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기노조·민노총 이끌며 노동계 현장 누벼

◈고영주 전 총장은 평범하고 안정된 길을 버리고 노동운동이라는 험난한 인생 역정을 통해 삶의 의미를 찾는 과학도이다.
'반드시'라는 표현은 쓸 수 없지만 그동안 차세대 인물은 가진 자 중심으로 다뤄졌다. 사회적으로 성공한 인물은 틀림이 없으나 사용자 쪽으로 분류될 성향의 사람들이 많았다는 말이다. 내부적인 토의 과정에서도 이런 문제가 지적됐다. 인물 선정을 다양한 가운데 보다 엄격한 균형감각이 필요하다는 의견도 제기되었다. 충분히 공감이 갔다. 차세대를 취재하면서 마음 한켠에는 그것 때문에 늘 마뜩치가 않았다. 그런데 과문(寡聞)한 탓인지 그 자리를 메워 줄 대상이 쉽게 떠오르지가 않았다. 이번에는 꼭 노동계 인물을 선정하겠다는 다짐이 이래저래 오늘에까지 미뤄졌다. 토의에서 지적이 아니더라도 지역 노동계 인물을 다루겠다는 건 내심 하고 싶은 일이기도 했다. 가능하면 평탄한 길을 갈 수 있었지만 노동운동을 선택함으로써 인생역정이 달라진 인물이면 좋겠다는 생각도 가졌다. 그런 기준에 적합한 사람을 찾는다는 건 쉬운 일은 아니었다.

현대자동차에서 노동운동을 한 송인준이라는 친구가 있다. 그는 지금 참여자치연대 집행위원장이라는 직책을 맡아 노동운동에서 시민운동으로 방향을 전환해서 살아가고 있다. 아무래도 그 쪽 일은 그 친구가 잘 알 것 같았다. 이런 저런 기준에 부합하는 인물을 선정해달라고 부탁을 했다. 하루만에 전화가 왔다. 과기노조위원장을 역임하고 민주노총 사무총장으로 노동계를 이끌었던 고영주씨(39)를 추천했다.

저녁에 선정을 하고 다음 날 아침에 고 전총장에게 전화를 했다. 그리고 같은 날 오후에 취재약속을 했다. 이틀만에 화들짝 놀라듯이 끝내버린 건 일종이 조급증이다. 하루하루 일과를 두부모 처럼 잘라나가는 습관은 19년 동안 반복된 신문기자 생활 속에서 자연스럽게 형성된 직업병이다. 마감시간을 기준으로 갈라지는 시간의 절단은 곧바로 업무의 한 단위로 떨어져 나가는 게 언론사 생활이었다.

고영주 전 총장은 현재 영국에 유학중이다. 맨체스터 대학에서 박사과정을 밟고 있다. 한국에는 지난 10월 5일 논문 자료 수집 차 왔다. 한국과 영국 과학정책의 비교 연구가 그가 영국에서 공부하고 있는 과제다. 과기 노조에서 파견형식으로 공부를 하고 있다. 호칭이 애매했다. 무직상태이니 이것도 그렇고 저것도 그랬다. 통상 뭐라고 불리냐고 물으니 민노총 사무총장이력 때문에 '총장'이라고 말했다. 인터뷰에서는 총장으로 호칭하기로 했다. 대덕구 신성동에 위치한 과기노조 사무실에서 만났다.

유학 중 자료 수집 차 국내 체류

"세상은 빨리 변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외환위기의 경우 정부도 마찬가지였지만 노조에서 전혀 예측을 못했습니다. 그러니 준비도 못하고 발빠르게 대응도 못한 건 사실입니다. 문제는 이후 상황입니다. 대안마련을 위한 노력이나 능력도 부족했다는 점입니다. 조합 간부와 조합원간에 괴리가 생기게 되었습니다. 말하자면 간부들은 여전히 희생과 투사적인 투쟁을 강요한 반면 조합원은 개인주의 성향이 강해지고 욕구도 다양화되었지요. 그런 것들을 재빨리 대응하지 못한 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지금은 노조가 기본에 충실하면서 자기 성찰을 통해 모범을 보여야 할 시점이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정책 능력을 배양하는 게 무엇보다도 중요합니다."

고총장은 노조의 문제점을 먼저 얘기해달라는 말에 자신의 경험을 토대로 줄줄 꿰어나갔다. 노조 간부로 있으면서 하지 못한 일에 대한 아쉬움으로 들렸다. 노동운동이라는 건 노동자계급의 일상적인 요구 충족, 끊임없는 자본의 공격에 대한 방어, 임금 등 근로조건의 유지 ·개선을 기본목적으로 하고 있다. 노동운동을 통상 3가지로 나눠서 정리하게 된다. 요컨대 임금노동자들의 임금 등 노동조건 유지·개선을 위한 것과 영국처럼 정치적 시민으로서의 조직활동, 그리고 소비자로서의 운동 등이다. 우리나라는 노동조건의 개선을 일반적인 덕목으로 하고 있다. 고총장은 달랐다. 과학정책 입안에 많은 관심을 가졌다.

"과기 노조를 이끌 때 과학 정책과 관련한 일을 많이 건의했습니다. 일반 노동자들과 함께 과학기술정책에 관해 많은 관심을 가졌고 자본주의 발전과 과학기술과의 관계 등을 연구했습니다. 특히 변화하는 사회에 어떻게 과학 정책이 대응을 해야 할 것인가 하는 문제 등이 노조를 이끄는 기본 철학이었지요."

고총장은 제주도 출신이다. 그곳의 3대 성(姓)인 고(高), 부(夫), 양(梁) 중의 하나다. 연구원이라는 안정적인 직장을 마다하고 노동운동에 뛰어 든 이유도 궁금했다. 그리고 경찰공무원이라는 가정 환경에 걸맞지 않는 그의 인생 행로 또한 그러했다.

얼굴이 한국적이었다. 구수하게 생긴데다가 조용조용한 말은 노동현장에서의 투사적인 인상보다 대폿집에서 쉽게 만날 수 있는 그런 얼굴이었다. 그가 변혁기 한국 노동운동의 핵심적인 두뇌역할을 했다는 게 쉽게 납득이 가지 않았다.

제주도 출신의 한국적인 인물

삼다도 제주는 초등학교 1학년 때 떠났다. 입학 전 서울에 머문 적은 있었다. 6촌 누나가 똑똑해 보이는 그를 데리고 서울에서 올라가 그곳에서 약 1년 동안 머물기도 했다. 그래서 서울은 낯설지 않았다. 박봉의 아버지와 자식들의 뒷바라지를 위해 어머니는 택한 것은 옷 장사, 그것도 노점상이었다.

"어린 마음에 그것이 싫었습니다. 한편으로는 어머니의 고생에 마음이 아프기도 했으나 장사하는 모습이 정말 싫었지요. 학교 갔다 와서 어머니가 계시지 않는 텅 빈 방안은 그렇게 허전했습니다. 여동생이 밥을 차려주었는데 지금도 그 생각만 하면 미안합니다."

축구를 유난히도 좋아했던 섬소년은 그것 때문에 심각한 갈등을 한차례 겪었다. 소질을 발견한 선생님은 축구부가 있는 곳으로 진학을 권했고 집안에서는 당연히 반대였다. 지금과는 달리 당시만 해도 운동을 직업으로 선택한다는 건 모험이었다. 다행히 잘하면 더없이 좋지만 그렇지 못하게 되면 사회적응력이 떨어진다는 이유였다. 그는 기로에서 공부를 선택했다.

"그것이 제 의지대로 안된 첫 번째 경우였습니다. 공부는 상위권이었으나 내 인생의 진로를 처음으로 바꾼 계기가 되었다고 봅니다. 그런 예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여러 차례 일어났습니다."

배명중에 진학한 후에도 축구를 잊지 못했다. 수업이 끝난 후에 친구들과 모여 거의 축구선수 수준으로 연습을 했다. 그 때 잘못 사들인 집으로 인해 한차례 마음 고생을 겪었다. 소방도로가 나면서 집이 수용되었고 그 과정에서 일부를 제외하고 불법건물임을 알았다.

"아버지의 충격이 컸습니다. 평생 공무원으로 생활하면서 국가에 충성을 했는데 나라가 집 없는 사람들을 소홀히 대접하고 있다는 생각을 가지셨던 모양입니다. 그때 가족들 모두가 어려웠던 시기였어요"

어머니의 노점상을 싫어한 섬소년

한영고를 거치면서 그는 화학선생님의 인격에 감명을 받아 진로를 결정했다. 인간적으로 존경을 할만한 훌륭한 인물이었고 딱딱한 화학과목을 재미있게, 그리고 쉽게쉽게 가르쳤다. 감수성이 예민한 고등학교 시절에는 조그마한 계기만 있어도 그 쪽으로 매달리는 게 특성이다. 그도 예외는 아니었다. 대학은 서강대였고 학과는 당연히 화학과였다. 장학생으로 들어갈 만큼 성적이 우수했다. 생각도 아버지의 영향을 받아 굉장히 보수적이었다.

"박정희 대통령은 좋아하고 북한을 싫어하는 전형적인 보수성향이었습니다. 더욱이 데모하는 학생들은 정말 좋지 않게 생각했습니다. 고등학교 시절 한양대 앞을 지나 다녔는데 데모하는 대학생들은 보고 '왜 대학에서 공부를 하지 않고 데모를 하느냐'고 할 정도로 보수적이었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철이 없었지요."

고총장이 대학에서 학생운동을 한 동기 또한 아이러니컬하게도 여기에서 나왔다. 공부하지 않고 데모만 하는 학생을 교화(?)시키겠다는 가당치 않는 포부로 국악반에 들어갔다. 평소 국악에 대해 관심도 많았지만 데모꾼들이 많은 호랑이 굴을 들어가겠다는 순진한 동기가 강했다. 그리고 호기심이 그를 학생운동으로 빠져들게 만들었다.

"단소, 대금을 배우면서 격주로 의식화를 위한 책을 읽는 활동을 정기적으로 하고 있었습니다. 처음에는 학과에서 읽지 못하는 책을 본다는 호기심에서 출발을 했습니다. 그 해 여름에 농활을 다녀왔는데 그 때 운동에 대한 긍지를 느꼈습니다. 그런데 서클 대표가 구속되어버렸습니다. 개인적으로 농촌 현실에 충격을 받았지만 대표 구속이 사회의 불합리를 보이게 만든 것이지요. 전원적 풍경에다 공기 맑은 것만 생각하다가 고된 노동과 저곡가 정책, 희생되는 농민 등을 직접 체험한 건 충격이었습니다."

가치관은 변하고 있었으나 정작 본인은 느끼지 못했다. 데모를 하지 않아야 한다는 입학전의 논리를 스스로 펼 수가 없었다. 학생은 공부를 해야하고 북한이 쳐들어오면 우리는 어떻게 되고 하는 유치한 논리 외는 그를 지탱해주는 이론은 아무것도 없었다. 논리 부족은 곧 의식교육의 본격화로 이어졌다.

데모 학생 교화시키려 국악반 가입

그런 가운데 잠자고 있는 의식을 깨우쳐 주는 작은 사건이 일어났다. 한 선배가 유인물을 학교에서 뿌렸는데 5분도 안 돼 연행된 것이다. 학원 내 사찰이 상존하고 있음을 실감했다. 그 현실에 충격을 받았다. 그리고 데모는 '해야하는 것'으로 변했다. 대학이 단순한 진리와 정의를 위해서 존재하기 위해서는 자기 희생이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 중심에서 나를 버려야 한다는 쪽으로 변했습니다. 1학년 때는 과대표를 하면서 통상적인 대학활동을 했습니다만 2학년 때는 질적인 변화를 가져왔지요. 공부도 열심히 해야하나 사회 참여도 적극적이어야 한다는 것이었지요. 학생운동에 핵심은 아니었지만 그때부터 공감을 하게되었습니다."

3학년 때 학생회가 부활되면서 사회부장을 맡았고 4학년 시작과 함께 총학생회 활동을 그만두었다. 자기보다 강성이 득세를 하던 흐름 때문이었다. 그 때 지도교수였던 강재효교수가 지켜보고 있다가 진로를 물어왔다. 그의 권유는 공부를 더하는 것이었다.
학생운동은 영화같은 장면을 연출하기도 했다. 경찰인 아버지와 불온 유인물을 가진 아들의 대면이었다. 신당동에서 유인물을 가지고 집에 가다가 불심 검문에 잡혀 끌려 간 곳이 아버지가 있는 성동경찰서였다. 아버지 덕분에 경찰 백차를 타고 귀가하기는 했지만 시말서를 쓴 아버지가 상당기간 혼란스러웠다. 모범생인줄만 알고 있었던 아들의 예기치 않는 행동은 아버지에게 '배우는 과정으로 이해를 부탁하는 것'으로 변명을 했다.

지도교수에 이끌리다시피 한 그는 서강대 대학원에서 학생운동만큼 열성으로 공부를 했다. 그리고 88년 한국화학연구소에 특채 형식으로 직장생활을 시작했다. 연구원 생활은 적성에 맞았다. 하지만 역시 불합리한 기성 사회의 구조가 또다시 그를 노동현장으로 향하게 만들었다. 당시 정부에서는 연구원 노조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입장이었고 반대로 노조측에서는 결사적으로 한판 승부를 앞두고 세 불리기에 나섰다.

"연구만 하고 있는 저를 실장이 불렀습니다. 학생 때 데모했느냐고 묻고는 노조에 가입할거냐고 했어요. 가입권유도 없었고 잘 모르겠다고 대답했더니 대뜸 노조에 가입하려면 사표를 내고 하라고 했어요. 정말 이럴 수가 있냐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길로 바로 노조에 가입서를 냈습니다."

경찰 아버지와 유인물 소지한 아들

이후에도 그의 노조활동은 거의 휴면기였다. 유학을 준비하고 있었고 관심도 없었다. 다만 축구부를 만들어 활동하고 있는 고총장에게 2대 노조위원장 적임자가 없으니 1년만 해달라고 해서 마지못해 승낙을 했다. 물론 아내와 상의하는 과정을 거쳤다. 총회가 적임자가 없어 세 차례나 무산되었고 1년 만하면 된다는 말에 아내는 '당신 아니면 할 사람이 없느냐'고 묻고서는 OK했다. 그게 지금의 그를 만들게 되었다 그리고 두 번째로 의지대로 움직이지 못한 경우가 되었다. 1992년 연구소 파업을 주도하고 2년 후에는 과기노조 결성으로 정부의 불합리한 과학정책에 맞섰다.

"개별 노조를 산별로 처음으로 만들었다는 게 중요한 업적입니다. 우리나라 노동운동 변화에 중요한 실험을 하게 된 셈이지요. 또 노조에서 정부정책에 대응력을 가졌다는 점도 마찬가지지요. 국가의 과학기술정책에 의견을 제시하는 노조가 되었다는 얘기지요. 그리고 정치사업을 시작했다는 점이 업적이지요. 95년도 지자체 선거에 노조원 3명을 구의원에 당선시켰습니다."

1998년에는 민노총 사무총장으로 한국 노동계를 이끌었다. 이 와중에서 그는 총파업과 업무방해죄로 6개월간 구속되는 아픔을 겪기도 했다. 이러한 그의 행동은 주변 사람들에게 적지 않는 고통으로 전가되었다. 경찰출신 아버지는 무언으로 의사를 표시했고 교장선생님 출신 장인은 안정된 직장인이기를 바라는 기대를 저버린 사위를 곱지 않게 보았다.

2년 동안 학생운동을 하면서 만난 아내 박선민씨(39)도 반대를 했다. 평범한 생활인이기를 바라는 보통 아내의 생각이 오랜 노동운동 동안 점차 커졌던 모양이다. 그러나 남편을 필요로 하는 조직이 있다는 말에 '마음이 그러면 어떻게 하겠느냐. 하려면 최선을 다해라. 그리고 나도 도와주겠다'며 힘을 실어주었다.

"노동조합의 간부로서 역할을 원 없이 했습니다. 잘잘못은 몰라도 최선을 다해 사회의 발전을 위해 기여했다고 자부합니다. 앞으로 구체적인 계획은 세우지 못하고 있습니다. 다만 과학기술이 어떻게 가야하느냐에 대한 진보적인 목소리를 내고 싶습니다."

1989년에 교사직을 그만두고 남편을 내조해온 아내에게 늘 미안하다는 그는 '마음이 약하고 누가 부탁을 하면 거절을 못하는 성격'으로 스스로를 평가했다. 바로 거절 못하는 성격 때문에 오늘에 이르렀다고 분석하기도 했다. 그게 본인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이뤄진 세 번째 경우였다. 아들 성수군(12)과 경천군(11)과 아내와 함께 영국생활을 하는 그는 박사학위를 따고 귀국할 예정이다. 오는 11월 말까지 한국에 머무르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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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칙과 소신 지키는 활동가

 내가 본 고영주 - 김영목 한국화학연구원 선임연구원


무엇보다 자신에게 주어진 일에 대해서 원칙과 소신을 가지고 매섭게 추진하는 활동가다. 지금은 자신의 내적 역량 강화와 이후 활동과 헌신에 대한 수련중이라고나 할까. 그 과정에서 개인적으로 해고의 아픔을 갖고 있다.
사실 활동가들의 가장 어려운 것이 사람사이의 관계를 슬기롭게 풀어가며 조직하는 일이다. 이런 점에서 다양한 의견과 시각을 원칙에 맞게 설명하고 설득하는 탁월한 재능을 지녔다. 일과 사업에 대해 철저한 고민과 활동의 성과물이기도 하다.
반면 조직이 어려움에 봉착해 있을 때 못 마시는 술을 이겨내며 밤새 토론하고 집에서까지 일에 매달리는 모습을 볼 수 있다. 아울러 끊임없는 자기성찰을 해 가는 그 강인한 체격과는 달리 한편으로는 격정에 겨워 울기도 잘한다. 그러면서도 다시 일어나 뒤를 돌아보며 몸을 추스르는 인간적 면모와 조직적 모습을 갖고 있다.
치열한 현장으로 돌아와 더 넓고 높은 시야로 지역과 해당 분야에서 노동자를 위한 활동을 힘차게 개시할 거란 믿음을 갖는다. 그가 말하던 '냉철한 머리와 뜨거운 가슴으로 판단하고 몸으로 실천하는 것이 운동'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삶을 살게 될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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