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른 인성 위에 높은 학력 갖춰야

차세대 인물 재개를 둘러싸고 논란이 있었다. 지난 4월 15일 김현섭 대통령 민정비서관을 끝으로 중단되었으니 석달하고 보름을 쉬었다.
오랜기간이 지나 아예 막을 내리는 게 좋겠다는 쪽도 있었고 아직도 대상인물이 많은 만큼 좀 더 연재를 해야한다는 의견도 있었다. 전자의 경우 희소(稀少)가치를 염두에 둔 논리였고 후자는 지역 인물 격려 차원에 나쁠 것이 없다는 게 주된 이유였다. 두 논리의 각축은 우열을 가릴 수가 없었다. 균형을 깨뜨린 건 지난 달 5일에 있었던 「이들이 차세대다」출판기념회에서 나왔던 축하의 말이었다.
이날 중도일보 변평섭 사장은 〃그 동안 지역 신문이 인재를 키우기는커녕 깎아 내리는 데 경쟁적이었다〃는 말로 차세대 주자를 한데 묶은 출판의 의미를 높이 평가했다. 또, 홍성표 대전시 교육감은 〃인물을 키우는 작업을 했다는 자체가 대전발전을 이루는 하나의 사건이라고 생각하며 청소년들의 진로교육의 좌표를 설정할 수 있는 좋은 계기를 마련해 줬다〃고 말한 점이 시리즈 재개에 결정적인 변수가 되었다.

그런데 문제는 또 있었다.
시리즈를 다시 시작한다면 누구를 첫 타자로 내세울 것이냐 하는 방법의 문제였다.
정치가, 행정가, 예술인, 시민 운동가....
모두가 검토의 대상은 되었다. 하지만 딱히 '이 사람'하고 드러나는 인물이 없었다. 이미 연재되었던 25명 속에 그럴법한 인물은 상당수 포함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아무튼 이 문제는 간단치가 않았다.
고민을 거듭하던 중 한 기자가 '교육 쪽은 어떠냐'고 물었다. 괜찮을 것 같았다. 그렇다면 또 '누구를 선정해야 하는가' 하는 고민이 남아있었다. 이 고민은 우연하게 의외로 쉽게 풀렸다. 대전언론문화연구원 이사중 한 명이 추천을 해왔다. 이번 대전시 교육위원 선거에 교수로서 당선된 인물이 나이도 적당하고 앞으로 지역교육계를 이끌어 갈 주자라는 것이었다.
그가 바로 공주교육대 이명주교수(43)였다.

마흔 넘어서도 식지 않는 열정

9월 1일자로 대전시 교육위원 임기가 시작이니 아직은 이교수였다.
지난 7월 11일 치뤄진 교육위원 선거 팜플렛에 눈에 띄는 부분이 있었다.
「1959년생」
홍보물 맨 위에다 출생연도를 이름 옆에 나란히 세웠다. 편집기술로 말하면 가장 돋보이는 장소에 레이 아웃을 해놓았다는 얘기다. 무슨 의미가 있었을까. 이교수와 대화는 궁금증에서 시작되었다.

〃특별한 의미는 없습니다. 제가 그만큼 상대적으로 젊었고 젊은 만큼 역동적인 교육일꾼이 될 수 있다는 점을 부각시키고 싶었습니다. 사실이 또 그렇고요.〃

남자 나이 마흔셋이면 적은 것도 아니다. 불혹(不惑)을 훌쩍 넘어선 나이다. 마음은 늙지 않는다지만 그렇다고 '듣기만 해도 설레인다' 청춘도 아닐진대 그는 젊음을 뽐내고 있었다. 상대적으로 연부역강(年富力强)한 게 이유이겠지만 보기에 따라서는 당돌하게 까지 비쳐질 수도 있었다.

〃교육위원에는 전혀 뜻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교육청에 근무하면서 교육위원들의 역할을 보니 너무 미흡했습니다. 전문적인 판단을 요하는 사안인데도 불구하고 이런 걸 아는 위원이 없었지요. 요컨대 교육 정책이라던가 장학, 교육 관련법, 그리고 재정 등을 조금이라도 알아야 하는데 그렇지가 않았어요.〃

말은 길었지만 '옆에서 보니 답답해서 밀치고 나왔다'는 얘기다. 그래서 이건 아닌데 하는 생각을 갖게 되고 급기야는 참여를 통한 교육의 변화를 선택했다. 그것이 이번 선거에서 승리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현실 교육에 참여가 도덕적 의무라고 생각했습니다. 주변에 있는 선후배가 '당신이 무조건 해야한다'는 권유도 큰 힘이 되었지요. 아무래도 아는 사람이 나을 것이라는 소박한 생각도 있었습니다.〃

교육 현장에서 흔히 '아는 것과 가르치는 건 별개'라는 말이 있다. 마찬가지로 안다고 해서 좋은 결정을 하는 건 아니라고 본다. 왜냐하면 교육을 판단하는 위원이 7명이기 때문이다. 이교수 혼자만 알고 있다는 점은 이들에게 견제 심리를 가져다 줄 수도 있고 '반대를 위한 반대' 명분도 제공할 수 있다. 사실 이런 일은 현장에서 비일비재하다. 지난 번 만났던 서구의회에서 유일한 여성의원이었던 김용분씨는 '다른 의원들의 동의 얻기가 더 힘들었다'고 말할 정도였으니 그 속에서 일어나는 일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 점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다양한 근거자료와 연구보고서를 작성하여 최대한 설득하면서 그 분들의 의견을 수용, 절충할 예정입니다. 여기에서 합의된 의견을 제시하여 결국에는 과학적이며 최고가 되는 안(案)을 제출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정책 공감대 형성이 현실적 과제

◈초등학교 6학년시절 친구들과 함께 (사진좌측).
이교수는 청양 촌사람이다.
1959년 충남의 알프스라는 청양읍 적누리 농사꾼 아들로 태어났다.
농사는 가족 노동이다. 전 가족이 매달리기 때문에 학교에 다닌다거나 공부를 잘한다는 것도 부족한 일손 때문에 열외의 사유가 되지 못한다.
이교수도 예외는 아니었다.
인근 마을까지 수재로 소문날 만큼 뛰어났지만 피사리, 모내기 등 농사에서 제외될 수는 없었다. 그래서 웬만한 농사일은 지금도 할 수가 있다.

〃저는 초등학교 때 줄 곧 반장을 했어요. 특히 서예와 미술을 잘 해 4학년부터 자격이 주어지는 미술실기대회에 2학년 때 나가서 충남도전에서 특선을 할 정도였습니다. 자랑같지만 아버지께서 농사를 지으면서 한학을 하셔서 초등학교 들어가기 전에 천자문을 다 떼었습니다.〃

예능과 한학, 그리고 학교 공부에 두각을 나타냈던 모양이다.
청양중을 지원했다. 결과는 수석이었다. 386세대이면 누구나 기억하는 '5·16 장학금'을 받고 다녔다. 더운 여름에는 모깃불을 피워놓고 멍석 깔린 모기장 속에서 공부를 했다. 불이라고는 등잔불뿐이었지만 학문에 대한 집념은 대단해 동네 아이들이 공부하는 모습을 보러 견학을 오기도 했다. 열심히 농사도 거들고 부모님 말 잘들으면서 성의껏 효(孝)를 실천하는 모범학생이었던 모양이다.

◈공주고 1년 .
〃중 3때 담임이 유광수 선생님이었는 데 공주고 출신이었습니다. 당시 김종필총리, 김용환 장관 등 공주고 출신들이 정계에 많이 진출해있어 진학을 권했습니다. 전체 2등으로 합격했는데 공부잘하는 학생들이 많아 심리적으로 상승작용이 일어날 그런 분위기는 아니었던 것 같아요 〃

관료 진출 많았던 공주고 진학

넉넉지 않는 집안 형편에다 군대가 면제되는 공주교대를 선택하면서 고생은 시작되었다.
80년 졸업과 동시 모교인 청양 청송초등학교가 첫 부임지였다. 공부를 더해야겠다는 생각에 당시 숭전대학교 2학년에 편입을 했다. 야간이었다. 이때부터 주경야독(晝耕夜讀)의 상상을 초월하는 의지와 이교수만의 집념이 나오게 된다.

초등학교 1학년을 맡아 학교가 끝나면 오후 2시 30분. 청양읍에서 3시 15분 대전행 직행버스를 타고 도착하면 오후 6시 30분. 황급히 숭전대로 가면 6시 40분부터 수업이 시작되어 밤 10시 30분에 끝이 난다.
문제는 귀로(歸路).
대전역에 가서 0시발 서울행 완행열차를 기다리면서 틈틈이 책을 본다. 새벽 2시에 천안역에 내려 다시 2시간을 기다려 새벽 4시 장항선을 타고 청양에 가장 가까운 광천에 내린다. 광천에서 청양까지 1시간 걸려 학교에 도착하면 아침 8시 10분부터 새로운 일과에 들어간다. 이런 생활을 일주일에 5일을 반복했다.

◈1980년 공주교육대 졸업식장에서.
〃교장 선생님이 미쳤다며 그렇게 하다가는 죽는다고 말렸어요. 실제 몇 달 하니 눈이 퉁퉁 붓고 황달이 오더라고요. 그래도 공부는 더해야겠다는 생각에 계속했습니다. 어느 날 학교에 간다고 갔는데 눈을 떠보니 병원 천장이더라고요. 길거리에서 쓰러지니까 누가 공주 의료원에 입원시켰던 모양입니다.〃

정말 죽을 고비도 있었다.
돌아가는 길이었다. 대전에서 열차를 타고 천안에서 내려야 하는데 졸다가 차가 출발할 즈음 깼다. 황망하게 뛰어 내렸는데 아뿔사 맞은 편에서 하행선 열차가 다가오고 있었다. 열차와 열차 사이 좁은 공간에 움츠리면서 겨우 죽음을 면했다.

열차서 뛰어내리다 죽을 고비 넘겨

야독(夜讀)은 이렇게 해결했다.
그렇다면 주경(晝耕)은 어떠했을까.
좋은 일을 양립시키기는 힘든 일인데 이교수는 그것을 해냈을까.
1984년 청양군 미당 초등학교 때 일이다.
군내 수학경시대회가 열렸는 데 1-4등까지가 미당초등의 차지가 되어버렸다. 이들을 이끌고 충남도 대회에 나가 또다시 대전시와 대덕군 등 기라성 같은 인재들이 있는 지역을 제치고 1등을 했다. 도저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일개 군에서 대도시와 대도시 인근지역을 밀어내고 경시대회에 맨 앞자리를 차지한다는 건 기적이었다. 교육여건이나 환경, 학부모들의 수준 등 모든 가중치를 넣어도 승산없는 게임이었다. 그런데 이교수는 그것을 해냈다.
원인은 열정과 사랑이었다.
제자들 참고서는 말할 것도 없고 옷에다가 밥까지 사주다 못해 그것도 부족해 방학때는 대전 단칸방에서 아이들 4명과 합숙을 했다. 지금은 모두 성장해 간호사도 되었고 과기대에 다니는 제자도 있지만 중학교를 가면서 우수한 학생 중의 하나로 묻혀버렸다.
질 높은 교육은 연속성이 필요하다는 평범한 교훈을 얻는 데 만족해야만 했다.

◈대전시 첫 부임 학교였던 내동초등학교 졸업생들과 함께.
당시 대전외 지역에서 대전으로 들어오는 건 하늘에 별따기였다.
이 교수에게 그 기회가 너무 빨리 다가왔다.
학습지도 우수교사로 선정된 것이다. 매년 군단위에서 1명씩 선발, 무조건 대전으로 보내던 시절이었다. 29살때의 일이다. 다른 지역은 모두다 50대 교사였다. 그 정도 나이가 되어야 포상과 경력에서 가능한 일이다.

〃내동초등학교가 대전에서 첫 근무지였습니다. 기가 막히더라고요. 자녀 교육에 대한 학부모 관심과 교육 환경이 시골과는 비교가 안 되었지요. 여기서도 수학 경시부를 만들었는 데 수학외에 영어도 가르쳤습니다. 영재교육 수준으로 지도를 했는 데 다음해 중학교 반편성고사에서 내동 아이들이 휩쓸어버렸습니다.〃

'최초'는 이교수의 또 다른 이름

〃휩쓸고 나니 즐거운 부작용도 뒤따랐습니다. 선화·중앙초등에서 내동초등학교 이선생의 지도를 받기 위해 전학을 오는 겁니다. 요즘 같으면 위장전학이지요. 그것도 모두 대전에서 힘께나 쓰는 분들 자녀였습니다.〃

일화도 있다. 논산 모병원장 아들이 중앙초등학교에 다녔다. 1년만 가르쳐주면 17평 주공 아파트를 사주겠다는 제의였다. 엄청난 조건이었지만 당연히 거절했다. 스승으로서 할 도리가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식지 않는 향학열은 아이들과 현장에서 부대낀다고 해서 달라진 것 없었다.
숭전대 졸업 후 선생을 하지 않겠다고 충남대 경영학 대학원에 원서를 냈다. 하지만 졸업은 못하고 수료만 했다. 신내림을 거부하다 무병(誣病)을 앓는 무녀처럼 그에게 '가르침'은 전생의 업보였다. 다시 선택한 곳이 교육대학원이었고 한번 결정한 일은 박사학위까지 거침없이 진행됐다. 1994년도 학위취득을 했고 교육학으로는 충남대에서 최초였고 초등교사로서도 최초였다. 그때 나이 34세. 최초라는 단어가 그에게 자주 붙여지는 부사가 되면서 젊음은 곧 자신감이었고 성취를 위한 필요충분한 조건이었던 모양이다.

〃가르침은 신내림과 같은 것〃

◈94년 충남대학교 교육학 박사 학위수여식장에 참석한 가족들.
〃또 박사학위를 가진 자는 무조건 장학사로 채용해야하는 법이 있었어요. 그때 30대 장학사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런데 보직이 또 인사담당이었어요. 이때도 저는 20년 위인 50대 선배들과 같이 근무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훗날 교육부가 채택한 교장초빙제를 도입했고 장학사의 동·서부 순환근무제, 관료주의 타파를 위한 구조조정 등 괄목할만한 업적을 남겼다. 그리고 5년 후 공주교대 교수 공채에 응모해 지금까지 그 명함으로 살아가고 있다. 여기서도 낭중지추(囊中之錐)의 그의 송곳은 신임교수의 기획연구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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