였는가? 듣지도 못하고 보지도 못한 자들이여 각성하시라! 그때 국운이 비색(悲塞)하여 공산화가 되었더라면 어찌 되었을까?

외세를 막아 평화로우니 집안싸움으로 민주화 운동이라 떠벌리지 마라! 산화한 전우들이 가소롭다고 절규하고 있을 것이다. 누군가가 파괴는 곧 건설이라 하였는가? 그러나 만행으로 상처 입은 가슴 어이 되돌릴 수 있을까?

그때의(6.25) 노병들은 어지러운 세파와 쓰라린 고초를 가슴에 안고서 하나 둘씩 유명을 달리하고 대부분이 고종명(考終命)이지만 최후의 한 전우라도 역전의 용사임을 자부하고 있다.

有備無患! 우리 모두 이를 실천하여 온 누리의 평화와 후세의 안녕과 번영을 위하여 힘을 모읍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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