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37년 공직 마감하는 이중환 국장의 소회


명예퇴직 후 한남대 산학협력단 교수로 임용될 예정인 이중환 대전시 과학경제국장.

- 학교 매점서 빵 팔아 학비 벌던 가난한 소년
- 처우 좋은 공기업임원 아닌 ‘대학교수’ 꿈 선택
- “대학은 섬” 산학연계 징검다리 되겠다 포부  
- 후배 공무원들에게 “큰 꿈 꾸고 도전하라” 조언
- ‘가난한 남편’ 뒷바라지 한 아내에 “고맙다” 눈물
- “조만간 자식·손주와 가족여행 계획” 소박한 꿈

“늘 꿈꿔왔던 일입니다.”

37년 4개월 공직생활을 마감하고 한남대 산학협력단 교수로 떠나는 이중환 대전시 과학경제국장은 ‘인생 2막’에 대한 설렘을 감추지 못했다. 그는 자신이 앞으로 해야 할 일에 대해 ‘융합적 코디네이터’라고 설명했다. 

“외국의 사례를 보면 산업이 대학을 중심으로 이뤄진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미국의 MIT 주변에는 켄달 스퀘어(Kendall Square)라고 하는 바이오단지가 있는데, 세계적인 제약회사들이 모여 대학과 유기적 관계를 맺고 있다. 그런데 우리의 대학은 섬이다. 대전에도 9개 종합대학이 있지만, 대학과 지역산업이 효과적으로 연계되지 못하고 있다.”

이 국장의 현실 진단이다. 그래서 그는 대학과 지역사회를 연결하는 징검다리 역할을 다짐하고 있다. 물론 막중한 책임감도 느낀다고 한다. 대전시 간부공무원이 산학협력단 교수로 자리를 옮기는 첫 케이스인 만큼, 많은 주목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대전시 간부를 데려다 일을 시키니까 대학발전이 되더라. 학생들을 잘 취업시키더라. 그래서 교육부로부터 좋은 평가를 받아서 지원도 잘 받게 되더라. 이런 이야기를 듣고 싶다. 내가 성과를 내면 다른 대학들도 임기를 마치는 대전시 공무원을 채용해 협력사업을 하려하지 않겠나. 첫 번째 문을 연다는 심정으로 일하겠다. 부담스럽지만 자신감을 가지고 일하려 한다.”

본래 대학교수의 꿈을 갖고 있던 이 국장이 공직을 선택한 건 가난 때문이었다. 어린 시절부터 부모님의 조력 없이 어렵게 학업을 이어 온 그였다. 중학교 시절 학교 매점에서 빵을 팔아 학비를 벌고, 고등학교는 5년제 농업전문학교를 선택했다. 장학금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다만 생활비를 버는 게 문제였다. 그의 표현대로라면 “산전수전 다 겪으며 겨우겨우” 학업을 마칠 수 있었다. 

그는 “아직도 가난하다”고 말했다. 남들이 이사를 몇 번씩 다니며 재산을 불려갈 때, 그는 공직생활을 통해 어렵게 마련한 아파트를 좀처럼 벗어나지 못하고 그곳에서 두 자녀를 모두 키웠다. 속된말로 돈 버는 데 젬병이었다. 최근엔 지방공기업 임원 자리를 마다하고 보수가 상대적으로 낮은 대학교수를 선택하기도 했다. 가난에 이골이 난 그가 이런 선택을 한 이유를 묻지 않을 수 없었다.

“공기업 임원으로 갈 것이란 소문이 돌았는데, 사실이다. 준비도 했었다. 그런데 한남대에서 뜻밖의 제의가 와서 흔쾌히 수락했다. 네임밸류나 처우만 생각했다면 아마 공기업으로 갔을 것이다. 그런데 공직생활 마감하고 잠깐 공기업 임원으로 일한다고 해서 ‘내가 꿈을 이뤘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꿈을 선택했다. 사실 65세 정년이 보장되는 대학교수가 실리 없는 자리라고 말할 수 없지 않나.(웃음) 공직 말년에 대학교수로 천거해 준 한남대에 고맙게 생각할 따름이다.”    

그의 한남대행(行)은 후배 공무원들에게 새로운 길을 제시하는 일이기도 하다. 이 국장은 자신이 길을 잘 닦으면, 후배들에게도 새로운 비전을 제시할 수 있다고 믿고 있다. 후배 사랑의 한 가지 방식이다. 이제 곧 떠나는 선배의 입장에게 후배들에게 남기고 싶은 메시지가 있다면, 무엇이냐고 물었다.  

“꿈을 크게 꾸라는 말을 하고 싶다. 큰 꿈을 꾸면, 그 꿈이 깨지더라도 조각이 크다. 꿈을 이루기 위해서는 반드시 도전이 필요하다. 사실 후배들이 도전정신이 좀 부족하다. 많은 아이디어를 내라. 공무원들이 무수히 많은 아이디어를 내고 정제해가는 과정이 필요하다. 그래야 자신도, 지역사회도 함께 발전한다. 하급 직원의 아이디어를 비토하고 비관적으로 보는 상급자들이 더러 있다. 조직을 퇴보시키는 사람이다. 그런 사람에게 누가 또 다시 아이디어를 내겠나. 도전은 실천이다. 매 맞기를 두려워해선 안된다. 매를 맞아봐야 피하는 방법도 알게 되는 것이다.”     

그는 후배 공무원들에게 한 가지 조언을 덧붙였다. “옳고 그름을 이야기할 수 있는 자존감 있는 공직자가 됐으면 좋겠다”는 말이다. 이 국장 또한 공직생활을 하면서 부침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박성효의 남자’란 꼬리표 때문에 한직으로 떠돌던 시절도 있었다. 그는 “지방자치가 성숙하려면 일로 봐야지, 편을 가르는 것은 더 이상 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나를 키워 준 박성효 시장과 믿음을 준 권선택 시장에게 고마운 마음을 가지고 있다. 박성효 전 시장은 은인 같은 분이다. 한남대에 가겠다고 하니 자기 일처럼 기뻐했다. 현 시장인 권선택 시장도 마찬가지다. 내가 ‘박성효 사람’이란 소리를 듣는데, 나를 발탁해 중책을 맡겨줬다. 그래서 정말 최선을 다해 열심히 일했다.”

약속된 인터뷰 시간이 끝나갔다. 37년 공직생활을 하면서 개인적인 소망을 갖기 힘들었을 텐데, 이루고 싶은 소망이 있다면 무엇이냐고 물었다. 이 국장은 한참을 망설였다. 그리고 뜻밖의 대답이 돌아왔다. “가족여행을 가고 싶다”는 것이다. 

“집에서 잠만 자고 눈 뜨면 일만하는 인생을 살았다. 변변한 가족여행 한 번 못가 봤다. 아들이 곧 사법고시 2차 시험을 보는데, 시험이 끝나면 아들과 딸, 외손자와 함께 동남아 여행이라도 다녀오려고 한다. 가난한 집에 시집와서 고생한 아내에게 너무 미안하다. 치매를 앓은 시아버지를 7년이나 병수발하고 내 동생과 자식들을 잘 키워줬다.”

이 국장은 말을 잇지 못했다.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미안하다”고 사과를 하며 고개를 돌려 눈물을 감췄다. 그리고 공식적인 인터뷰 자리를 빌어 아내에게 꼭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다고 했다. “고맙습니다. 사랑합니다.” 짧은 두 마디 말이었지만, 그의 진심이 녹아있었다. 마음을 추스른 그가 시계를 보더니 서둘러 일어섰다. 국비지원 요청을 위해 산업자원부 방문이 약속돼 있었다.

“마지막까지 내 할일은 하고 가야지요.” 그가 남긴 마지막 인사말이 오래도록 귓가에 맴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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