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승열의 세계 속으로] <25>

하이델베르크 지도
가톨릭 세상이던 11세기에는 수도원, 12세기에는 주교(主敎)학교, 그리고 13세기에 이르러 최초로 대학이 세워지기 시작했는데, 오늘날 유니버시티의 원어인 우니베르시타스(Univer- sitas)란 오늘날과 같은 종합대학의 의미가 아니라 학생조합(組合), 교수조합 혹은 학생과 교수의 조합 등 ‘사람의 집단’을 의미했다. 따라서 대학은 가톨릭 교리 연구를 중심으로 하고 당해 지역의 주교가 관리했는데, 대학생들은 성직자(Clerus)로 인식되기도 했다.

정승열 한국공무원문학협회 회장
세계 최초의 대학은 1186년 이탈리아의 볼로냐 대학(Bologna, 법학)이라고 하지만, 거의 같은 시기에 프랑스 파리 대학(Paris, 신학), 영국의 옥스퍼드대학(Oxford), 케임브리지대학 등이 설립되었지만, 북유럽은 남유럽보다 약1세기 가량 늦은 1347년 체코의 프라하대학과 오스트리아 빈 대학이 설립된데 이어서 1385년 황제선출권을 가졌던 7명의 선제후(選帝侯) 중 한 사람이던 신성 로마제국의 황제 루프레히드 1세(Ruprecht Ⅰ: 1309~1390)가 교황 우르반 6세(Urban Ⅵ: 1378~ 1390)의 인가를 받아 세 번째로 하이델베르크대학을 설립했다(선제후에 관해서는 2017.3.14. 비엔나 슈테반 대성당 참조).

당시 일반인들은 여행이나 거주이전이 불가능했으나, 대학생은 루프레히드 황제의 ‘대학 헌장(憲章)’으로 자유통행권, 체류권(즉 시민권), 면세권 등 3개의 특권을 누릴 수 있어서 하이델베르크 대학이 개교하자 유럽 각지에서 500명이나 되는 학생들이 몰려들 만큼 인기였다. 하이델베르크는 오늘날 3만 명이나 되는 대학생 중 1/5인 약6000명이 외국 유학생이라고 하는 대학의 도시로서 학생을 존중하는 전통이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대학에서도 도서관은 물론 지하실의 무기고를 개조한 학생식당 멘자(Mensa)를 일반인에게 개방하여 하이델베르크를 찾은 여행객들도 학생식당을 많이 이용하고 있다. 

하이델베르크 대학 건물.
하이델베르크의 중심지인 시청사와 성령교회 등이 있는 마르크트 광장에서 비스마르크 광장까지 구시가지 중심지를 하우프트 거리(Hauftstraße)라고 하는데, 하우프트 거리 양쪽에는 각종 기념품가게, 레스토랑 등이 있어서 하이델베르크 여행의 시작이자 마지막 장소이기도 하다. 이곳 끄트머리에 오래된 프라타너스 가로수가 듬성듬성 있고, 바로크식 지붕과 예술감 넘치는 건물이 하이델베르크대학이다.

대학은 설립 당시에는 신학, 법학, 철학만 가르치다가 점점 영역이 확대되고 학생 숫자도 크게 늘어나 도시의 여러 건물로 분산되어서 얼핏 보면 일반주택이나 사무실처럼 보이는 수많은 대학 강의실이 구분이 잘 되지 않을 정도이다. 사자상과 분수대가 있는 곳이 최초의 대학 광장인데, 워낙 비좁아서 1960년대 네카 강 건너편에 캠퍼스를 옮기고 최초의 대학건물은 도서관과 박물관 등 이른바 학생회관으로 사용하고 있다. 학생회관 2층에는 아름다운 성당처럼 꾸민 대강당과 고서 98만권을 비롯하여 필사본 6800권 등 300만권의 장서를 자랑하는 도서관이 있다.

대학설립자 루프트레히트 1세.
하이델베르크 기차역(Hauptbahnhof)에서 구시청사까지는 도보로 약30분 정도 걸리고, 32번 트램은 하이델베르크대학 광장까지, 5번 또는 21번은 비스마르크 광장까지, 또 33번 트램은 하이델베르크 고성으로 올라가는 에스컬레이터를 타는 등산철도역(Bergbahn)까지 가는데,  요금은 1회권이 2.4유로이다. 그러나 하이델베르크 1일권 패스를 15유로에 구입하면 트램 무제한 이용과 고성 입장료와 케이블카도 무료 이용할 수 있다.

대강당.
하이델베르크대학은 1517년 10월 31일 베를린과 라이프치히 사이의 작은 도시 비텐베르크(Wittenberg) 대학교수이자 사제 마틴 루터(Martin Luther: 1483~1545)가 비텐베르크의 만성교회(Church of All Saints) 출입문에 95개조 반박문을 내걸고 개혁을 요구함으로서 벌어진 종교개혁의 영향을 크게 받았으며, 다른 대학과 달리 오랫동안 학생감옥(Sutudenten Karzer)을 유지해왔다는 사실이 특징이다.

학생감옥.
먼저, 이슬람에게 성지 예루살렘을 빼앗긴 가톨릭은 이를 되찾기 위하여 교황 우르반 2세의 호소로 전후 14회에 걸친 십자군전쟁(1095~1456)을 벌였으나 승리하지 못하자 가톨릭교회와 교황의 권위가 크게 실추되어서 클레멘스 5세, 요한 22세, 베네딕트 12세, 클레멘스 6세, 이노센트 6세, 우르반 5세, 그레고리 11세 등 7명의 프랑스출신 교황은 로마교황청이 아닌 프랑스의 아비뇽 교황청에 머물렀다(1309~1377). 이로서 아비뇽교황청과 로마교황청간의 정통성 분쟁이 시작되었고, 또 14세기 말에는 영국의 위클리프(John Wycliff: 1324~1384), 보헤미아 프라하대학의 후스(Jan Hus; 1372~1415), 네덜란드의 에라므스(Erasmus: 1469~1536) 등이 세속화 되어가는 가톨릭과 성직자들을 비판하면서 종교개혁의 물꼬가 터졌으나, 1517년 루터가 교황 레오 10세가 성베드로 대성당의 신축비용을 마련하기 위하여 벌인 면죄부 판매를 비판하자 교황은 루터를 파문하고, 루터를 지지하는 제후들과 이를 반대하는 교황파와 30년 동안 종교전쟁이 시작되었다.

학생감옥.
1555년 신성 로마제국 황제 카를 5세에 의해서 주민의 신앙의 결정권은 영지를 다스리는 제후의 선택에 의해서 결정된다는 불완전한 신앙의 자유였으나, 그나마 17세기 로마제국의 황제가 개신교 신앙을 취소하자 또다시 신․구교도간의 30년전쟁(1618~1648)이 벌어졌다. 결국 1648년 웨스트팔렌 조약으로 30년 종교전쟁이 끝나고 개인의 신앙의 자유가 허용되었는데, 1803년 프레드리히 빌헬름 3세가 하이델베르크대학을 독일 최초의 국립대학으로 승격한 뒤부터 라틴어가 아닌 독일어 강의를 시작하고, 대학명칭도 빌헬름 3세의 이름을 추가하여 ‘루프레히트 카를스 하이델베르크대학(Ruptrecht Karls Universitet Hidelberg)’이라고 했다. 

학사주점.
중세대학은 제후의 행정권․사법권과 독립하여 대학자치권을 갖고 학생들이 무단결석하거나 과음, 혹은 국가권력에 반항하는 경우에는 그 책임의 정도에 따라서 약1주~4주 동안 감옥에 가둘 수 있는 재판권을 행사했다. 1778년부터 1914년까지 150여 년 동안 유지되었던 학생감옥은 대학 구건물 뒤에 붙어있는데, 감옥은 대학의 수위(守衛)가 관리했다. 그러나 학생들은 낮에는 강의를 받으러 나가고 밤에 감옥에 돌아와서 잠만 잤다고 하는데, 일부 학생들은 젊은이의 치기를 자랑하며 일부러 술을 마시고 감옥을 자청하는 경우도 많았다고 한다. 학생감옥의 입장료는 3유로인데, 강의실 일부를 개조한 감옥의 벽마다 당시 수감되었던 학생들의 낙서가 수두룩하다. 게다가 근래 이곳을 찾은 관광객들의 낙서까지 더해져서 매우 지저분해졌다. 

마틴 루터.
또, 대학에서 고성으로 올라가는 골목에는 예술애호가인 보아제(Biosseree)가 지은 건물에 문을 열었던 학사주점이 지금까지도 몇 개 운영되고 있다. 당시 학생들이 즐겨 찾았던 주점 중 가장 유명한 주점은 1839년에 개점한 붉은 황소 머리를 상표로 하는 레드 옥선(Red Oxen)으로서 이곳은 1899년 가상의 국가 칼스버그의 황태자 하인리히가 하이델베르크대학으로 유학와서 하숙집 하녀와 사랑하게 된다는 빌헬름 마이어-푀르스터’(Wilhelm Meyer- forster)의 중편소설 ‘카를 하인리히(Karl Heinrich)의 무대가 되고, 1927년 영화 황태자의 첫 사랑(The Student Prince in Old Heidelberg)과 1954년 ‘황태자의 첫사랑(The Student Prince)’이란 5막짜리 뮤지컬 영화로 제작되어서 더욱 유명해졌다. 나는 소설이나 영화도 관람하지 않았지만, 수많은 한국인 관광객들은 레드 오션에서 맥주 한잔을 마시는 것을 마치 하이델베르크 관광의 필수 코스처럼 여길 정도이다.

대학에서 본 고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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