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비스정신 바탕 지역발전 일조할 것

 차세대인물탐구(행정)-박성효 대전시기획관리실장


한자성어 중에 역지사지(易地思之)란 말이 있다. 「처지를 바꾸어 놓고 생각한다」는 뜻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기 일만 생각하며 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 같은 자기 중심적 사고 때문에 인간관계에 문제가 생기는 것이다.
따라서 상대방의 위치에 서서 생각하면 인간관계를 원만하게 하고 대인관계에서의 불협화음을 해결할 수 있다.

대전광역시 기획관리실장 박성효(47). 그는 역지사지를 몸으로 실천함으로써 많은 사람들로부터 신망을 받는 공직자 중에 하나다. 그는 늘 '사고가 바뀌면 세상이 바뀐다'라고 주창한다. 주민을 위한 고객중심의 행정 즉, 주민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주민들의 사고에 눈높이를 맞춰 가는 진정한 서비스 행정을 실현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같은 그의 자세와 행정 경험이 높게 평가돼 국회의원·구청장 선거 때만 되면 이름이 거명되기도 하는 차세대 대전시장 후보군으로 꼽히고 있다.

박실장은 대전의 토박이다. 대전시 동구 원동에서 태어나 삼성초등-대전중-대전고를 졸업했고 공군에 입대해서도 대전에서 복무했다. 성균관대학을 다니던 4년을 제외하고는 40여년을 대전을 떠나지 않은 셈이다.
어린시절은 주류도매상을 하는 아버지 덕택에 경제적으로 별 어려움 없이 자랐다. 부모님들의 열정 때문에 이름을 4번이나 바꾸기는 했어도 간섭받지 않고 자유로운 가정 분위기에서 어린시절을 보냈다. 초등학교 시절에는 모범생이었고 학생회 간부도 지냈다. 관심있는 분야는 미술, 글짓기 등 많았지만 책읽기는 그의 가장 큰 취미였다. 돈만 생기면 서점으로 달려가 책을 샀다. 위인전기를 특히 즐겼다. 미국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을 통해 정직성을 배웠고 슈바이처 박사의 전기에서 사람의 격차를 두지 않고 타인을 생각하는 마음을 길렀다.

"초등학교 6년 동안 읽은 책이 성인이 돼서 읽은 책보다 많을 것입니다. 그 정도로 책읽기에 몰두했죠. 그때 읽은 책들이 교양적으로 큰 도움이 됐어요. 또 어린시절 인격형성의 계기가 되기도 했고요. 타인을 배려하고 사람의 상하를 구분하지 않는 마음은 지금도 제가 활동하고 대인관계를 형성하는데 기본이 되고 있습니다."

초등학교 시절 남을 생각하는 마음 길러

초등학교 시절 길러진 타인을 생각하는 마음은 성인이 돼서도 항상 마음속에 두고 있는 좌우명 같다고 말한다. 대전중학교 시절 일화도 있다. 중학교 급우 중에 불량스런 친구가 있었다. 친구의 집안은 정동 속칭 홍등가에서 여관을 하고 있었다. 주변환경이 그렇다보니 결석하는 날이 많았고 학교에서도 항상 뒷전에서 외곽을 맴돌기 일쑤였다. 친구들 사이에서는 기피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박실장은 불량소년에 대한 주위의 시선을 개념치 않았다. 그의 마음속에는 어떤 사람도 격을 두지 않는다는 마음이 자리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학교가 끝나면 필기한 노트를 들고 찾아가 전달했다. 결국 그 친구는 박실장의 정성에 고개를 숙이고 말았다.

박실장의 첫 번째 좌절은 서울대 진학의 실패였다. 첫 번째 고배를 마신 그는 왠지 세상 속에 덩그라니 놓여진 생각에 휩싸였다. 소속이 없다는 것 때문에 소외감마저 들었다. 버스를 탈 때도 학생표를 사지 않았다. 이런 방황은 성균관대학으로 진로를 결정케 했다. 하지만 원하는 대학이 아니어서 인지 대학생활은 흥미가 없었다. 다른 친구들도 대부분 그런 생각인 것 같았다. 결국 사회적으로 인정받기 위해서는 고시밖에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고 3학년때부터 고시준비를 결행했다.

"고시를 준비하게 된 것은 대학진학에 대한 실패를 만회하고 사회적으로 인정받겠다는 생각에서 였죠. 하지만 내 생각과 행동은 너무 오만했어요. 당구 치고 술 마시는데 많은 시간을 할애했고 1차에 합격해도 스스로 공부를 다하지 못했는데 무슨 자격이 있겠냐는 생각으로 2차 시험을 보지 않은 적도 있어요. 지금 생각하면 어리석고 부끄러운 행동이었죠."

오만함이 고시 실패 불러

결국 대학 재학 중에는 고시를 실패했다. 대전으로 내려온 박실장은 두문불출한 채 고민에 빠졌다. 자신의 생각만 믿고 오만방자하게 행동했던 지난날을 곰곰이 되씹어 보았다. 그리고는 생각이 짧았다는 결론을 내렸다. 늦었다고 생각됐지만 다시 고시에 도전해 보기로 했다. 헌데 난관은 또 있었다. 군입대가 길을 막았다. 할 수 없이 충남대 경영대학원에 적을 두게 됐다. 입대를 미루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보문산으로 짐을 싸서 들어간 그는 그동안의 오만함을 씻기 위해 밤을 낮 삼아 공부에 몰두했다. 결과는 밝은 미소였다. 79년 행시 23기로 합격했다.

"그때는 말할 수 없을 정도로 기뻤어요. 해냈다는 뿌듯함이 한꺼번에 몰려오더라고요. 나중에 알았지만 그때 집은 부도가 났었다고 하더군요. 그런데도 부모님들은 알리지 않고 뒷바라지를 했어요. 정말 소중한 경험이었죠. 하지만 이 모든 것보다 나를 기쁘게 했던 것은 내 자신의 오만함을 스스로 떨쳐 버리고 본래의 마음으로 돌아갔다는 점입니다. 주변에서 보내주는 축하보다는 그 것이 더욱 나에게는 의미 있었던 합격이었어요."

박실장은 대전을 사랑한다. 태어나고 자라 온 고향이기 때문이다. 고시합격 후 선택도 대전을 위한 것이었다. 지방행정을 통해 고향에 도움을 주겠다는 생각으로 내무부에 자원했다. 수습사무관을 마치고 공군 장교로 입대했다. 군에 입대해서도 대전 교육사령부에서 근무를 했다. 군에서는 중위임에도 불구하고 공군사령관 비서실장을 맡기도 했다.

"군에서는 지휘관들과 생활하면서 권력구조를 접했습니다. 사령관과 부사령관 사이에서의 갈등도 보았고 권력의 흥망을 지켜보기도 했습니다. 그 경험이 저한테는 현재 지방행정을 수행하는데 상당한 도움이 되었죠."

장애아 아들 출산 어두운 삶 돌아보는 계기

공군 중위시절 친구소개로 만났던 지금의 부인 백기영씨(43)와 어렵게 가정을 꾸몄다. 한때 양가에서 종교적인 갈등으로 인해 심한 반대를 했지만 이것이 오히려 박실장의 오기를 자극하는 계기가 돼 결혼에 골인했다. 하지만 단란했던 신혼은 첫아이를 낳으면서 고통으로 변했다. 출산과정에서 문제가 생겨 장애아가 탄생한 것이다. 그에게는 또 다른 좌절이었다. 한동안 집안은 우울한 분위기였다. 괴로움을 잊으려 술로 마음을 달랬지만 돌아오는 것은 공허함과 허탈함뿐이었다.

"죽고 싶었습니다. 아내와 아이의 얼굴을 보면 눈물부터 났어요. 하지만 수용했습니다. 나만 이런 시련을 주겠는가 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의 운명이라 받아들였지요. 이렇게 마음을 정리하고 나니 후련하더라고요. 아이는 처음에는 뛰지도 못했었어요. 여기 저기 다니면서 치료를 받았지만 장애는 사라지지 않았어요. 지금은 많이 좋아졌지만 정신적인 지체는 어쩔 수 없었어요. 앞으로도 이 아이를 위해서라면 무엇이던 할 것입니다. 내가 진 짐이니까요."

첫 아이의 장애. 그것은 장애인들과 어두운 곳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눈을 돌리게 하는 계기로 찾아왔다. 서구청장 등 공직생활을 통해 장애인 체련관 건립이나 '청 정 예' 등 정신운동의 전개 등이 이 때문이었다.

공무원의 생활은 생각했던 것보다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고향발전을 위해 헌신적으로 봉사하겠다는 생각으로 열심히 일했지만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는 걸림돌은 이런 의욕을 꺾어버렸다.

"기획계장 시절에 도지사 업무보고를 누구보다 잘했어요. 정말 잘했다는 칭찬도 들었고요. 그런데 그런 칭찬은 주위로부터 질시의 대상이 되더군요. 그 때문인지 공무원교육원으로 발령이 나더군요. 허탈했어요. 잘해보겠다고 하는 사람을 외곽으로 보내니 무슨 의욕이 있겠어요."

권위주의 행정 청산돼야

그는 권위주의 행정을 청산해야 한다고 부르짖는다. 역지사지의 자세로 고객중심의 행정이 이루어져야 서비스가 개선된다고 생각한다. 그의 생각은 공직에 발을 들여놓기 이전부터 갖고 있었던 것이다.

"한번은 부지사가 고시 출신들을 불러 권위주의 청산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었어요. 다른 사람들은 상사의 입맛에 맞는 말로 대충 넘어가더라고요. 그때 제가 말했어요. "부지사님 방을 줄여 직원 휴식공간으로 제공해 보십시오. 그렇게 하면 직원들이 다른 생각을 하게 될 것입니다"라고... 또 국장급들의 관사를 모두 없애라는 말도 했습니다. 단체장들이야 대표성을 갖기 때문에 필요할 수 도 있지만 국장급들은 굳이 관사가 필요치 않다고 건의했지요. 건의를 마치고 나니까 좌중이 찬물 끼얹은 것처럼 분위기가 냉랭해 지더군요. 그때 느꼈어요. 공직자들의 사고가 아직도 바뀌려면 멀었구나 라는 것을요."

박실장은 공직생활 중 가장 기억에 남는 시기를 서구청장 재직 때와 경제국장 시절을 꼽는다. 이 시절에는 정말 정의로움을 바탕으로 소신있는 행정을 펼쳤다고 자부한다.
1년 반 동안의 서구청장 재직은 젊음이 돋보였다. 본청에서 구상했던 아이디어를 집행할 수 있는 기회가 왔기 때문이다. 서구청장 시절 표방했던 대표적인 것은 주민복지 증진과 정신운동이었다. 특히 관심을 쏟았던 것은 장애인을 위한 공간을 만들겠다는 것이었다. 장애인 자식을 둔 아버지로서 관심을 갖는 것은 당연한 일인지도 몰랐다.
하지만 주민들의 반발은 거셌다. 겉으로는 장애인들과 정상인들이 함께 사용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든다는 데 이견이 없었지만 정작 장애인 시설 입지에 대해서는 님비현상이 대단했다. 우리 동네에는 안된다는 것이었다.

"장애인 체련관의 입지를 정하는 데 주민들의 반발이 거세 정말 안타까웠습니다. 향촌아파트 주민들은 아파트 값이 떨어진다는 이유로 극렬히 반대했습니다. 결국 대전시가 후퇴해 지금의 장소에 건립됐지만 장애인 정책은 실패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당시 행정적인 미숙함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곳이 장애인 문제를 원천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최적의 장소였기 때문에 정의로 밀어 부쳤습니다. 지금도 그 당시의 생각과 결정에 대해서는 추호도 부끄러움이 없습니다."

靑 情 禮 정신운동 큰 호응

박실장은 장애인 체련관 건립뿐만 아니라 정신지체아들을 위한 재활교육센터를 보건소에 설치하는 등 장애인에 대한 관심은 각별했다.
이와 함께 정이 넘치는 사회를 만들기 위한 정신운동을 시작했다. 구청장이 된 후 처음으로 내 건 구호가 '남의 말을 좋게 하자'였다. 또 각박한 아파트 생활에서도 정을 찾을 수 있도록 '엘리베이터 안에서 먼저 인사하기' '남에게 폐 끼치지 말자' 등의 정신운동을 전개했다. '靑은 마음에서부터 시작합니다', '情은 인간다움입니다' '禮는 건강한 사회의 기초입니다'-이른바 청정예 운동이다.

"사람의 근본은 정신에서 시작합니다. 정신이 살아있으면 무슨 일이든 해나갈 수 있습니다. 청정예운동은 신도시개발에 따라 다른 지역에서 이주해 온 주민들이 많기 때문에 함께 사는 사회를 만들기 위해서는 정신운동이 기초가 돼야 된다는 생각에서 운동을 펼쳤습니다. 이 운동에는 많은 주민들과 지식인들이 호응해 줘 화합과 정신적 개혁의 근간이 됐습니다."

박실장은 경제통이다. 특히 과학도시 대전으로서의 이미지를 만들어 놓은 사람이다. 5년여에 걸쳐 경제국장에 재임하면서 현장을 뛰어다나는 행정을 펼쳐 민과 관의 거리를 좁혔고 대덕연구단지와 대덕밸리를 탄생케 하는 초석을 다졌다. 기업인들을 일일이 쫓아다니며 애로사항을 들어줬고 대덕과학포럼과 과학동호회 등을 만들어 연구단지와 대전의 거리를 없애려 노력했다.

논리싸움으로 440억원 예산 절감

첨단과학산업단지(현재의 대덕테크노밸리) 조성 때에는 농림부의 반대로 난관에 부딪혔으나 매일같이 농림부에 오르내리며 농지전용에 대해 논리적으로 조목조목 따져 결국 공장용지를 확보했다. 이 때문에 440억원의 예산을 절감시키기도 했다.

"과산단지 조성 때에는 정말 오기가 발동했습니다. 일반적인 공무원들의 발상으로는 해낼 수 없었지요. 농림부와 무척 싸웠습니다. 결국 승리했지요. 한동안 논리싸움을 했지만 나중에 "대전시 공무원 중에 저런 사람도 있느냐"며 농림부로부터 칭찬을 받았습니다. 이런 과정을 지켜본 현대건설 이내흔 사장이 상무로 오라고 손짓하기도 하더군요."

박실장은 행정에 대해서만큼은 자신감을 갖고 있다. 그의 마인드는 공무원은 서비스를 제공해야한다는 것이다. 대전시는 시민이 주인이고 지배인은 시장, 공무원은 시민들이 고용한 직원일 뿐이라는 것이다. 공직자들이 인식을 바꾸어야 하는 것도 이 때문이다. 원칙 없는 행동과 시민 위에 군림하려는 발상은 이제 청산돼야 한다는 말을 서슴없이 한다. 갈등을 조정하는 사람으로서 아이디어를 만들어내고 이를 실천해 시민들이 더욱 편안하게 살수 있도록 만드는 게 행정이라는 생각이다.

박실장은 이를 위해 많은 생각을 하고 있다. 공직자로서의 갖고 있는 마인드를 하부에 심어 줄 중심체가 되고 싶어한다. 행정 관료로서 어느 정도 위치에 올라서 있는 상황에서 언제쯤 단체장으로 나설 것이냐는 질문에는 신중한 자세로 일관하고 있다.

지난번 서구청장 보궐선거 시 박실장이 나서면 따논당상이라는 것이 주위의 한결같은 평이 였지만 그는 출마를 하지 않았다. 이에 대한 주변에서의 평가는 지금은 나뉘고 있다.
과감하게 나섰어야 한다는 의견과 미래를 위해 신중했다는 얘기가 그것이다.

인터뷰는 무려 6시간이 걸렸다. 업무를 보아가며 나눈 이야기가 너무 많다. 인터뷰를 마치고 나오면서도 '소신행정'이라는 단어가 입에 맴돈다. '나도 모두가 예라고 할 때 아니라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을는지...


 ″공사 구분 확실한 추진력 있는 공직자″

 친구 가 본 박성효- 홍성표(서울신용보증보험 중부지역본부장)


“아이디어가 충만하고 매 순간마다 순발력이나 판단력이 상상을 초월할 정도입니다. 서구청장 시절에도 새로운 제도를 도입해서 구정을 살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많은 사람들의 의견을 수렴하고 좋은 의견이 있으면 주저 없이 실천하는 주민을 생각하는 행정을 펼쳤습니다. 학창시절에는 공부도 열심히 했지만 어려운 친구들 돕는 일이라면 팔을 걷고 나섰습니다. 행시에 합격하고 처음에는 친구들로부터 오해를 사기도 했어요. 워낙 공과 사 구별이 확실하다보니 출세한 친구 덕 좀 보려던 이들에게는 좀 서운하게 했던 모양입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다 이해하게 됐습니다. 이제는 오해했던 친구들까지도 박실장의 둘도 없는 팬이 되었습니다.
공직자로서의 덕목을 고루 갖춘 사람으로 우리 지역이 발전하기 위해서는 박실장과 같은 창의력과 추진력을 가진 사람이 시정을 이끌어야 한다고 감히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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