밝은 기사 크게 다루는 발상 전환을

 전직언론인을 찾아-해직기자 1호 계룡병원 길쌍석이사


계룡병원 길쌍석 이사(62)는 80년대 군부 독재시절 대전지역에서 맨 먼저 직장을 그만 둔 해직기자 출신이다. 88년 민주화 이후 약 두 달 동안 KBS대전방송국에 잠시동안 복직하긴 했지만 80년에 마이크를 놓았으니 꼭 21년이 흘렀다. 하지만 그는 여전히 방송기자였고 언론인이었다. YTN을 하루 종일 켜 놓고 있는 버릇이 그랬고 자신과 관련된 신문을 색이 바래도록 스크랩북으로 간직하고 있는 모습이 또한 그러했다.

〃방송사를 그만 둔 지 20여년 이나 지났는 데 아직도 선배들이 후배로 봐주고 후배들이 선배로 인정해주는 게 고마울 따름입니다. 80년대와 같은 암울한 시대는 다시 와서는 안된다는 생각을 늘 갖고 있습니다. 아직도 그 때 피해자들이 아무런 보상도 받지 못하고 생활고에 시달리는 분들이 많습니다. 정부에서 뒤늦었지만 지금이라도 이들의 마음을 껴안아 줄 수 있는 대책을 세웠으면 합니다. 〃

대전시 중구 오류동 계룡병원 별관 2층에 자리잡은 사무실에서 길이사와 대면하자마자 '나는 숙청기자 1호'라며 말문을 열었다. 숙청이라는 말의 뉘앙스가 나쁘게 다가오는 데도 불구 그는 해직되면서 내놓고 떠들고 다녔다. 이면에는 '너희들이 숙청했으나 남들이 어떻게 보느냐가 중요하다'며 사회의 심판을 받아보자는 속셈이 있었던 듯 하다. 정말 잘못하고 부정한 짓이 있었다면 그렇게 할 수 있었을 까.

길이사는 본인의사와는 상관없이 강제 퇴직을 당하면서 새로운 인생을 보란 듯이 성공시켰다. 1965년 KBS 신입기자로 대전에 근무할 당시 나이는 약관 25세. 이때 기억을 오래 간직하고 있었다.

〃그 때 가장 나이가 어렸습니다. 선배들도 많이 아껴주었습니다. 어쩌다 보니 지금까지 왔지만 기자 생활은 꼭 16년동안 했습니다. 많은 기억들이 있지요. 속초방송국 보도실장으로 갔다가 대전에서 온 선후배를 붙잡고 엉엉 흐느껴 운 일도 기억에 남지요 〃

이중 직업 문제삼아 해직 당해

해직이 되는 과정은 참으로 아이러니컬했다.
처남이 용두동에 무궁화 백화점을 짓고 당시 KBS 길기자에게 이사를 맡아달라고 했다. 그것도 법인등기상 이사였다. 말하자면 법인요건을 채우기 위한 직책이었다. 그런데 처남을 데리고 대전일보에 인사를 갔는 데 그게 문제가 되었다. 백화점 사장이 내방을 하니 당연히 본사 내방을 쓰게 되고 거기에 무궁화 백화점 사장과 이사로 직함이 나갔다. 그러니 정보기관과 본사에서 이중 직업으로 문제를 삼게되었고 해직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어처구니가 없는 일이지요. 당해보지 않는 사람은 모릅니다. 이중직업을 문제삼은 군부에 할말이 있을 수가 있나요. 사표를 쓰기 위해 KBS에 들어갈 때는 현관으로 갔으나 나올 때는 차마 그곳으로 통과하기가 싫었지요. 그래서 짐을 창문너머로 다 던져 놓고 그런 다음 창문으로 통해서 나왔습니다.〃

그 날 저녁 이제는 중년이 된 인기 탤런트 주현씨의 형 주일청 프로듀서가 위로 차 집을 방문했으나 맥주 3잔에 나가떨어지는 동료를 보고 씁쓸하게 발걸음을 돌렸다.

해직 기자 1호이면서 복직기자 1호이기도 한 길 이사는 짧지 않는 기자생활동안 사연도 많았다. 전국적으로 복직한 다음에 사표를 낸 사람도 자신밖에 없었으며 89년 12월5일로 복직하여 이듬해 1월5일자로 사직을 했으니 해수로는 2년, 개월로는 두달, 그리고 기간은 한달만이었다.

당시 대전일보 박근태 기자와 중도일보와의 인터뷰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해직의 불명예를 씻고 언론계 후배들에게 길을 열어주게 되어 기쁩니다. 나 자신은 물론이고 가족까지 겪어야 했던 해직의 고통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였지요. 8년여 세월이 지났어도 택시를 타면 아직도 방송국으로 가자고 할 때가 가장 마음이 아팠습니다.〃

해직과 복직 과정을 거치면서 약 8년간 기본급을 한꺼번에 받아 몫 돈을 만든 게 그나마 위안이라면 위안이 됐다. 약 5천만원에 달했다. 하지만 가슴에 뭉쳐진 응어리는 돈으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었다.

봉제공장 운영하다 실패하기도

해직 후 반공연맹 충남도지부 지도과장으로 23개월간 근무하다가 봉제공장을 차렸다. 자양동과 유천동에서 경험도 없는 공장을 하다가 그 때 돈 수천만원을 날렸다. 큰돈이었다. 사업 실패 후 다시 찾은 직장이 을지병원 원무과장이었다. 86년도 일이다.

을지병원에서 다시 계룡병원 창설 멤버로 참여하여 현재 관리를 담당하는 이사에 이르고 있다. 그는 여전히 후배들에게 좋은 기사 밝은 기사 작성을 당부하고 있다.
〃신문이나 방송을 보면 어두운 기사는 크게 다루고 밝은 기사는 1단으로 깔아버립니다. 어두운 것보다 밝은 것을 크게 다루는 발상의 전환이 필요합니다. 〃

KBS를 보고 있으면 지금도 정을 느낀다는 길이사는 부인 전희자 여사(59)와의 사이에 딸 둘을 두고 있다. 장녀 길성희씨(38)는 서대전 사거리에 한국치과를 하는 이경훈씨와 가정을 이루고 있고 둘째 딸 길국희씨(32)는 영국에서 석, 박사학위를 받아 영국인과 국제 결혼, 현재 남편 조지 출라스씨와 함께 영국 요크대학교에서 부부 교수로 일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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