훌륭한 체육인 양성 밑거름 될 것

 대전체육 발전에 헌신하고파

 차세대인물탐구(체육)-이창섭 충남대 교수


인생은 정해진 틀에 의해 결정지어 질까, 아니면 본인의 의지로 개척해 나갈 수 있는 것일까?
철학자나 운명론자, 역술가 등은 자신의 생은 태어날 때부터 정해져 있는 길을 걷는 것이라고 말한다. 자신의 의지와는 관계없이 태어날 때 지니고 나온 운명적인 삶을 살아간다는 것이다. 이른바 운명론이다.

여기에 반해 삶은 개척해 나가는 것이라는 주장을 하는 학자들도 많다. 사람들은 태어날 때 부터 운명지어진 삶을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뼈를 깎는 노력과 본인의 의지로 자신의 생을 만들어 간다는 것이다. 개척론이다.

그러나 양쪽 주장 중 어느 쪽이 옳다고 단정지어 말할 수 없다. 많은 사람들이 운명론과 개척론이 적당히 혼합돼 인생이 꾸려진다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이창섭 충남대 체육교육과 교수(46).
그는 자신의 인생을 오기와 집념으로 만들어 간 인물이다.
이교수를 만나기로 약속한 18일 충남대 연구실을 찾았다. 방학이 시작돼서 인지 캠퍼스는 조용하기만 했다. 학기 중 젊음으로 활기를 띄던 캠퍼스는 긴 동면에 들어가며 차분하다 못해 정적이 감돌 정도였다.

이교수의 연구실은 이학관 3층에 위치해 있었다. 학생들의 스키 강습을 위해 아침에 강원도로 떠나야 했지만 인터뷰 약속 때문에 오후로 출발을 늦춰놓고 있었다.

연구실을 찾아가다 3층 복도에서 이교수를 만났다. 학생들의 성적을 집계하느라 분주했다. 이교수의 안내를 받아 들어선 연구실의 한쪽 벽면에는 각종 서적으로 채워져 있었고 다른 쪽 벽면에는 트로피와 전시물, 수업교재 등이 자리를 잡고 있었다. 연구실은 여느 교수들의 연구실과 다를 바 없었다. 이곳저곳 연구실을 둘러보던 중 벽에 걸려있는 액자가 눈에 들어왔다. 그곳에는 '精而正'이라는 세글자가 덩그라니 쓰여 있었다. "무슨 뜻일까"라는 생각 속에 자리를 옮겨 인터뷰에 들어갔다. 마침 댄스스포츠 강의를 하고 있는 이진교수(36)가 찾아와 인터뷰에 동석했다.

어린 시절은 가난과의 싸움

이교수의 어린 시절은 가난과의 싸움이었다. 부모님의 고향은 경북 상주였지만 신탄진으로 이사와 이교수를 낳았다. 7남매중 다섯째였다. 93년 신탄진을 떠나 올 때까지 40년 가까이 그곳에서 살았다. 아버지는 양조장에서 술을 떼다 파는 탁주공판장에서 술배달하며 어려운 살림살이를 꾸려나갔다.

"지금도 키가 작지만 어릴때는 정말 작았어요. 누님이나 형님들과는 달랐죠. 그래서 '너는 길에서 주워왔다'라는 말을 많이 듣고 자랐어요. 물론 다른 가정에서도 이런 말 많이 하지만요. 그땐 그런 말을 들으면 왜그렇게 서글픈지... 그럴때마다 큰 누님이 다독거려줬어요. 지금은 돌아가셨지만 어릴 때 생각하면 누님 생각이 많이 나요"

초등학교는 6살에 입학했다. 입학할 당시에는 다른 아이들보다 한 뼘은 작은 키에 셈도 제대로 못했지만 단단하고 야무진 구석이 많아 '짱돌'이란 별명이 붙었다. 공부는 꽤 잘했다. 6년동안 상위권에 들었으며 6학년때는 어린이 회장을 맡기도 했다.

초등학교를 마친 후 대전중학교로 진학했다. 시골이던 신탄진에서 대전중학교에 진학했다면 수재라는 소리를 들을 때였다. 중학교는 신탄진에서 기차 통학을 했다. 그러면서 아버지의 술배달을 도왔다. 가난한 살림을 그냥 볼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집이 어려워서 술 배달을 도와드려야 하지만 처음에는 죽기보다 싫었습니다. 배달가던 중 친구나 아는 사람이 지나가면 다른 길로 돌아가기도 했습니다. 자랑스럽게 여기던 대전중학교 모자를 한번도 쓰고 다니지 않았습니다. 나의 초라한 모습을 보여준다는 것이 자존심이 상하고 창피했습니다. 하지만 그런 것이 나의 인생을 만들어 가는 계기가 됐습니다. 어려운 살림 속에서 커가며 꼭 성공하겠다는 의지를 불태웠으니까요."

이교수에게는 술배달과 어려운 가정환경이 인생 개척의 의지를 불태우는 화봉이었다. 술배달은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를 지나 77년 조교생활을 할 때까지 계속됐다. 덩치 큰 자전거 뒤에 술독을 싣고 달리며 자신의 인생에 대한 의지를 새롭게 그려나갔다. 두명의 남동생에게도 가난이 인생을 좌우할 수 없다는 마음을 심어주기 위해 술배달을 시켰다. 지금 동생들이 이 같은 형의 마음을 알고 있을지 모르겠지만...

이교수의 인생은 중학교 시절부터 조금씩 변화됐다. 사춘기였을까? 1년에 일주일 가량은 그냥 학교를 가지 않았다. 공부는 곧잘 했다. 특히 영어는 자신이 있었다. 그만큼 영어에 대해 집착했다. 그러나 가난과 함께 밀려온 '학교를 왜 다녀야 하나'라는 회의감은 걷잡을 수 없었다. 이럴 때마다 찾은 곳이 시립도서관이었다. 도서관 틀어박혀 학교에서 접하지 못한 책들을 뒤적거리며 정체성을 찾아갔다.

은행원 되려 대전상고 진학

어려운 집안 사정은 인문계 고등학교로의 진학을 허용하지 않았다. 돈을 벌어야한다는 생각으로 그 당시 가장 유망직업인 은행원이 되기 위해 대전상고를 택했다. 대전상고로의 진학은 또 한번 인생 길을 바꾸는 선택이었다. 대전상고에 진학해서 체육과 처음 인연을 맺었고 그로 인해 지금의 체육교수가 되었다.

"1학년 때 였지요. 청소를 하고 있는 데, 한 친구가 시비를 붙더군요. 그 친구는 소위 말하는 '클럽아이'였어요. 빨리 청소를 끝내고 통학열차를 타야 했기에 그냥 무시해버렸죠. 청소가 끝난 후 으슥한 곳으로 끌려가 20여명에게 뭇매를 맞았어요. 얼굴이고 몸이고 할 것 없이 온통 피투성이가 됐어요. 통학기차를 놓쳐 피투성이의 몸을 이끌고 대전에서 신탄진까지 걸어왔어요. '운동을 해서 복수하겠다'고 한 맺힌 다짐을 해가며 걸었지요. 그 뒤 은행원을 포기하고 체육으로 진로를 바꾸었습니다."

그 사건이 있은 후 하루의 절반이상을 운동에 투자했다. 학교가 끝나면 곧바로 합기도 도장으로 달려가 밤12시까지 운동을 했다. 양쪽 장단지에 7kg짜리 모래주머니를 달고 매일 4km를 뛰었고 5,000번의 줄넘기를 했다. 덕택에 합기도 사범 자격증을 따기도 했다.

고교시절 인생에 도움을 준 또 하나의 일은 한문 습득이었다. 평소 영어에 몰두해서 영어는 자신이 있었으나 한문은 겨우 이름자 쓰는 정도였다. 지금은 국민은행 지점장으로 재직하고 있는 친구는 아버지가 한학자였다. 그 친구는 어릴적부터 아버지로부터 한문을 배우기 시작해 왠만한 대학생 이상의 실력을 지니고 있었다. 과제물 등을 한문으로 제출하고 노트 필기도 초서체로 써내려 가는 친구가 부러웠다. 친구에게 뒤지지 않으려 한문을 배우기 시작했다. 천자문을 익혀 한문을 알게되면서 공자 말씀이 담긴 한서들을 읽으며 마음의 양식을 쌓았다.

중·고등학교를 보내면서 이교수에게 가장 부러웠던 것은 수학여행 가는 친구들이었다. 이교수는 중·고교 시절을 보내며 단 한번도 수학여행을 가본 적이 없다. 술배달로 근근히 꾸려가는 집안 형편에 수학여행을 간다는 것은 팔자 좋은 소리였다. 수학여행에 대한 소리가 나오면 선생님의 눈길을 피했고 친구들이 수학여행 다녀 온 이야기를 나누면 슬그머니 일어나 자리를 떠야했다. 수학여행도 좋지만 어려운 집안을 위해서는 술배달을 도와야 하는 게 그에게 주어진 현실이었다.

″체육인은 절대 무식하지 않다″

대학을 간다는 것은 꿈도 꾸지 못했다. 뻔히 아는 집안형편에 언감생심(焉敢生心) 어떻게 대학을 생각하랴... 하지만 공부에 대한 집념을 버릴 수 없었다. 등록금이 적은 국립대를 선택했다. 충남대는 이교수에게는 자신의 인생을 완성시켜준 곳이었다. 처음 생긴 체육과로 진로를 결정했다. 입학해서는 축구부에 들어 주장을 하기도 했고 학회장, 학도호국단(지금의 학생회) 체육부장을 맡기도 했다. 럭비풋볼 선수로도 뛰었을 정도로 체육에 미쳤다. 교수님들의 성원도 대단했다. '국내 인물보다 국제적인 인물이 돼라' '체육인은 무식하지 않다. 체육인도 할 수 있다'며 공부에 대한 집념을 불어넣어 줬다.

"그 때 교수님들의 성원이 없이는 불가능했습니다. 매일 같이 교수님들이 '능력있는 데 왜 공부하지 않느냐. 나중에 교수시켜 줄테니 학업에만 전념해라'며 공부를 권유했습니다. 그 이후로도 교수님들은 제가 공부하는 데 물심양면으로 많은 후원을 해 주셨지요. 오늘의 제가 있는 것은 모두 그분들 덕택이예요."

이교수는 결정을 내렸다. 겨울방학에 짐을 싸서 둘째 누님이 살고 계신 충남 청양으로 들어갔다. 친구들이나 주변 사람들로부터 격리되어 공부만 하겠다는 각오였다.

"그때 진짜 공부 열심히 했습니다. 먹고 세수하는 시간 이외에는 책과 씨름했지요. 하루 20시간씩 책상 앞에 있었어요. 특히 국제적인 인물이 되려면 영어는 필수라는 생각에 영어공부에 전념했어요. 졸음을 쫓으려고 방에 연탄불을 넣지 못하게 하고 냉방에서 공부를 했어요. 이렇게 공부하지 않으면 죽는다는 생각이었어요."

이교수의 집념은 곧바로 나타났다. 교육대학원 시험에서 다른 계열 지원자를 물리치고 당당히 체육과 출신이 1등으로 합격했다. 조교와 전임강사 시험에도 영어는 1위였다. 토플점수가 600점에 달하기도 했다. 충남대에서는 '이창섭=영어'로 통할 정도였다. 지금도 이교수는 동시통역을 하는 드문 교수 중에 한명이다.
77년 졸업과 동시에 조교로 채용됐고 충남대는 유례없는 혜택을 주었다. 조교직을 휴직하고 군에 입대하도록 특혜를 주었다. 이 같은 혜택은 충남대 역사상 유일무이한 것이다.

군생활에서도 공부와의 사투는 계속된다. 군생활은 서울 수색에서 했다. 이교수가 맡은 보직은 사단전령 병력계. 군대에서 머리를 썩힐 수 없다고 생각한 이교수는 상관과 담판을 지었다. 공부를 할 수 있게 해 달라고. 상관도 용인했다. 상관은 기회만 있으면 외출과 심부름으로 밖에 내보냈고 그 틈에 학원을 다니며 공부했다.

"군대라는 곳이 공부할 수 있는 여건이 아니기 때문에 자칫하면 머리를 퇴보시킬 수 있어요.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누구도 서기 싫어하는 새벽 4시 불침번을 자청했지요. 새벽에 불침번을 서며 라디오에서 방송하는 생활영어를 들었어요. 매일 그렇게 반복하다보니 내무반도 자연스럽게 공부하는 분위기로 바뀌더군요. 고참의 배려로 사역 등에서도 열외를 받았어요. 군대에서도 하루 7-8시간은 영어공부를 하면서 지냈어요. 정말 운이 좋았지요."

유학 떠난 3일후 부친 사망

이교수는 인터뷰 도중 운이 좋았다는 말을 여러번 했다. 하지만 그것은 운이 아니었다. 운이었다면 운명으로 받아 들였겠지만 분명 자신의 노력으로 개척한 것이었다.
군대를 마치고 교수로 임용됐다. 교수가 된 후 3년이 지난 86년 미국 U.C. 버클리대학에 1년간 객원교수로 나갔다. 이곳에서 있는 1년동안 학위를 취득하겠다는 생각을 가졌다. 하지만 1년으로는 학위를 받기가 힘겨웠다. 결국 학위의 꿈을 버리고 귀국했다. 학위를 받지 못한 것에 대한 분노는 94년에 다시 미국으로 유학을 떠날 때까지 8년간을 가슴속에 의지로 불태웠다. 94년 다시 유학길을 떠났다. 경제적으로 어려웠지만 강행하기로 결심했다. 충남대에서도 도움을 줬다. 유학 떠난 2년여간을 출장으로 처리해 줘 무사히 학업을 마칠 수 있도록 도와줬다.

유학을 떠난다는 결정을 하고 한참동안 망설였다. 폐암으로 와병 중인 아버님이 마음에 걸렸다.
"어느 날 병석에 누워 계신 아버님이 저를 부르더군요. 아버님은 힘든 투병 중에 소를 팔아 50만원을 만들어 주셨습니다. 그 돈을 내밀며 유학을 떠나라고 말씀하시더군요. 망설이던 저는 눈물을 흘리면서 그 돈을 받아 유학길에 올랐습니다. 그런 아버님은 제가 출국하고 3일만에 운명하셨습니다. 집에서는 유학을 접고 돌아 올까봐 알려주지도 않았습니다."

미국 뉴멕시코 주립대학 유학은 가슴속에 살아 계신 아버지의 모습을 담고 생활했다. 악착같이 공부했고 꼭 이루겠다는 일념밖에 없었다. 2년여만에 학위를 취득했다. 학위를 마치고 돌아온 이교수는 자신이 배운 지식을 제자들에게 전수하는데 몰두하고 있다. 이교수는 충남대가 자신에게 보내준 성원의 몇배 이상을 되돌려 주어야 한다는 의무감을 갖고 있다.

"제가 입은 은혜는 충남대가 발전하고 우리 제자들이 훌륭한 체육인으로 커 가는 밑거름으로 되돌려 줄 것입니다. 그것만이 은혜에 보답하는 길이라 생각합니다. 여건이 허락한다면 좋은 조건 아래서 전국 최고의 운동부를 육성해 보고 싶다는 꿈도 갖고 있습니다."

이교수는 제자들에게 엄격하다. 어떤 경우든 수업을 빼먹는 것은 용납하지 않는다. '하려면 확실하게 하라'. 이교수가 제자들에게 강조하는 말이 있다. 그렇지 못하면 학교를 그만두라고 직설적으로 가슴을 찌르게도 한다.

'하려면 확실하게 하라'. 낯설지 않은 말이다. 어디에서 보았을까, 한참을 생각해 보니 처음 연구실에 들어섰을 때 눈에 들어오던 액자의 내용이 아닌가. '精而正'. 이교수는 이 문구의 뜻을 '확실한 것이 제대로 된 것'이라고 풀이했다. 올바른 한자성어는 아니지만 자신이 만들어 실천하는 좌우명이라는 말을 덧붙였다.


젊은 지도자 많아 대전체육 미래 밝아

"대전체육은 미래가 밝습니다. 젊은 체육지도자들이 많이 배출되고 있고 여건이나 지원도 예전에 비해 훨씬 좋아졌습니다. 이제는 체육인들이 이질감을 없애고 결집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대전체육의 앞날을 열 수 있습니다. 원로들과 전문가들이 참여해서 함께 대전체육의 미래를 설계하도록 자문을 구해야 합니다."

대전체육의 중심 축에 서 있는 이교수는 대전체육의 미래를 걱정한다. 정치성을 배제하고 대전시와 대전시체육회가 협력체제를 이룬다면 탄탄대로라고 전망한다. 이를 위해서는 시체육회가 독립성을 갖고 바로 서야한다는 지적도 잊지 않는다. 또한 원로들이나 전문가들로부터 자문을 받고 의견을 수렴할 수 있는 연결고리를 만들어야 체육인들 간의 결집을 이룰 수 있다고 대안을 제시한다. 여건이 허락한다면 대전체육 발전을 위해 몸을 던지고 싶다는 말도 한다.

이제 교수로 재직한지 20년에 가까워진다. 그러나 이교수는 자신을 낮추는 것을 게을리 하지 않는다. 항상 자신을 되돌아보고 성찰한다. 혹시 나태해지지 않았는가 자신에게 항상 채찍질을 가한다. 한가지라도 최고가 되야 한다고...

조교시절 만난 부인 김미지씨(42)와 올해 대학에 들어가는 큰아들 규태군(17), 내년에 초등학교에 입학하는 선아양(6) 등 4명이 이교수의 가족이다.
시내서 우연히 만나 커피한잔 마셨던 인연이 결혼으로 이어졌던 아내에게는 항상 고맙고 미안해한다. 어려운 생활 속에서도 흔쾌히 부모님을 모셨던 아내가 그냥 감사할 따름이다. 큰아들은 올해 충남대에 원서를 넣었고 합격이 무난할 것으로 보인다. 제대로 뒷바라지 못해 줬는데도 건실한 청년으로 커 줘 대견하기만 하다.
요즈음 이교수 부부는 유학 때문에 늦둥이로 태어난 딸 선아에게 정신이 빠져 있다. 미국 유학가서 낳은 막내딸의 재롱은 40대 중반을 넘어선 중년에게는 눈에 넣어도 안아플 만큼 그저 사랑스럽다.

이교수에게는 못다 이룬 소원이 하나 있다. 미국 유학가서 학위를 받은 후 미국으로 초청해서 박사모를 씌워 드리고 싶었는데 유학 중에 부모님이 모두 돌아가시어 소원을 이룰 수 없었다. 유학에서 돌아와 부모님 영전에 학위를 바쳤지만 생전에 해드리지 못했는데 무슨 소용이겠는가. 가슴 한켠에 항상 무거운 짐으로 간직하고 있는 것이 이 부분이다.
"조금만 더 노력했으면 부모님들이 박사모를 쓰고 즐거워하는 모습을 볼 수 있었는데..." 이교수는 끝까지 말을 잇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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