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영수의 연기사랑]행복도시에 남겨진 세종대왕의 흔적

◆ 연기군에 건설되는 행정복합도시는 세종대왕과 역사적 연관이 깊은 '세종시'로 결정됐다.
연기군에는 행정중심복합도시가 건설되고 있다. 이는 국가 균형발전이라는 명목으로 현 정부가 추진하는 커다란 국책사업이다.

처음에는 '신행정수도 건설'이라는 이름으로 추진되다가 이를 반대하는 이들이 헌법 소원을 내자 헌법재판소에서는 위헌판결을 내렸고, 현 정부가 뒤로 물러 설 수 없다고 추진된 것이 행정중심복합도시이다.

신행정수도와 행정중심복합도시와의 차이점은 청와대가 이곳으로 옮겨 오느냐, 그렇지 못하느냐의 차이점이다.

즉, 청와대가 오게 되면 나라의 수도가 옮겨지는 것이고, 청와대가 오지 않으면 행정기관다수가 이곳으로 옮겨져서 청와대가 옮겨 올 때까지 그 도시를 유지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보면 연기군은 한낮 작은 시골 군에서 대한민국의 중심 군이 되는 것이니 오래 살고 봐야 할 것 같다는 소리가 들리는 것이 무리는 아니다.

연기군에 건설되는 행정중심복합도시를 '세종'이라 한 이유는 콕 집어서 이것 때문에 '세종'이라 했다고는 할 수 없지만 공교롭게도 연기군에는 세종대왕과 연관된 내용이 많다.

그 첫 번째 이유는 연기군이 아니었다면 세종의 가장 큰 업적인 한글 창제가 어려웠을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연기군 전의면 관정리에서는 매년 왕의 물 축제를 개최한다. 관정리 약수를 '왕의 물'이라 부르는 것은 바로 세종대왕과 연관되어 그리 부르는 것이다.

세종대왕은 한글 창제를 위하여 많은 책을 보았으며 그 때문에 눈이 나빠졌고, 결국 앞을 잘 못 보는 상태까지 갔다. 왕이 되기 전부터 허약한 체질인 왕은 운동을 하지 않아 비만에다 피부병이 있었고, 특히 눈병은 가장 괴로운 병이었다. 다른 병은 온양에 있는 온천으로 어느 정도 치료를 하였는데 눈병은 더욱 심해졌다.

왜냐하면 뜨거운 온천으로 치료하면 눈이 더욱 나빠지기 때문이다. 그때가 1437년이니 세종께서 왕성하게 활동 하실 때였다.

◆ 연기군 전의면 관정리에서 열리는 '왕의 물'행사는 세종대왕이 전의약수로 눈병을 낳게 한것을 기념하는 행사이다.
1441년 정월에는 왼쪽 눈이 실명할 정도가 되어 어두운 곳은 지팡이를 짚고 다녀야 할 정도로 눈병이 심해지자 온양과 강원도 이천의 온천으로 치료 하였으나 효험을 보지 못하였고 날로 심해지자 정사(政事-나라를 다스리는 일)를 친히 다스릴 수 없다 하여 첨사원(詹事院)을 두고 세자로 하여금 섭정하게 하려고 하자 대신들이 울면서 반대를 하게 되었다.

1443년에는 한글창제를 위하여 언문청을 설치하고 연구에 몰입할 때 전의에 사는 노인이 궁궐을 찾아와 전의 관정리에 있는 신비의 약수가 있으며 눈병에 특효라고 아뢰었다.

이를 초수(椒水)라 부르며, 청주, 목천, 전의 세 곳에 있다고 했다. 세종대왕은 기뻐하시며 노인에게 목면 20필을 선물로 주고 우선 가까운 청주 초수에 눈병이 난 사람을 보내어 임상실험을 하니 눈병에 특효가 있다해 그곳에 행궁을 짓게 하고 납시어 치료를 하였는데 처음에는 나은 듯 하였으나 원상태로 돌아가자 다음 약수를 알아보라 하였다.

두 번째로 전의 초수였다. 그 곳에도 사람을 보내어 치료한 결과 청주보다 더 효험이 있어 왕은 전의에 행궁을 짓도록 명을 내렸다. 

행궁을 짓기 위하여 터를 닦고 재목을 옮기는데 왕은 행궁 짓는 것을 중단 시켰다. 그 이유는 가뭄이 심하여 백성이 힘들어하는데 임금이 많은 비용을 들여 행궁을 짓는다는 것이 마음에 걸렸기 때문이다.

세종은 백성을 우선으로 생각하였기에 공사를 중단케 하고 대신 그 물을 궁궐로 떠올리라고 명을 내렸다.

전의에 있는 약수는 우물에서 물을 떠서 시간이 흐르면 물속의 가스가 날아가 약효과를 내지 못하기에 전의에서 떠서 궁궐까지 옮기면 이미 약 효과가 빠진 맹물에 불과 하기 때문에 곤란하였다.

전의에서 궁궐까지는 걸어서 열흘이고, 말 타고 3일이 걸리니 약 효과를 내려면 해가 질 무렵 물을 떠서 동이 틀 무렵까지 궁궐에 도착해야 되기 때문에 시간으로는 6시간 내에 도착해야 했다.

그런데 이런 초특급 운송작전이 성공을 거두었다. 전의에서 궁궐까지 몇 개의 역을 선정하여 이곳에 가장 잘 달리는 말을 2필씩 주고, 말을 가장 잘 모는 사람을 압직(押直)이라 하여 3명씩 배치하고, 성실하고 사리에 밝은 사람 2명을 선발하여 감고(勘考)라 하여 물을 뜨게 하였다.

이는 왕의 물이기에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감고가 저녁에 물을 떠서 마개를 봉한 뒤 서명을 하여 말에 실으면 압직은 손 살같이 달려 다음 압직에게 넘겨주고 그렇게 하여 동이 트기 전에 궁궐에 도착하면 그 물로 마시고 눈을 씻으면 되는 것이었다.

그것이 성공하게 되었고, 세종대왕은 매일 아침 전의 약수를 마시면서 치료한 결과 1445년 4월 13일 영의정 황의, 좌의정 신개, 우의정 하연, 좌참찬, 이숙치, 우참찬 정인지가 와서 문안 인사를 올리니 세종께서 병이 다 나았다고 기뻐 하셨다.

그러기에 1446년 9월에 한글(훈민정음)을 반포하게 되었다. 그러니 전의 약수가 없었으면 세종대왕께서 과연 한글창제를 무사히 마칠 수가 있었겠는가. 그 뿐만이 아니다.

행정중심복합도시가 건설되는 지역에서 중심 역할을 하는 연기군 남면 진의리, 양화리, 나성리, 종촌리 일대에는 부안임씨들이 많이 살고 있다.

부안임씨 전서공파의 시조는 임난수(林蘭秀)인데 고려말기에 공조전서(工曹典書)의 벼슬을 지내셨다. 공조전서는 오늘날 건설부장관과 같은 직책이다.

전서공(典書公) 임난수(林蘭秀)장군과 세종대왕은 밀접한 관계가 있다. 임난수 장군은 고려의 충신으로 최영장군과 탐라(지금의 제주도)를 정벌하는데 큰 공을 세웠다.

싸움도중 팔이 한쪽 잘리었는데 잘린 팔을 화살 통에 꽂고 계속 싸워 승리로 이끌었는데 이성계가 조선을 건국하자 한 하늘에 두 임금을 섬 길 수 없다며 불사이군(不事二君)으로 모든 관직을 버리고 고향으로 가기 위하여 금강을 따라 내려가다 전월산을 바라보니 산의 모습이 마치 자신의 성인 임(林)자와 같아 연기군 남면에 정착하게 되었다.

◆ 임난수가 고려왕의 건강을 빌기 위해 맑은 물을 뜨던 용천. 
임난수는 매일 전월산에 올라 맑은 우물을 떠 놓고 고려왕의 건강을 빌었는데 높은 바위에 올라 묵상하며 고려의 왕에게 절을 올린 곳을 부왕봉(俯王峰)이라 하고 바위에서 묵상한 곳을 상려암(想麗巖)이라 부르고 있다. 또 맑은 물을 떴던 우물을 용천(龍泉)이라 부르고 있다.

세종대왕은 비록 조선에 협력을 하지 않았지만 고려의 절개를 지킨 포은 정몽주와 야은 길재와 같이 임난수에게 상을 내렸으니, 그가 죽은 후 1419년 세종대왕은 사당에 선액(宣額)하고 사패급복(賜牌給復)을 내렸다.

즉, 선액이란 임난수 사당의 현판을 왕명으로 써서 내렸으며, 글씨를 신숙주 아버지인 신장으로 하여금 임씨가묘(林氏家廟)라 써서 내렸고, 제사를 불천지위(不遷之位-변함없이 제사를 지내도록)로 지내도록 명 하셨다.

사패급복은 땅을 하사하시었고, 세금과 부역을 면제 시켜 주었는데 당시 하사 받은 땅이 나성일구강산(羅城一區江山)으로 지금의 독락정이 있는 곳에서 보이는 만큼의 땅이니 연기군 남면 나성리, 송담리, 진의리, 양화리 일대 이므로 행정중심복합도시가 들어서는 중심지역 모두를 포함하고 있다.

세종대왕께서 내려주신 사제문(司祭文)에는 “시기를 도울만한 기략을 운영하고 세상을 덮을 만한 공을 세웠다.” 라고 쓰여 있으며, 청양 현감 김미(金敉)에게 명하여 제사를 지내게 하면서 “무릇 공(功)은 다른 시대에 있었으나 그 포상이 이와 같이 훌륭하였도다.” 하였다.

세종대왕은 임난수 장군 뿐만 아니라 그의 아들에게도 많은 특전을 주었다.
그 이유는 임난수의 아들들도 아버지와 같이 불사이군(不事二君)으로 절의를 지킬 때 조선의 조정에서 높은 벼슬을 주었는데 받지 않고 부모를 모시면서 초야에 묻혀 살았다. 임난수의 셋째 아들 임서(林叙)와 넷째 임흥(林興)이 그러했다.

임서(林叙)는 고려 공민왕의 부마(駙馬-왕의 사위)로 고려 말에 충위교위좌군사직 을지내다 조선이 개국되자 아버지와 함께 모든 관직을 버리고 공주 삼기촌(현, 연기군 남면 양화리)에서 살았으며 조선의 조정에서 예조판서(禮曹判書)를 제수하여도 이에 응하지 않고 절의를 지켰다.

그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세종대왕은 장례를 왕명인 예장(禮葬)으로 치르도록 하여 그의 부인과 함께 예장으로 조성 되었다. 세종대왕의 명으로 치룬 예장은 묘의 봉분 하단의 돌을 다듬어 네모 형태로 만들었다.

임난수의 넷째 아들 임흥(林興)은 위의 금오위를 지냈으며 학행으로 산윈동정 금주지사를 제수하였으나 부임하지 않고 부모를 봉양하며 여생을 보냈으며 아버지가 병환으로 고생하자 손가락을 잘라 피를 내어 연명 시키기도 하였으며 효(孝)를 다하였다. 뿐만 아니라 조선 조정에서 관직을 내려 불렀으나 “내가 고려의 관직을 지냈었다.” 라며 나가지 않으니 세종대왕은 그의 절의를 가상히 여겼다. 어느 날 문득 세종이 임흥에게 관직을 내리며 그를 부르기 위하여 사람을 보냈으나 보낸 사람이 도착하던 날 임흥이 세상을 떴다.

◆ 독락정은 고려말 충신 임란수 장군의 둘째 아들 임목이 건립했다.

이 소식을 들은 세종대왕은 임흥의 장례를 예장으로 치루 도록 명을 내렸고 임흥의 묘는 봉분이 네모 형태로 만들어 예장 (禮葬)으로 치러졌다.

그래서 세종시 내에는 세종대왕의 명에 의하여 예장으로 치러진 묘가 3기가 있으니 우연치고는 너무나 기이한 인연이라 하겠다.

이뿐 아니라 세종시에는 세종이 총애하는 신하들 또한 많이 있다.

사육신중의 한명인 박팽년(朴彭年 1417~1456) 은 집현전 학사로 많은 편찬 사업을 하였다. 그런데 박팽년이 살았던 본가가 바로 세종대왕의 눈병을 고친 전의면 관정리 였다.

박팽년이 살 때에는 이곳을 박동(朴洞)이라 불렀으며 아버지의 형제가 윗마을 아랫마을에 살자 상대부, 중대부, 하대부라는 이름이 붙게 되고 하대부를 취촌(醉村)이라 부르는 것은 박팽년의 호가 취금헌 (醉琴軒)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박팽년이 전의에 살게 된 것은 할아버지 박안생(朴安生)이 학당(學堂) 김휴(金休)의 딸과 결혼하면서 처가와 가까운 곳에 살게 되었다. 그는 세종 때 의영고사(義盈庫使)를 지냈으며 중대부에는 한석정(寒石亭)이라는 정자가 있었는데 지금은 사라지고 터만 남아 있다. 한석정이란 이름은 박안생의 호를 따서 지은 이름이다.

박팽년의 아버지 박중림(朴仲林)은 세종때 집현전이 설치되자 학행과 덕행으로 뽑혀 들어갔으며 박팽년, 성삼문, 하위지 등이 그에게서 학문을 배웠다. 세종대왕 때에는 사간원 좌사관, 첨지중추원사, 병조참의, 우승지. 공조참의. 병조참판, 전라도 관찰사 등을 지냈다.

'세종실록' 찬술에도 참여 하신 분으로 아들 박팽년과 함께 단종복위에 노력하다 김질(金礩)의 밀고 때문에 실패로 돌아가자 능지처참을 당하였다.
 그러니 전의 박동은 박팽년의 할아버지인 박안생과 아버지 박중림 등 세종 때의 역사인물이 대거 살던 곳이다.

그뿐이랴 금강건너 금남면 달전리에는 세종대왕 때 한글을 만들기 위하여 중국에  13번이나 다녀온 성삼문의 사당이 자리 잡고 있다. 이곳에 성삼문 선생의 사당이 세워지게 된 것은 성삼문 선생의 당숙인 성희가 유배생활을 마치고 한양으로 돌아갈 때 세조는 성희에게 한양 밖300리에 살라 명을 내렸고 그러기에 이곳에 터를 잡고 살았으며 그의 아들 성담수는 생육신으로 유명하신 분이다. 그의 후손들이 대대로 이곳에서 살아오기에 성삼문 선생의 사당이 이곳으로 옮겨와서 문절사(文節司)라고 부르고 있다.

세종대왕이 총애하던 인물 중 김종서장군 만큼 신임을 얻은 이도 드물 것이다. 

김종서장군은 우리의 영토를 오늘날 국경선인 압록강과 두만강으로 확립한 인물이다.

여진을 몰아내고 4군 6진을 설치하였고 문·무를 겸비하신 분으로 세종은 눈을 감으며 김종서에게 아들 문종을 부탁할 정도로 세종의 총애를 받았으며 그의 묘가 공주시 장기면 대교리 밤실에 자리 잡고 있어 세종시의 의미를 더해주고 있다.

또 한분 세종이 백성을 위하여 민본정치를 펼 때 세종과 같은 해 태어난 왕자 덕천군(德泉君1397~1465)은 조선 제 2대 왕인 정종의 열 번째 왕자로 그의 묘와 사당이 공주시 의당면에 있다.

그런데 사당이 원래는 연기군 남면 방축리에 있었는데 1739년(영조15년) 에 건물이 낡아 공주로 옮기게 되었다. 세종과 같은 나이 인 덕천군이 연기군 남면 방축리에 살면서 왕자의 신분인데도 나가 농사일을 하였다. 가난한 이웃을 지성으로 도왔다. 그래서 농민들은 그를 잘 따랐고 이러한 생활을 하는 내용을 들은 세종은 덕천군을 자랑스러워하였다.

어느 해 여름 홍수로 금강물이 범람하여 현재 행정중심복합도시내의 사람 수 백 명이 이재민이 되자 이를 구제 하였기에 덕을 쌓은 어른이라 하여 적덕공(積德公)이라 불렀으며 훗날 덕천군(德泉君)이 되었다.
     
세종임금께 어필과 궤장을 받은 이도 있다.

전의에 살았던 전의이씨 이정간(李貞幹 1360~1439)은 조선초기 문신으로 정종 2년에 공주목사가 되어 고려말 절의(節義)를 지킨 포은(圃隱), 목은(牧隱) 치은(治隱)을 배향하는 삼은각(三隱閣)을 계룡산 동학사 경내에 준공하였으며, 강원도 관찰사를 지내다 관직을 사양하고 고향으로 내려와 늙으신 어머님을 극진히 봉양하였다.

이정간이 80세일 때 어머니는 100살이 넘었는데 집에 오면 어린 때때옷으로 갈아입고 노모 앞에서 병아리를 가지고 재롱을 부르며, 즐겁게 하자 천고의 효자라고 소문이 자자했다.

세종임금께서는 그에게 궤장(几杖-의자와 지팡이를 내림)을 내리고 효행을 포장하는 교서를 내렸다.

이정간이 위독하다는 말을 듣고 세종임금이 친히 문병하시어 어필(御筆-임금이 직접 써 준 글씨)을 하사(下賜)하셨는데 가전충효 세수인경(家傳忠孝 世守仁敬)의 8자를 써주어 지금도 전의이씨 문중의 가훈으로 내려오고 있다.

사람들은 행정중심복합도시 이름을 ‘세종(世宗)’이라 지었다고 하자 조선 4대 왕의 이름이요, 한글창제로 성군이라 불리며, 만원 지폐에 그려져 있고, 우리나라 사람 대부분이 좋아하는 인물이기에 붙여 놓은 이름으로 인식하겠지만 앞에서 열거한 것처럼 이곳에는 세종대왕과 연관된 인연이 많고 성군으로서의 세종대왕이 되게끔 한곳이 이곳이라 하여도 결코 과언이 아닐 것이다.

임영수 : 1990년 조치원문화원 문화과장, 사무국장. 1995년 연기향토박물관 설립. 현재 연기향토박물관 관장, 전국향토사연구소 전문위원,  연기향토사연구소 부소장, 국사편찬위원회 사료조사위원, 충남문화유산해설사 회장 등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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