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텔·유흥업소 등 발 디딜 틈 없어

 가족과 함께 하는 차분한 송년모임 아쉬워


S그룹 김모과장(40)은 지난주 갑자기 병원에 실려가 병원 신세를 지고 있다.

회사 직원들과 술을 마신 다음날 갑자기 얼굴이 붓고 혈뇨가 나와 병원을 찾아 피 검사했더니 ′급성 신장염′이라는 진단이 나왔다.
의사는 과음 탓으로 콩팥에 염증이 생긴 것이라고 설명했다.

김과장은 ″몸 상태가 좋지 않지만 연말에 술자리를 피할 수도 없고…″라며 걱정했다.

비단 김과장 뿐만 아니라 누구나 12월은 마냥 부담스럽다. 각종 송년회 일정이 빼곡이 메모된 달력은 보기만 해도 가슴이 답답하다.

21일 금요일 오후6시 어둠이 내려앉는 시간.
대전 최고의 유흥가 유성 봉명동을 찾았다. 네온사인 불빛이 하나, 둘 늘어가면서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리베라호텔과 유성관광호텔 인근을 중심으로 많은 차들이 진입해 퇴근시간과 맞물려 교차로마다 차량들의 정체를 빚고 있었다.

화려한 네온사인이 번쩍거리고 유흥업소에서 틀어놓은 음악소리가 사람의 마음을 들뜨게 했다.

6시 30분 고급 일식집을 들어가 보았다. 아직 이른 시간인지 가게에는 손님은 많지 않았다. 그러나 주인의 표정은 밝아 보였다.
“오늘도 예약이 3팀이나 있어요. 12월 한달 동안은 장사할 맛이 납니다. 또 오시는 분들이 가격에 구애받지 않고 주문하는 경향이 있어 일년중 매상이 가장 좋습니다”

사정은 호텔도 비슷하다. 최근 몇년 동안 IMF와 뒤이은 경기 불황으로 이렇다할 행사를 갖지 못했던 기업들이 최근 호텔에서 행사를 다시 갖기 시작했다.
호텔마다 망년회와 사은회, 세미나 등 각종 행사 예약이 폭주, 12월 들어 예약이 일찌감치 끝나고 있다. 인근 주변의 호텔 7시가 넘어서면서 주차장이 모자랄 정도였다.

7시가 넘어서면서 유성일대에는 본격적인 주차전쟁이 시작됐다. 이면도로는 이미 빈자리가 없을 정도로 많은 차들이 들어서 있고 술집 주변을 빙빙 도는 차량들로 인해 곳곳에서 정체가 눈에 들어왔다.

7시 30분 다시 그 일식집으로 향했다.
한시간 전과는 전혀 다른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홀과 방에는 이미 많은 손님들이 자리를 잡고 있고 회를 뜨는 주방장손은 무척 바빠져 있는 상태였다.

이곳 주방장은“예약시간이 비슷하기 때문에 무척 바빠요. 그렇다고 미리 회를 떠놓을 수도 없고...하지만 손님이 많으니 기분은 좋네요”라며 말하는 동안에도 계속해서 회를 뜨는 모습이 정말 바쁜 모양이다.
가게 안은 시끌벅적 했다. 이쪽 저쪽에서 외쳐되는 ‘위하여, 건배’소리가 메아리처럼 들려 왔고 벌써부터 술이 취한 듯 제대로 몸을 가누지 못하고 화장실을 찾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었다.
모 증권회사에 근무한다는 김용성씨(32)는“어제도 대학 동창들과 망년회하고 오늘은 직원들과 하고 있어요. 계속되는 술자리로 몸은 피곤해도 12월에 이런 모임 없으면 또 내가 사회생활을 잘못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어 웬만하면 모임에 빠지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며 주는 술잔 안 받을 수 도 없고 요령껏 마시려고 노력한다고 덧붙였다.
이미 술이 취해 보이는 김씨는 찬바람이라도 쐬고 와야겠다며 밖으로 나갔다.

10시가 넘어서면서 거리에는 술에 취해 비틀거리는 사람들이 늘어나기 시작했다. 비틀거리며 도로로 내려와 택시를 잡는 모습은 보는 사람이 아찔할 정도였다.
술에 취해 길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사람, 전봇대를 붙잡고 구역질을 하는 사람 등 천태만상의 모습이었다. 이런 와중에서도 한쪽에서는 삼삼오오 모여 2차 장소를 물색하고 있었다.
이들 중 회사 망년회를 갖는다는 박모씨 일행을 쫓아가 보았다.

이들이 찾은 곳은 유성의 M단란주점.
주변 주차장에는 에쿠스, 그랜저 등 고급 승용차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10여개의 방에서는 접대부들과 손님들이 화끈한(?) 술판을 벌이고 있었다. 방마다 술 취한 남자가 접대부를 부둥켜안고 진한 행위를 일삼고 있었다.

홀 서빙을 하고 있던 웨이터는“유성의 술집들은 10시정도만 되면 손님들로 꽉 찬다”며 “송년모임도 있지만 평소에도 이와 크게 다를 바 없다”고 말했다.

회사원 박모씨는“2차는 기본, 3차는 필수, 4차는 선택 아닙니까. 술 종류도 폭탄주, 금테주, 속주(速酒), 원샷, 충성주, 회오리주, 사발주 등 술의 제조법도 다양한데 오늘 전부 한번 마셔봐야지요”라며 혀 꼬인 소리를 늘어놓는다.
수 차례의 양주와 맥주가 더 들어간 후 박씨가 있던 방의 여흥이 끝난 듯 했다. 일행이 술값을 계산하는 동안 술시중을 들던 여성들이 외출복으로 갈아입고 남자들의 팔짱을 끼기 시작했다.
아마 소위 말하는 2차를 나가는 모양이다.
거리로 나선 이들은 일부 택시를 잡고 사라지고 또, 가까운 여관으로 향하는 모습이 목격 됐다.

술잔이 돌아가고, 폭탄주가 제조되면서 2차와 3차로 이어지는 망년회의 풍경은 올해도 여느 해와 다르지 않았다.

전문가들은 흥청망청되고 있는 망년회 현상에 대해 “사회가 어둡고 경제가 어려울 수록 퇴폐향락 문화가 발달되는 기현상이 벌어진다”면서 이를 장기간 방치할 경우 회복할 수 없는 사회병폐 현상들이 우후죽순 생겨난다고 입을 모은다.

옛사람들은 술을 멋으로 마셨다.
‘꽃 사이에 홀로 앉아 한잔 술을 마시니 달이 찾아와 그림자까지 셋이어라. 달도 그림자도 술이야 마실 수 없지만, 그들과 더불어 이 봄 밤을 마냥 즐기리’라는 중국 주선(酒仙) 이백(李白)의 시 구절에도 술을 멋으로 마시는 풍류가 있다. 그러나 지금 우리나라는 송년회라는 거대한 술독에 빠진 느낌이다.

최근 들어 건전한 망년회가 늘어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가족과 함께 하는 건전한 모임이 벤처기업을 중심으로 활성화되고 있고 신세대들 사이에서는 등산이나 찜질 방을 찾아 망년회 장소파괴의 바람을 일으키기도 했다.

올 연말은 가족과 함께 한해를 뒤돌아보며 새로운 한해를 계획하는 뜻깊은 송년회를 가졌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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