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종영 대덕대 생활체육과 교수가 말하는 교직 진출 노하우

1970년대 레슬링 선수였던 이종영(56). 그는 한때 쉽게 알만한 유명 스포츠인들과 태릉선수촌에서 한솥밥을 먹으며 국가대표 선수 생활을 했다.

1976년 몬트리올 올림픽 레슬링 금메달리스트 양정모, 1984년 LA 올림픽 레슬링 금메달리스트 유인탁, 1988년 서울올림픽 레슬링 금메달리스트 한명우 등이 당시 선수촌에서 같이 훈련했던 선수들이다.

하지만 대개 그렇듯 운동선수로서 생활의 지속성이 보장되지 않는 게 현실. 그래서 그는 공부를 시작했다. 31세까지 선수 생활을 하다가 이후 미국에 가서 1년 정도 학생들을 지도하며 공부를 했다. 당시 미국 스티븐슨하이스쿨 측에서 학생들의 운동을 지도하는 교사로 이종영 선수를 채용한 것. 그러면서 동시에 시카고 노스웨스턴대학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이때가 1988년 무렵. 석사까지 마친 상태였다.

이종영은 앞서 한국체대에서 학·석사를 받았다. 이후 미국에서 돌아온 뒤 한체대에서 박사 학위를 받았다. 박사 논문은 ‘운동역학관계 논문의 연구방법 및 통계처리기법의 타당성 평가’였다.

박사 논문을 쓰기 위한 그의 집념과 열정은 대단했다고 한다. 생계 문제가 불투명한 상태에서 강단에 서 보겠다는 일념으로 시작한 공부였다. 선수 생활 당시 끊임없이 반복 훈련을 했듯 공부 역시 끊임없는 반복학습이라고 봤다. 시간강사 등을 하면서 박사 학위를 받기까지 7년 동안 공부에만 전념했다.

“난 머리가 좋은 사람은 아닌 것 같아요.(웃음) 운동만 하다가 공부를 하려니 정말 힘들더라고요. 그래서 공부 역시 운동처럼 반복연습이라고 생각해 훈련을 하듯이 공부에만 매진했어요. 습관을 어디에 들이느냐에 따라 다른 것 같아요. 그땐 정말 열심히 공부했죠.”

국가대표 레슬링 선수에서 교수로 강단에 서다
 
그는 대전에 본사를 둔 한국조폐공사 소속으로 선수 생활을 했다. 이후 박사 학위를 받고, 1997년 지금의 대덕대 생활체육과에 부임했다. 현재 이 학과 학과장을 맡고 있다.

그는 대학 강단에 서면서 가장 많은 영향을 받은 인물로 단연 정준수 전 대전시체육회 사무처장을 꼽았다. 이유를 묻자 “그분의 열정은 대단했다. 비록 전문대학이라고는 하나 제자들에게 4년제 편입학, 교사로서의 꿈 등을 끊임없이 심어 준 분”이라고 했다.

그래서 이 교수는 강단에 서면서부터 "2년제 전문대지만 열심히 공부해 4년제 편입학을 할 수 있고, 임용고시의 기회를 얻어 교사로 진출할 수 있다는 ‘꿈’을 심어주기 시작했다. 그는 지금도 대학입학설명회 때나 입학 후 오리엔테이션 때도 교사의 꿈을 꿔 보라고 강조한다.

이 교수는 인터뷰 도중 갑자기 책 한권을 추천했다. 성공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다룬 말콤 글래드웰의 <아웃라이어>였다. 이 교수가 강조한 것은 ‘1만 시간의 법칙’. ‘1만 시간은 대략 하루 세 시간, 일주일에 스무 시간씩 10년간 연습한 것과 같다’는 내용이다. 그는 “무서운 집중력과 반복된 학습이 성공의 길로 이끈다”는 말을 학생들에게 귀에 못이 박히도록 강조한다고 했다.

이 교수는 “천재와 바보는 백지 한 장 차이다. 나 역시 운동만 하다가 공부를 하려니 무척 힘들었다”며 “머리가 나쁘다고 공부를 못하는 게 아니지 않나. ‘하면 된다’는 동기부여를 줘서 습관을 잘 들이면 누구나 성공할 수 있다는 것을 꼭 말해주고 싶다”고 말했다.

전문대 졸업한 학생들 중 교사 12명 배출

대덕대 생활체육과는 1994년에 설립됐다. 수십여 년 된 일반대 체육학과와 비교하면 21년으로, 비교적 긴 역사를 갖고 있지는 않다. 하지만 눈에 띄는 게 하나 있다. 전문대 출신이면서 사립학교를 포함해 현직 교사로 활동하는 ‘선생님’을 12명 배출했다. 이 교수는 “전문대 출신으로 12명의 현직 교사를 배출한 건 매우 의미 있는 수치”라고 했다.

이 교수는 일화 하나를 꺼냈다. 지난해 천안 A중학교 교사로 발령을 받은 제자 K씨의 얘기다. K씨는 대덕대를 졸업한 뒤 4년제 대학에 편입했다. 대학 졸업 후 스포츠 강사 등으로 일하다가 임용고사에 7번이나 낙방했다. 매번 떨어질 때마다 K씨는 이 교수 연구실로 찾아와 서럽게 펑펑 울더라는 것. 그러면서 포기하고 싶다는 거였다.

하지만 이 교수는 그런 제자를 격려하며 다시 도전하도록 다독였다. 결국 다소 늦은 나이인 30대 중반에 합격했고, 지난해 공립중학교 교사로 발령을 받았다. 이 교수는 K씨가 임용고사에 합격한 뒤 가장 먼저 자신을 찾아 온 날, 축하해 주며 밤 세워 술잔을 기울였단다. 이 교수는 “말 그대로 7전8기를 한 ‘의지의 한국인’이었다”며 “합격하던 날 정말 술을 엄청 마셨다”고 회상했다.

자랑스런 제자도 빼놓지 않았다. 대덕대를 졸업한 후 4년제에 편입한 뒤 수년 전 광주지역 임용고사에서 (체육분야) 수석 합격의 영예를 안았던 또 다른 제자 K씨다. 그는 지금도 “전국의 전문대학 중 우리만큼 교사 배출을 많이 하는 학교도 드물다”고 했다.

이 교수, 제자들 교직 진출 강조하는 이유는

대덕대 생활체육과는 한 학년당 70명씩 총 140명의 학생이 있다. 다양한 이론과 실기능력을 갖춘 생활체육과 레저스포츠 전문지도자 양성을 추구한다.

2년제임에도 최우선 교육목표로 취업과 편입을 강조한다. 이 교수는 그 최일선에 있다. 학생들과 술잔도 기울이며 거리낌 없이 대하기도 한다. 인터뷰 하는 중간에도 몇몇 학생들이 상담이나 대화 등을 하고 싶다며 이 교수 연구실의 문을 두드렸다. “(학생들이) 심심해서 놀러온 것”이라는 이 교수는 학과의 다른 교수 연구실의 문도 늘 열려 있다고 했다.

실제 이 교수의 연구실 한쪽 벽면에는 140여명에 달하는 학생들의 얼굴 사진과 함께 이름 및 특기·적성 등이 빼곡히 적혀 있다. 굳이 일일이 붙여 놓은 이유를 묻자 “학생들을 가르치는 일을 하는 사람인데, 성의 없이 학생들을 대하면 안 되지 않나. 학생 개개인의 이름과 얼굴을 기억하고 싶어 적어 놨다”고 했다. 홍성표 전 대덕대 총장이 취임 후 강조한 ‘사제동행’ ‘도제교육’을 그야말로 몸소 실천하고 있음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이 교수는 그러나 “안타까움과 안쓰러움이 늘 마음 한 구석에 있다”고 했다. 전문대학에 진학하는 학생들 중 상당수가 자신의 능력을 스스로 부정하고 있다는 이유에서다. 그래서 이 교수는 늘 자신감과 함께 할 수 있다는 믿음을 심어주려고 학생들에게 ‘세뇌교육’을 시킨다고 했다. 집중력과 반복학습, 1만 시간 법칙을 통해 스스로의 인생을 바꿀 수 있다고. 

“요즘 청년 실업이 최악 아닙니까. 4년제 대졸자도 그런데 전문대 졸업자는 오죽하겠습니까. 특히 체육이나 운동 분야로 2년제 대학에 입학한 학생들의 경우 졸업 후 직업의 보장성이 상대적으로 더욱 불투명한 게 사실이죠. 그래서 학생들에게 ‘인생의 처우 개선’과 ‘지위 향상’을 위해서는 반드시 운동과 공부 ‘두 마리 토끼’를 잡아야 한다고 강조하죠.”

이 교수 역시 전문대학에서 20여 년간 교직생활을 하며 느끼는 것들이 많다. 이중 자신감이 부족한 학생들이 많아 개개인의 사고체계를 바꿔주고 싶은 게 최우선 목표다.

그는 끝으로 체육학과를 나온 젊은이들이 스포츠 강사, 시간제 일자리, 계약직 등을 전전하는 현실을 안타까워했다.

이 교수는 “체육이나 스포츠 분야에서 우리 사회는 여전히 학력이나 스펙을 강조하는 분위기가 만연하다”며 “아직도 엘리트 스포츠 정책을 펴고 있는 우리나라의 경우 체육 전공을 살려 나가는 후학들이 드물 만큼 국가 정책과 현실과의 괴리가 여전히 커 아쉽다”고 했다.

그러면서 “국민소득 3만 달러에 가까워지고 있는 시기에 체육 분야에 대한 국가 차원의 저변 확대 육성 정책이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이종영 교수 약력]

-1959년 대전
-대전 보문고 졸. 한국체육대 체육학과 학·석·박사 졸
-1977년 3월~1985년 1월 대한민국 레슬링 국가대표
-미국 시카고 스티븐슨하이스쿨 레슬링 코치
-단국대, 영남대, 건양대, 국민대, 인천대 강의
-대덕대 사회체육과 겸임교수·초빙교수·전임강사
-현 대덕대 생활체육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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