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식이 통하는 사회 만들고 싶어

 차세대 인물탐구(정치)-김영진 대전청소년문화원 이사장


젊다는 것은 무엇일까?
단지 연령이 낮아 혈기왕성하기 때문일까, 아니면 꿈을 가지고 항상 새로움을 추구하며 도전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기 때문일까.
30대의 나이로 세상의 주목을 받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그 정도로 우리사회는 보수적인 성향이 만연돼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정치권에서도 40대 기수론을 외치며 세대교체의 명분을 내세우지만 쉽게 받아들이는 분위기도 아니다.

김영진 (사)대전청소년문화원 이사장(39)은 30대의 젊음으로 새로운 도전을 펼쳐나가는 인물 중에 하나다. 그는 안정된 직장으로 평가받고 있는 공직을 과감히 떨치고 자신의 꿈을 펼치기 위해 민선 구청장 선거에 출마하는 등 정치적인 도전을 행했다. 또한 청소년 선도와 봉사활동 등에 투자를 아끼지 않는 등 현대화의 물결 속에서 갈수록 건조해지는 인간성을 회복시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김 이사장은 공직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하다. 14년여간의 공직생활 동안 대부분 기획업무를 담당했기 때문에 기획통이라는 별칭이 붙어있다. 그는 '자랑스럽고 즐겁고 보람있는 직업'이라는 함축적인 말로 공직을 대변한다. 그 정도로 애착이 많다.

"공직이란 정말 보람있는 직업 중의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특히 지역민들에게 봉사하며 즐거움과 편안함을 줄 수 있다는 것은 하늘이 내려주신 직업입니다. 항상 지역발전과 지역민들에게 기쁨을 줘야한다는 사명감을 갖고 봉사하는 마음으로 생활했습니다."

대전시 장기계획 수립한 기획통

대전시 기획관리실 송무계장, 시정연구계장, 교통운영과장, 국제협력과장, 기획관을 거친 김이사장은 대전시의 장기발전구상을 수립했던 인물이다. 또한 WTA(세계과학도시연합)를 구상하고 궤도에 올려놓는 등 대전시의 세계화에 앞장서기도 했다.

국제협력과장 시절 WTA 발족을 위한 준비단계에서 일어난 일화 한 토막.

영국에서 열리는 WTA 집행위원회에 정영조 대사(현 방글라데시 대사)를 단장으로 참석하기로 되어 있었다. 집행위원회에는 8개 회원 도시 중 5개 도시가 참가했다. 그러나 정대사가 갑자기 병이 나는 바람에 단장으로 참석할 수 없었다. 어쩔 수 없이 김이사장이 직원 1명과 함께 영국으로 건너가 4시간 동안 WTA에 대해 영어로 설명하고 이해를 구했다.
설명하는 4시간이 4일과 같이 길고 진땀나는 시간이었지만 그는 결국 회원도시들의 결의를 이끌어냈다.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당시 상황을 회고하며 '자신감만 있으면 무엇이든 해낼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인생의 목표를 향한 그의 발걸음을 가볍게 하는 소중한 경험이었다.

김이사장은 행정가이면서 법률가이기도 하다. 서울대 법대를 졸업해서 행정고시를 통해 공직에 입문했지만 법학에 대한 미련은 버리지 못하고 있다. 법학은 행정의 근본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법학 공부를 함으로써 더욱 진보된 행정을 펼치겠다는 생각으로 94년 어려운 관문을 거쳐 미국 워싱턴대 대학원의 국비유학을 떠났고 미국 로스쿨에서 국제변호사 자격을 취득했다. 또 대전대 대학원에서 박사과정을 마치게 하기도 했다.

"처음 법대를 진학할 때는 뚜렷한 소신이 없었습니다. 경제학을 전공해서 교수가 되겠다는 생각은 가졌지만 선생님들의 추천으로 법대로 방향을 선회했어요. 법학공부를 더 하지 못한 것은 지금도 아쉬움이 있습니다. 미국유학에서 국제변호사 자격을 취득하고 대전대 대학원에서 박사과정을 밟은 계기도 못 다한 공부를 마치기 위해서였습니다. 하지만 법학을 다시 공부한 데는 법은 모든 것을 포괄하는 것이라는 생각에서 였습니다. 법을 공부함으로써 더 나은 행정서비스를 제공하자는 취지지요."

민선 서구청장 도전 고배 마셔

김이사장은 도전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안정적인 직장이라 꼽히는 공직을 버리고 30대의 나이로 민선 선거에 출마한 것도 도전을 두려워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14여년 동안 생활했던 공직을 떠난다는 것은 쉬운 결정이 아니었어요. 하지만 하급직에서 고위직까지 공직을 거치면서 공직자들의 모든 생활과 생리를 알았다고 자부합니다. 그래서 결정했죠. 공직의 연륜보다는 뜻을 펼 수 있는 적기가 왔을 때 과감하게 도전해보자고요. 이런 생각을 하고 나니 아쉬움은 남지만 공직을 떠나는 것에 대한 부담이 없어지더군요."

도전의 길은 순탄치 않았다. 당시 지역 구청장들이 총선에 출마하겠다는 의사를 피력하는 등 정치적 변화가 많았다. 고위층으로부터 대덕구청장 선거에 출마하라는 권유를 받은 뒤 집을 이사하는 등 준비를 해왔으나 현직 구청장이 총선출마를 포기해 무산됐다. 이런 가운데 서구청장의 유고로 어렵게 보궐선거에 출마하게 됐다. 그것도 정당 공천 과정이 쉽지 않아 선거일 며칠을 앞두고 결정됐다.
하지만 서구청장 보궐선거에 출사표를 던진 것이 그에게는 고배의 눈물로 되돌아왔다. 그는 '돈 없이 치르는 선거', '정책대결'을 주창했지만 현실정치의 한계를 뛰어넘지는 못했다. 30대 구청장 출마라는 신선함은 29%라는 지지율을 기록하는 선전을 하게 했지만 2등은 없었다.

"정말 아쉬웠습니다. 처음 쉽지 않은 싸움이라는 생각은 했지만 자민련에 대한 여론과 보수성향의 벽은 정말 높았습니다. 젊은 층이 투표에 많이 참여했다면 상황은 변했을지도 모르겠는데 젊은층의 투표율이 저조했다는 점도 아쉬움이 남습니다. 하지만 돈을 쓰지 않고 정책대결과 이미지 부각만으로 이 정도의 득표율을 기록했다는 것은 세대교체에 대한 많은 사람들의 의지가 반영된 것이라 생각됩니다."

청소년 문제·봉사활동 등에 눈 돌려

낙선의 고배는 우울한 나날의 연속이라는 결과물을 던져줬지만 청소년과 봉사활동이라는 또 다른 분야에 눈을 돌리게 하는 계기도 됐다. 대학때 교회 주일학교 교사활동을 했으며 유학시절 교포 2-3세들이 가족들과 단절한 채 생활하는 모습들을 지켜보며 청소년 문제에 관심을 갖게 됐고 낙선은 이를 실행에 옮기게 했다. 대전청소년문화원을 인수해 운영하게 된 것도 이 때문이다. 또 청소년들의 고민을 해결해 주기 위해 자원봉사 상담도 마다하지 않는다.

"유학시절 교포 2-3세대들의 탈선과 방황을 지켜보며 청소년들의 생각과 고민을 해결하는 단체를 운영하고 싶었습니다. 그 때문에 대전청소년문화원을 운영하게 됐고 이곳에서는 청소년 선도 웅변대회, 역사기행, 영상강좌 등을 통해 청소년들이 반듯한 사고와 행동을 할 수 있도록 도와주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이 사업은 계속해 나갈 것입니다."

청소년 문제뿐만 아니라 어두운 사회와 그늘진 이웃을 돌보는 일도 게을리 하지 않는다. 장애인들이나 불우한 이웃들을 찾아다니며 소중한 마음을 전하는 것은 물론 소록도 봉사활동 등 그들과 함께 할 수 있는 프로그램들을 만들어 가고 있다.
그는 이런 활동 등을 통해 낙선의 좌절과 낙심을 하나씩 걷어가고 있다. 오히려 이들을 찾아다니며 자신을 돌아보는 계기가 되는 지도 모른다.

"소록도 나환자촌에 봉사활동을 갔는데 웃음을 잃지 않고 감사하며 생활하는 그분들의 모습을 보고 내 자신이 부끄러웠습니다. 한번 낙선한 것 가지고 많은 시간 좌절과 낙심으로 허송세월했던 제 모습이 형편없어 보이더군요. 돌아오는 길에 마음을 다졌습니다. 이런 분들도 희망을 잃지 않고 사는데 젊은 내가 옹졸한 모습을 보여서야 되겠는가..."

둘째아이 태어난지 15일 만에 죽어

그에게 낙선은 두 번째의 좌절이다. 낙선은 정치적인 좌절이지만 자식을 잃어버리는 아버지로서의 아픔이 첫 번째 좌절이었다. 김이사장에게는 대학시절 만나 6년 열애 끝에 결혼에 골인한 부인 이근안씨(39)와의 사이에 두 아들이 있다. 큰아들은 중학교 1년생이고 막내가 초등학교 1년생이다.
터울이 많다는 질문에 머뭇거리며 꺼낸 이야기가 둘째 아이의 사망이다. 둘째아이는 91년에 10달동안 자라왔던 어머니 뱃속을 나왔다. 하지만 그에게 주어진 이승의 시간은 15일이었다. 태어날 때부터 심장이 좋지 않았던 둘째 아이는 서울대병원에서 수술을 받고 난 후에도 차도가 없어 부모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세상을 등졌다. 눈앞이 노랗게 변하고 귀에서는 멍하는 이명만이 들릴 뿐이었다. 아내는 죽은 아이를 붙들고 절규했고 결국 충격을 이기지 못해 넋을 잃기도 했다. 아이의 유골은 산에 뿌려졌다. 아이가 죽은 후 화목했던 가정에는 냉기가 흘렀고 부부는 의욕을 상실한 것처럼 멍하니 창 밖을 내다보는 시간이 많아졌다.

"둘째아이가 세상에 나온 지 15일만에 저승으로 떠나는 것을 보며 내 부모의 마음을 느꼈습니다. 그 일이 있은 후 집안분위기는 엉망이 되었지요. 아내는 한동안 말을 않고 살았고 모든 일에 의욕을 상실했습니다. 일에 파묻히고 신앙의 힘으로 가까스로 극복했지만 가슴속에 남아있는 아이의 한은 지울 수 가 없습니다."

기독교·운동권 집안서 자라

대전시 대사동에서 출생한 김이사장은 목회일에 일생을 바친 아버지 때문에 어린시절을 신앙과 함께 보냈다. 아버지는 45년여를 개척교회에서부터 현재 제일감리교회 목사까지 목회자로 지낸 분이다. 이 때문에 종교는 성장배경에서 떼어놓을 수 없는 부분이다. 지금도 가슴 속에 좌우명처럼 '남을 돕고 봉사하라'는 아버님의 말씀을 간직하고 산다. 특히 제일감리교회는 5공 시절 운동권 학생들이 모이는 이른바 '대전의 명동성당'이라 불리기도 했고 아버지는 운동권의 대부로 칭해졌다. 형님도 운동권에서 활동하며 두 번씩이나 투옥되는 고초를 겪기도 했다. 김이사장은 이런 환경 속에서 자라나 어려움 속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꿋꿋이 일어서며 항상 도전하는 마음을 길렀다.

김이사장은 꿈을 갖고 있으면 반드시 이루어진다고 생각한다. 또 모든 일에는 최선을 다한다는 마음으로 생활해 나간다. 그는 정치적인 꿈을 갖고 있다. 구청장에 만족하지 않고 대전시장, 중앙 정치무대에 진출하고 싶어한다. 젊은 생각을 행정이나 정치에 반영시켜 신선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다. 하루 2-3시간씩 인터넷에서 대화를 나누고 정보를 얻는 이유도 젊은 생각을 유지하기 위함이다.
하지만 젊음 하나만 믿고 뛰지는 않는다. 준비된 정치인이 되기 위해 오늘도 다양한 경험을 체험하는데 시간을 보낸다. 쉬지 않고 마음의 양식을 쌓고 그늘진 이웃이나 방황하는 청소년을 찾아다니며 그들과 대화한다. 14년의 행정경험과 법률지식을 바탕으로 상식이 통하는 사회를 만드는 게 그의 바램이다. 그리고 기다린다. 盡人事 待天命(진인사 대천명)의 자세로....


 ″현재에 만족하지 않고 꿈을 쫓는 도전자″

 친구 가 본 김영진- 김용효(변호사)


“자기관리가 철저합니다. 자신의 목표를 세워 놓고 밀어붙이는 추진력과 기획력이 돋보이기도 하죠. 미래가 보장된 기획관 자리를 버리고 뛰쳐나갔을 때는 가만히 자리보존하고 있으면 부시장은 할텐데 하며 안타까워했던 친구들이 많았습니다. 자기 자리에 만족하지 않고 꿈을 향해 도전하는 모습이 웬만해선 흉내도 못 내죠. 또 친구들 사이에 애경사가 있으면 바쁜 일정에도 동창들에게 핸드폰 문자 메시지를 보내는 등 신세대 감각을 유지하는 친구죠. 행정고시 출신이 미국에 2년 있는 동안 미국변호사를 취득한 것은 본인의 노력이 대단했다고 생각됩니다.
다만 친구로서 아쉬운 점이 있다면 젊은 정치인답게 기존 정치가들의 모습을 답습하지 말고 본인이 갖고있는 추진력과 참신성을 앞세워 주민을 위해 봉사할 수 있는 진정한 정치가의 모습을 보였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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