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암 민제인 선생과 동몽선습, 유네스코를 향한 첫 발걸음

세계 최초의 체계적 인성교육 교과서 '동몽선습'의 역사적·교육적 가치

2025-11-25     민병찬 국립한밭대 교수 | 민주평통 대통령 자문위원
음력 10월 3일은 세계 최초의 체계적 인성교육 교과서 '동몽선습'을 남긴 입암(立巖) 민제인 선생의 시향일이다. 후손들은 해마다 경기 남양주시 선생의 묘소에 참배하고 재실에 모여 재실시향을 올린다.

지난 11월 21일, 음력 10월 3일은 해마다 잊지 않고 지켜온 입암(立巖) 민제인 선생의 시향일이었다. 올해도 후손들이 먼저 산소(경기도 남양주시)에 참배하고 재실에 모여 재실시향을 올리고 예를 갖추는 자리였지만, 산소 제단 위에 올려진 두 권의 책은 예년과는 다른 묵직한 질문을 품고 있었다. 하나는 작년에 선생의 생애와 『동몽선습』을 순수 한글로 풀어 엮은 책이고, 다른 하나는 올해 미국에서 발행되는 스코프스(SCOPUS) 등재 국제저널에 게재된 『동몽선습』의 교육철학과 현대 인성교육에서의 활용 가능성을 다룬 영문 논문 별쇄본이다.

입암 민제인은 조선 중기에 승정원동부승지, 형조판서, 이조판서, 좌찬성 등을 지내며 국정을 책임졌던 문신이다. 자는 희중, 호는 입암, 본관은 여흥으로, 문장과 역사에 능해 『입암집』과 『동국사략』을 남겼고, 어린 학동을 위한 입문서 『동몽선습』을 편찬했다. 사헌부 대사헌을 맡으며 격변의 정국 한가운데서도 형벌을 다룰 때 가급적 무겁지 않게 처리하려 했던 온유한 성품 때문에 동료들 사이에서는 ‘자비승’이라 불렸다는 기록도 남아 있다. 권력의 소용돌이 속에서 끝내 유배지 충청남도 공주시(옛 공주목)에서 생을 마감한 그의 삶을 떠올리면, 한 인간이 정치의 파고를 건너며 지키려 했던 양심과 회한이 더욱 또렷이 다가온다.

그가 1543년에 집필한 『동몽선습』은 오랫동안 서당과 가정에서 사용된 한문 기초 교과서로 알려져 왔지만, 교육사적으로 보면 세계 최초의 체계적인 아동 인성교육 교과서로 평가할 수 있다. 효(孝)와 오륜(군신·부자·부부·장유·붕우)을 중심축으로 삼아 도덕규범과 일상의 태도를 짧고 명료한 문장으로 제시하고, 이를 반복 암송과 실천을 통해 습관화하도록 설계했다. 

후반부에는 단군에서 조선에 이르는 역사와 중국 주요 왕조의 흐름을 간략히 정리하여 어린이들이 자신이 속한 공동체의 역사와 정체성을 함께 익히도록 이끌었다. 도덕과 역사를 따로 떼어 가르치지 않고 하나의 통합된 교육과정으로 엮어낸 점이 바로 『동몽선습』의 핵심이다. 

무엇보다 주목할 점은, 이 책이 서구 근대 교육사상가 코메니우스의 저술보다 115년 앞서 아동 인성교육을 체계적으로 정리했다는 사실이다. 우리는 그동안 세계 교육사를 말할 때 유럽의 근대 교육론을 기준으로 삼는 데 익숙했지만, 『동몽선습』은 동아시아에서도 이미 16세기 중반에 “도덕적 품성과 역사의식을 갖춘 인간”을 목표로 한 교육철학이 구체적인 교과서 형태로 구현되었음을 보여준다.

필자는 이러한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입암 선생의 생애와 『동몽선습』의 교육철학을 현대 인성교육의 관점에서 재조명한 논문을 미국에서 발행되는 국제저널에 “Min Je-in’s Dongmong Seunseup: Educational Philosophy and Modern Applicability of Joseon Dynasty’s First Children’s Character Education Textbook”라는 제목으로 보고했다. 이 논문은 수차례의 심사와 보완을 거쳐 2025년 4월, 스코프스 저널에 등재된 정식 논문으로 출간됐다. 한국어 고전 텍스트인 『동몽선습』이 국제 학술 무대에서 “세계 최초의 체계적 인성교육 교과서”라는 교육사적 위상을 인정받은 셈이다.

필자가 최근 국제저널에 보고한 바와 같이『동몽선습』이 단순한 옛 한문 교과서가 아니라, 도덕·역사·인간관계를 통합한 인성교육 모델임을 구체적으로 분석했다. 효는 단순한 부모에 대한 복종이 아니라 가족과 사회 질서를 지탱하는 근본 원리로 설명되고, 오륜은 각 관계에서 서로가 지켜야 할 책임과 도리를 통해 공동체의 안정과 조화를 도모하는 규범으로 제시된다. 짧은 문장을 반복해 외우게 하는 방식도 단순한 암기 훈련이 아니라, 가치 이해를 실제 행동과 습관으로 연결하려는 교육적 장치로 해석할 수 있다.

이러한 재해석은 오늘의 현실과도 깊게 맞닿아 있다. 지금 한국의 교육은 입시와 성취, 경쟁이 핵심 지표가 되어 버렸고, 도덕·윤리·생활교육은 부수적인 영역으로 밀려난 지 오래다. 맞벌이와 가족 구조 변화로 가정에서 가치와 규범을 자연스럽게 나누는 시간은 줄어들었고, 디지털 환경 속에서 아이들의 관계는‘연결’되었지만 책임과 배려를 배우는 장은 오히려 축소되고 있다. 『동몽선습』은 인성교육이 지식교육과 별도의 선택 과목이 아니라, 교육 전반을 떠받치는 기초라는 사실을 다시 묻고 있다.

물론 16세기 조선의 교과서를 오늘에 그대로 적용할 수는 없다. 당시 사회에는 신분제, 가부장제, 집단주의 등 현대의 인권·성평등·다양성 가치와 충돌하는 요소도 함께 존재한다. 『동몽선습』의 현대적 활용은 전통을 있는 그대로 복원하는 작업이 아니라, 그 속에서 지금도 유효한 핵심 가치를 선별하고 재맥락화하는 비판적 수용의 과정을 전제로 해야 한다. 효와 오륜은 오늘날 책임, 존중, 배려, 공동체 의식이라는 보편적 가치로 다시 읽힐 때 비로소 미래세대 교육의 언어가 될 수 있다.

필자는 평생 공학자의 길을 걸어왔다. 인간·생체공학을 전공하고, 국내외 학술지에 430여 편의 공학 논문을 발표했으며, 수십 건의 특허를 산업계에 이전하는 과정에서 ‘과학기술 포장(훈장)’과 대통령 표창, 중소벤처기업부 장관 표창, 3차례에 걸쳐 세계 100대 과학자 칭호까지 받았다. 연구실에서는 늘 데이터와 알고리즘, 센서와 시스템을 마주해 왔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물질문명이 눈부시게 발전할수록 세계 곳곳에서 인간성이 피폐해지고, 서로를 향한 혐오와 분열이 깊어지는 현실 앞에서 공학자로서의 성취만으로는 채워지지 않는 공허함이 마음 한편에 남아 있었다. 

입암 선생의 14대손으로서, 그리고 한 사람의 교육자로서, 『동몽선습』을 다시 꺼내 들고 국제 학계에 그 가치를 묻는 작업은 공명심이 아니라 사명감에서 우러난 선택이었다. 과거의 한 문신이 혼란스러운 시대에 어린 학동들에게 남긴 인성교육 교과서를, 21세기 디지털 시대를 사는 우리가 어떻게 새롭게 활용할 수 있을지 질문을 던지는 일. 그것이야말로 물질문명에서 정신문화 혁명으로 넘어가는 과도기에 교육자가 감당해야 할 몫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이번 논문은 『동몽선습』의 철학을 이론적으로 정리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가정·학교·사회에서 활용할 수 있는 구체적 방향도 제시했다. 가정에서는 부모와 자녀가 일부 구절을 함께 읽고 일상 장면에 적용해 보는 대화의 자료로, 학교에서는 도덕·사회·역사 수업과 연계한 토론 활동의 텍스트로, 조직에서는 책임·신뢰·공익·소통을 주제로 한 윤리·리더십 교육 자료로 활용할 수 있다. 더 나아가 교육정책 입안자와 교사들이 『동몽선습』의 통합적 인성교육 모델을 현대 교육과정 속에서 실험해 보고, 그 효과를 검증하는 후속 연구를 제안했다. 

시향일 산소제단 앞에서 필자는 별쇄본으로 묶은 영문 논문을 조심스럽게 펼쳐 올렸다. 482년 전, 입암 선생이 붓끝으로 그려 넣은 문장들이 이제는 영어로 번역되어 세계의 연구자들과 교사들, 정책결정자들을 향해 말을 걸기 시작했다. 후손으로서, 그리고 동시대를 사는 교육자로서, “사람이 사람다워지는 교육”에 대한 선조의 고민을 세계와 나누겠다고 약속하는 자리였다. 물질의 속도가 정신의 속도를 앞지르는 시대일수록, 우리는 다시 묻게 된다. 무엇을 위해 배우고, 무엇을 위해 기술을 발전시키는가. 『동몽선습』을 세계에 다시 묻는 일은, 어쩌면 우리 자신에게 던지는 질문이기도 하다.

가까운 미래에 『동몽선습』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하기 위한 논의 역시 이러한 흐름의 연장선에 있다. 이번 연구와 국제저널 게재는 본 서적과 논문이 세계유산으로 자리매김하기 위한 시발점임을 천명하는 작업이다. 이제 정부와 지자체, 학계와 시민사회가 함께 나서 『동몽선습』의 역사적·교육적 가치를 체계적으로 정리하고, 번역과 연구·자료 발굴을 지원하며, 국제사회를 향해 그 의미를 적극적으로 알릴 때가 되었다.

민병찬 프로필
·고려대학교 졸업
·일본 주오대학 대학원 공학석사
·일본 UEC, Tokyo 공학박사
·한국표준과학연구원 책임연구원(전)
·국립한밭대학교 산업경영공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