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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야학은 1974년 당시 연맹 회장이었던 고 이웅렬 중도일보사 회장이 경암빌딩 지하에서 개교한 것. 초기에는 야학의 싹을 틔운 홍성호 목사가 관리 하다가, 1979년부터는 대학생 교사들이 자율적으로 운영하고 있었다.
교회나 가야 볼 수 있는 긴 나무의자, 120명에 달하는 10대, 20대의 여공(여성 공장근로자)들, ‘교복을 입는다’는 사실만으로도 행복한 표정. 이것이 한 교사가 본 야학의 첫 인상이다.
“우리 대학생들이 운영을 하면서부터는 자격증을 따는 쪽으로 운영 방침을 전환했죠. 검정고시 말입니다. 그 뒤 검고 합격자들이 배출되면서 신바람이 났고 큰 보람을 느꼈습니다.”
교회 나무의자에 교복입은 여공 모습 '생생'
한 교사가 들어온 지 2년 지난 1982년, 충남도청에 근무하는 박상도 전 교장(2005. 6. 23퇴임)이 “함께 했으면 좋겠다”는 뜻을 밝혀왔다.
“그 당시에는 5공 정권의 어두운 사회상을 반영하듯, 야학이 우후죽순처럼 생겨났다가 대부분 재정문제로 곧 사라지곤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학교는 BBS의 우산 속에 있는데다가, ‘방패막이’를 자임하고 나선 분이 계시니 정말 든든하지 않을 수 없었죠. 그 후로 고등반도 개설하고, 박 교장선생님은 학교 건물, 부지 물색 등 어렵고 힘든 일은 앞장서 도맡아 하셨습니다.”
박상도 전 교장과의 운명의 만남
야학은 군 복무를 마친 한 교사를 절실히 필요로 했다. 학생들의 나이가 20, 30대로 높아져 대학 2, 3학년들로서는 감당할 수 없게 되어 버렸기 때문이다. 한 번은 술에 취한 몇 몇이 젊은 교사에게 폭행을 휘두르는 사건이 발생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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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년 첫 교직 발령을 받은 한 교사는 처음 고민에 빠진다. 정규교사와 야학교사를 겸임하는 것이 큰 부담이 됐던 것이다. 그러나 강의시간을 줄이는 것으로 마음을 굳혔다. 그 만큼 야학에 대해 애정을 쏟아왔고, 자신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을 외면할 수 없었던 까닭이다. 한 교사는 현재 매주 월요일 한문강의를 하고 있다.
한 교사는 이젠 야학도 시대적 흐름에 따라 변화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예전에는 돈 없어 못 배운 사람들이 주를 이뤘지만, 제도권에 적응하지 못한 학생이나 만학을 하는 성인 등 이제는 그 배경이 다양해져 새로운 교육방향으로의 전환이 필요하다는 얘기다.
극박한 현대인에게 자성의 경종 울려
“검정고시 위주로 가르치는 것이 다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앞으로의 야학은 지역사회와 함께 할 수 있는 문화야학, 즉 컴퓨터나 원예 교육 등 생활 속의 야학이 되어야 그 존재의 의미를 찾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요즘 한 교사는 야학에 대한 두 번째 고민에 빠졌다. 늘 믿고 의지했던 박상도 전 교장의 갑작스런 퇴임으로 공허감이 컸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 교사는 알고 있다. 제도권 교육에서는 느낄 수 없는, 야학만이 가져다주는 자유스러운 야학교육의 매력을 자신은 결코 놓을 수 없을 것이라는 사실을.
교육 봉사 26개성상. 강산이 바뀌어도 세 번은 바뀔 세월동안, 아무도 알아주지 않고, 알리려 하지 않고 묵묵히 변함없이 참 교육자의 길을 걷는 한인택 교사. 그의 삶은 황금만능주의의 환상을 좇아 앞만 보고 숨 가쁘게 달려가는 우리 현대인들에게 자성의 경종으로 울리고 있다.
짧으면 6개월, 길어야 4, 5년에 그치는 야학교사의 생명력을 볼 때 그 울림은 더욱 크게 느껴진다.
한인택 교사 : 016-426-8579 / 042-626-5473(중리중학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