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국장이 만난 사람] <25> 조각가 조인혁

이 여인의 몸이 아름다운가? 내 눈엔 지극히 아름답다. 각막을 통해 망막에 맺힌 여인의 몸은  카메라 렌즈가 포착한 것처럼 한 순간만을 보여주지 않는다. 세월의 흔적을 통시적으로 담고 있는 몸이다. 사람에 대한 긍정적이고 따뜻한 시선이 읽혀진다. 억지로 아름다움을 과장하지 않기 위해 표현을 절제했다. 섬세한 터치는 빛의 수용에 따라 다양한 느낌을 자아내기까지 한다.

1996년 무사시노(武蔵野) 미술대학 한국 유학생이 빚은 얼굴 없는 여인의 조각상이다. 고(故) 가토 아키요(加藤 昭男) 교수가 “한국에 돌아가면 로댕(Auguste Rodin) 소리는 들을만하겠다”고 말했던 몸이다. 그 유학생은 조인혁(49)이다.

#고교 천하장사가 조각가 된 사연

조각가 조인혁. photo by 안인빈
그는 충북 보은에서 꽤 유복한 가정의 2남 6녀 중 여섯째로 태어났다. 위로 누나가 다섯이어서 그가 장남이다. 아버지는 큰 아들을 일찌감치 대전으로 유학 보냈다. 초등학교 5학년 때였다. 이때부터 그는 줄곧 대전에서 살았다. 아버지가 어린 자식을 유학 보낼 생각을 한 데는 이유가 있다. 아들이 씨름선수였는데, 어렵사리 얻은 집안의 장손이 체육인이 되지 않길 바랐던 것. 더구나 아들은 충북 대표선수로 소년체전까지 나갈 상황이었다.

그는 운동을 워낙 좋아한다. 기골도 장대하다. 체육인 기질을 타고 났다고들 한다. 그런 그가 운동을 그만둘 리 만무했다. 중학교에 씨름부가 없어 합기도 도장을 다녔을 정도. 유성고에 갔더니 씨름부가 있었다. 그는 냉큼 입단했다. 씨름부 주장까지 맡았다. 고3때는 공주산성에서 열린 천하장사 대회에 출전에 16강까지 올랐다. 상대는 ‘기술씨름의 달인’으로 불리던 고경철. 그는 당시 대학 4년생이던 고경철을 첫 판에서 넘어뜨렸다. 그는 “경철이 형이 상대가 고교생이라 방심했을 것”이라고 했다. 연이어 두 판을 져 8강에 오르진 못했지만 씨름 실력이 상당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가 모래판을 떠난 것도 이즈음이다. ‘인간 기중기’ 이봉걸과 연습경기를 하다 허리를 크게 다친 것. 이봉걸은 당시 충남대 4년생이었는데, 유성고 코치를 맡고 있었다. 눈을 뜨고 나니 병원이었을 정도로 부상이 심했다.

운동에만 빠져 지낸 것도 아니었다. 이미 초등학교 때 점토로 탱크를 만들어 우수상을 받았다. 될성부른 떡잎이었던 셈. 그가 조각에 대한 꿈을 키우기 시작한 것도 아마 이 때부터였던 듯하다. 중학교 3학년 첫 방학이 되자 본격적으로 미술학원에도 다니기 시작했다. 홍명상가 4층에 있던 희목미술학원이었다.

고등학교에서는 씨름부와 미술부 활동을 같이 했다. 조회시간에는 운동장에 전교생이 모인 가운데 한 번은 씨름으로, 한 번은 그림으로 교장선생님에게 상을 받았다. 동기생들은 그런 그에게 ‘인생은 불공평 하다’고 말하곤 했다.

#어릴 적 흙 조물조물하던 추억, 그리고 처음 본 기차

작업 중인 조인혁 조각가(화보집 중)
이때까지는 수채화에 전념했다. 대학은 한남대 미술교육과(85학번)에 입학했는데 실기도 수채화로 치렀다. 평면작업을 하면서도 손끝이 기억하고 있는 건 입체 감각이었다. 어릴 적 시골마을, 아름드리 참나무 아래서 흙을 채취하고 물을 묻혀 조물조물 하던 촉감을 잊은 적이 없었던 모양이다.

보통 2학년 2학기 때 전공이 세분화되는데 그는 1학년 때 이미 4학년 인체수업을 수강했다. 전문 누드모델이 출연하는 수업이다. 전공이 갈리기 전부터 그는 평면에서 입체로 전향한 것으로 묵인 받고 있었던 셈이다. 석고를 떠서 흙을 빼내고 섬유강화플라스틱(FRP)을 채워 인체를 만들었다. 매 학기마다 흙, 석조, 철재 등의 커리큘럼이 순차적으로 진행되는데, 그는 어릴 때부터 손에 익은 흙 작업을 유달리 좋아했다.

그는 대학을 졸업하고 한남대 대학원 조소과에 입학해 전업 작가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서울에서 첫 개인전도 열었다. 대학원을 졸업한 뒤에는 유학을 결심했다. 우물 안에서 보는 세상보다 더 큰 세상이 보고 싶었다.

유학을 가겠다고 결심했을 때 불현 듯 어릴 적 이미지 하나가 떠올랐다. 초등학교 2학년 때 대전 판암동 외가에 갔다가 처음 본 경부선 기차였다. 집에 돌아가서 할머니에게 자신이 본 기차 이야기를 들려줬다. 그런데 할머니는 기차를 본 적이 없었다. 산처럼 크게만 느껴진 아버지가 매일 아침 출근하면서 큰 절을 올린 할머니가 기차를 모른다니! 소년은 충격에 빠졌다. 할머니는 멀미가 심해 보은을 떠나본 적이 없었던 거다. 보은에 기차가 다니지 않으니 기차를 봤을 턱이 없었다. 아련한 기억과 함께 그의 눈앞에 펼쳐진 건 무한한 조각의 세계였다.

#무사시노에서 비로소 알게 된 ‘인체의 맛’

겨울 ‖ 50×60×200㎝ ‖ 합성수지
일본 유학은 짧지만 그의 창작연보에서 중요한 연대기를 이룬다. 그가 무사시노 미술대학을 선택한 이유는 간단하고도 명료했다. 그가 한국 조각의 최고봉으로 여기는 고(故) 권진규가 무사시노의 1회 졸업생이었던 것. 무사시노 대학 도서관 로비, 유리관 속 권진규의 석고 마두상이 그의 뇌리를 떠난 적이 없었다. 그는 1991년 일본 여행을 갔다가 이 조각상을 처음 봤다.

그는 인터뷰를 거쳐 대학원 연구생과정으로 조소과에 들어갔다. 무사시노에 입학하기 위해 7수한 수험생이 있을 정도로 일본에서는 첫 손에 꼽는 미대다. 그는 “가토 선생님을 만나면서 비로소 ‘인체의 맛’을 알게 됐다”고 했다. 인체의 맛? 내가 ‘토르소’를 보고 글로 차마 옮길 수 없었던 시간의 연속성을 그는 이렇게 표현했다. 근육과 지방으로 이뤄진 조각상에서 한 여자의 일생을 봤다면 과장일까? 그것은 나에게 있어 더 이상 하나의 덩어리가 아니다. 한 여인의 희로애락을 담은 생명의 몸이다. 보는 것만으로 맛을 알 수 있는 몸이란 그런 것인가 보다.

내가 ‘토르소’에 유달리 집착하자 조각의 제작 배경으로 이야기가 옮겨졌다. 무사시노에는 전속 모델이 25명 있었다. 물론 작품의 모델은 그들 중 하나다. 수업 이외 비용은 개인이 지불해야 하는데, 유학생 형편을 잘 알다보니 공짜로 그의 앞에 서줬다. 순전히 인간적인 이유에서다. 모델은 왜 그랬던 걸까?

보통 한 달 정도 모델을 쓰면 감사의 의미로 학생들이 돈을 걷어 파티를 하곤 했다. 1000엔씩 걷었는데 한화로 1만원이었다. 그에게는 큰 부담. 안 되겠다 싶어 한국식 파티를 준비할 테니 500엔씩 내라고 제안했다. 삽겹살과 쌈장, 팩소주, 신라면으로 실기실에서 파티를 벌였는데 반응이 뜨거웠다. 이후로 세 번을 더 그가 파티를 주관했다. 이 과정에서 모델들과 친분을 쌓을 수 있었다.

작품이 완성되자 가토 선생은 ‘한국에 돌아가면 로댕 소리는 듣겠다’고 평했다. 동일한 모델로 ‘봄’이란 작품을 만들었을 때 가토 선생은 ‘이렇게밖에 못할 거면 한국으로 돌아가라’고 질타했었다. 이번엔 달랐다. 선생의 지향점인 부르델(Emile A. Bourdelle) 소리는 못 들었지만 어떤 제자도 받지 못한 극찬이었다. 가토 선생에게 그는 그만큼 애정을 쏟을만한 제자였다.

하루는 가토 선생이 공모전에 참여하라고 했다. 선생이 제자의 실력을 인정했다는 뜻이다. 그는 이 대회에서 입상했다. 입상작들은 우에노미술관에서 전시를 했다. 그는 거기에서 권진규 선생과 동문수학한 사람들을 여럿 만났다. 그들은 권진규를 이렇게 회고했다. ‘3학년이 됐을 때 그를 따라갈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4학년이 돼서는 교수들조차 권진규를 간섭하지 않았다.’ 그렇게 권진규에서 시작한 무사시노 유학생활은 권진규로 끝맺음 하고 있었다.

#작픔 연대기에 획을 긋다

역사의 땅 - 탄생 ‖ 30×30×60㎝ ‖ 브론즈
그의 작품 연대기에 획을 그을 만한 우연도 일본 유학시절 일어났다. 도쿄 한국문화원갤러리에서 전시회를 한 적이 있다. 주일한국대사관에서 비매품으로 <가야문명>이란 책을 관람객에게 나눠줬다. 그도 무심코 한 권을 집어 들었다.

전시회를 끝내고 일본 친구들과 술자리에서다. 그가 책을 가리키며 “멋진 문화에 훌륭한 인쇄기술”이라며 칭찬을 했다. 다음날 다시 책을 들춰보니 이게 무슨 일인가. 책에 담긴 멋진 문화는 ‘일본’이 아닌 ‘가야’였다. ‘내가 한국인이란 말인가!’ 얼굴을 들 수 없을 정도로 부끄러웠다.

“고국에 대해서도 잘 모르는 놈”이란 자괴감은 그의 관심을 온통 우리역사로 돌려놨다. 그래서 시작한 테마가 ‘역사의 땅’이다. 그가 갑작스레 인체상에서 조국의 토지와 산하로 눈을 돌리자 그의 후원인인 도쿄 긴자갤러리 히가시 무라 관장은 ‘너무 이른 나이에 정형화된 스타일에 빠지는 것 아니냐’고 걱정하기도 했다.

그는 귀국하자마자 한반도에 높이 솟은 산과 태연히 흐르는 대하(大河), 살아 숨 쉬는 생명체들을 조형화하기 시작했다. 헨리 무어(Hennry Moore)가 차창 밖 어느 것 하나 간과하지 않기 위해 기차에서 책을 읽을 수 없었던 것처럼 그에게 선조의 피가 깃든 조국의 산하가 새롭게 보였을 것이다. ‘역사의 땅’을 주제로 한 개인전은 세 차례나 계속됐다.

#구상과 비구상을 넘나드는 자유로운 영혼

생명이야기Ⅶ ‖ 28×70×57㎝ ‖ 합성수지
그의 작업실은 대전 중구 부사동에 있다. 민영아파트 한 동의 지하 전체가 그의 작업실이다. 작업실이 보문산을 뒤로 두고 있다 보니 명천약수터를 자주 찾는다. 가을 어느 날이었다. 물을 뜨고 있는 그의 발아래 단풍 씨앗이 바람에 날려 떨어졌다. 그때부터 그는 자연을 조형화하기 시작했다. 단풍 씨앗을 잘라보기도 하고, 감자를 심어보기도 했다. 자연에 대한 재해석, 생명의 근원에 대한 탐색이 그의 새로운 작업이 됐다. 이른바 ‘생명이야기’ 연작들이다.

사실 그가 단풍씨앗을 발견하지 못했다면 ‘기다림’ 연작들로 이뤄진 개인전이 먼저였을 것이다. 전시회를 열기 위해 3분 2 가량이나 작품을 제작한 상태였다. 곧 ‘기다림’ 시리즈도 만나볼 수 있으리라.

장승Ⅲ ‖ 25×30×60㎝ ‖ 합성수지
최근에는 ‘장승’의 조형성에 주목하고 있다. 장승에는 우리민족의 원초적 사고가 깃들어 있다. 옛 사람들은 그 속에서 실존적 가치를 발견하고 생명의 근원을 추구했다. 그런 점에서 그가 장승에 관심을 두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으로 보인다. 특히 시골마을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는 장승의 얼굴을 한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이 이채롭다.

그의 작품연보는 인체에서 조국의 산하로, 다시 자연과 생명에서 장승으로 이어진다. 그 과정에서 표현방식도 반구상에서 구상으로, 다시 비구상으로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든다. 내용이 됐든 형태가 됐든 그의 작품세계에서 일관된 맥락을 보지 못할 건 없다. 그것은 보편적인 휴머니즘이며 생명에 대한 모럴리스트적 외경이다.


조인혁 화집발간전 5월 3일부터 대전KBS

나로부터 ‖ 20×30×400㎝ ‖ 테라코타
조인혁의 화집발간전이 5월 3일부터 9일까지 대전KBS방송총국 로비에서 열린다. 작가의 작품연보별 대표작 18점과 신작 12점(장승시리즈) 등 30점이 전시된다. 작가의 작품세계 변천사를 한 눈에 볼 수 있는 전시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조인혁은 충북 보은에서 태어나 한남대 미술교육과와 같은 대학 대학원 조소과를 나와 일본 무사시노 미술대학 조각연구과를 졸업한 30년 경력의 전업작가다. MBC구상조각대전 입상, 전국대학미술대전 동상, 일본 자유미술전 입상 등의 수상경력이 있으며, 지금까지 대전과 서울, 도쿄에서 8회 개인전, 100회가 넘는 단체전에 참가했다.

한남대 미술교육과, 남서울대 환경조형학과 강사를 역임했으며, 보은국제아트엑스포 대회장, 한국미술협회 조각분과 이사, 대전조각가협회 이사장 등을 맡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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