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은 정말 천주교를 버렸을까?

오솔길에서 만난 다산(44)

2025-11-11     김창수

천주교 최초의 세례자 이승훈은 그의 누나의 남편, 즉 매형이다.  평신도 대표로 있으면서 공식 천주교 교리서인 『주교요지』란 책을 쓴 정약종은 그의 형이다. 백서사건의 황사영은 큰형의 사위로 그의 조카 사위다. 조상의 신주를 불태워 천주교 탄압의 빌미가 된 진산사건의 주인공이자 최초의 순교자인 윤지충은 그의 외종사촌이다. 

여기 나오는 ‘그’는?  다산 정약용이다. 형, 매형, 형수, 조카, 조카사위, 외종사촌이 다 그를 둘러싼 순교자들이다. 뿐이랴, 조선 천주교회 창립의 주역으로 다산으로 하여금 처음 천주교에 발을 들이게 한 이벽은 큰형수의 동생으로 사돈지간이다. 조선 천주교 수난사의 핵심멤버들로 다산의 ‘가계도’(家系圖)를 채울 수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이다. 다산에게 천주교, 곧 ‘사학’(邪學)은 그가 평생 헤어날 수 없었던 굴레였다. 형 정약전과 함께 살아남아 유배형을 받은 것만 해도 기적이라 할 만 했다. 

다산이 죽지 않고 살아난 이유는 무얼까? 멀리 갈 것 없이 배교(背敎) 때문이었다. 그렇다면 다산은 언제 천주교를 버렸고, 정적들로 둘러싸인 국문장에서 어떻게 배교 사실을 인정받았을까? 그리고 그가 귀양 간 이후 다시 천주교에 귀의해 노년을 신자로 보냈다는 설은 어디까지 진실일까?

천주교 문제에 관한 한 다산은 매우 논쟁적 인간이다. 어느 한쪽으로 명쾌히 가를 수 없을 만치 학계, 종교계 입장이 제각각이다. 학계에서도 이른바 국학계와 비주류 쪽의 주장이 서로 다르다.

우선 천주교계의 입장이다. 천주교 측은 다산이 강요에 의해 일시 배교는 하였지만 마음으로는(내적으로) 천주교 신자였으며 유배지에서나 해배 이후에나 진실로 뉘우치면서 신자로 머물렀다는 주장이다. 더 나아가 다산이 『조선복음전래사』라는 책을 지었고 임종시에 중국인 신부로부터 종부성사를 받고 운명했다는 주장도 나오고 있다. 이런 입장의 대표적인 논자가 최석우 신부이다.

최 신부는 그의 논문 「정약용과 천주교 관계」와 「정다산의 서학사상」에서 “다산의 신앙은 존속되었다”, 즉 신봉론을 주장한다.(김상홍, 『다산문학의 재조명』)
“정약용의 천주교 신앙 생활을 단계적으로 고찰하면 중간의 배교에도 불구하고 그의 신앙만은 존속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사실 그의 한 때의 배교는 외적인 것이었고 내적인 것은 아니었다. 정약용의 조카사위인 황사영은 ‘정약용이 겉으로는 천주교를 해쳤을지라도 마음속에서는 늘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고 증언하였다. 정약용의 배교는 무엇보다도 임금의 총애 앞에서의 일시적인 허약 때문이었을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그가 자명소(自明疏)를 올린 것은 신앙의 배신보다는 임금의 총애를 배신하고 싶지 않은 마음에서였을 것이다. 1801년 그는 임금 앞에서 신을 거부함으로써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은 일종의 강요된 배교이고 강요된 선택이었다. 만년에 그는 신을 다시 택했다. 이번에는 결코 강요된 선택이 아니었다.”

최 신부는 이런 주장의 근거로 다블뤼(Antoine Daveluy, 1818~1866)의 『조선순교사비망기』와 샤를르 달레(Charles Dallet, 1828~1878)의 『한국천주교회사』를 근거로 들었다. 다블뤼 신부는 1845년 10월 강경을 통해 조선에 들어와 선교활동을 하다 1866년 병인박해 때 충남 보령 영보리, 일명 갈매못에서 48세로 순교했다. 달레 신부는 해외 선교 활동을 펴다가 질병으로 프랑스에 귀국한 뒤 다블뤼 신부의 문서를 중심으로 조선 천주교회사의 편찬 작업에 들어가 순교로 얼룩진 조선의 천주교 전래사를 썼다. 

최 신부는 이 다블뤼의 비망기를 인용하면서 “1811년 다산이 유배지에서 북경의 주교와 교황에게 편지를 보내는 일, 즉 교회 재건 운동에 기여하는 등 유배 중에 배교를 뉘우치며 교회의 공동사업에 헌신함으로써 자기의 죄를 속죄하려 했다”고 주장했다. 

다산이 해배된 후에도 고향에 칩거하면서 신앙생활을 했다는 최 신부의 주장은 계속 이어진다.
“정약용 요한은 귀양에서 풀려난 지 2,3년 후부터 신앙 생활을 다시 하기 시작했다. 천주교 진리는 그에게 항상 명백하게 보였다. 그는 늘 외딴 방에 틀어박혀 소수의 친구밖에 만나지 않았고, 속죄를 위해 자주 단식과 그 밖의 고행을 했다. 그는 자신이 직접 만든 몹시 고통을 주는 띠를 늘 매고 있었고 또한 몸의 여러 곳을 작은 사슬로 감고 있었다. 그는 또한 오랫동안 묵상을 하곤 했다.”(다블뤼, 『조선순교사비망기』)

최 신부는 다블뤼가 쓴 ‘신앙 생활을 다시 시작’한 대목이 다산이 환갑을 맞아 새로운 출발을 다짐하는 것과 시기적으로 일치한다며 그가 지은 『자찬묘지명』을 인용하고 있다.
“나는 건륭 임오년에 태어나서 지금 도광(道光) 임오년을 만났으니 한 갑자 60년은 모두 죄와 뉘우침으로 지낸 세월이었다. 지난날을 거두어서 정리하고 인생을 다시 시작하니 금년부터 정밀히 닦고 실천하여 하늘의 명을 돌아보면서 여생을 마치리라”

물론 여기서 다산이 말한 ‘하늘’이란 하느님을 가리킨다는 게 최 신부의 주장이다. 천주교를 대표하는 최 신부의 이러한 주장에 대해 국학계는 전혀 다른 입장이다.

단국대 김상홍 명예교수는 먼저 최 신부가 전거로 삼고 있는 다블뤼 신부와 달레 신부의 저작 내용에 대한 신빙성에 의문을 표한다.  
무엇보다 다블뤼 신부의 기록이 저자 스스로 밝혔듯이 분명한 자료가 아닌 ‘구전에 전하는 바에 의한’ 것일뿐더러, 내용 또한 사실과 다르다는 것이다.

유배기인 1811년 북경의 주교와 교황에게 서한을 보내는 데 관여하는 등 교회 일을 도왔으며, 해배후 외딴 방에 칩거하면서 신앙  생활에 몰두하였다는 비망기의 기술에 대해 김 교수는 이렇게 반론을 편다. 

김 교수는 “신해년(1791, 30세) 이래로 국가의 금령이 엄하여 마침내 천주교에 대한 생각을 끊었다(節意)”는 『자찬묘지명』의 ‘양심선언’과 상충한다는 것이다. 그는 또 해배 이후 다산은 칩거생활에 들어간 게 아니라 배를 타고 춘천과 청평산, 용문산 등지를 유람하고 마재 집을 방문한 성리학자 신작 등 여러 학자 및 관료들과 소요 자적하며 많은 시문을 남겼다고 지적했다. 

귀양에 돌아온 후 모범적 신앙생활을 했다는 주장에 대해서도 다음과 같은 논지로 반박하고 있다. 첫째, 해배된 다음 해인 1819년(58세) 조정에서 경전(經田, 토지 조사)하는 일에 다산을 기용하려 했으나 정적인 영의정 서용보(1757~1824)가 극력 반대해 무산되는 상황이었다. 만일 다산이 천주교를 믿는 낌새라도 보였다면 서용보가 옥사를 다시 일으키지 않을 리가 없었을 것이다.

둘째, 다산이 62세 때인 1823년 9월 승지 후보로 낙점되었으나 취소되었다. 그리고 1827년 대리청정을 하던 효명세자가 다산을 기용하려 했으나 반대파들이 이를 알고 윤극배를 사주해 다산을 무고하였다. 다산은 그후 69세에 효명세자의 치료를 위해 부호군에 임명되는가 하면 73세(1834)에 순조가 위독하여 궁중에 불려가기도 했다. 이처럼 여러 차례 관직에 기용하려 했던 것을 보면 다산에게 천주교는 더 이상 문제될 소지가 없다는 것을 공식적으로 증명하는 것이다.

셋째, 다산이 귀양에서 돌아온 후에도 천주교도에 대한 탄압은 계속되었다.  66세때인 1827년엔 정해박해, 그가 운명한 후 3년이 지난 1839년의 기해박해(이때 정약종의 차남인 정하상 순교), 그리고 1866년의 병인박해로 이어진다.

이상과 같은 정황으로 미루어 다산이 모범적인 천주교도였다는 최 신부의 논리는 성립될 수 없다는 게 김 교수의 주장이다. 그는 또 다산이 조선에서 포교중이던 중국인 유방제(劉方濟) 신부에게 성사를 받은 후 선종했다는 천주교측의 주장에 대해서도 부정적인 견해를 보였다. 김 교수는 샤를르 달레의 『한국천주교회사』를 인용, 주문모 신부의 후계자로 왔던 유방제 신부는 당시 조선의 포교장인 피에르 모방(Pierre Maubant) 신부에 의해 “성직을 남용해 치부를 하고 타기할 만한 부도덕한 스캔들로 사제직을 공공연하게 더럽혔다”는 이유로 성무(聖務) 정지 처분을 받고 쫓겨난 사람이며, 또 종부성사의 시점도 다산의 사망 일자와 맞지 않다는 점을 들었다. 

즉, 살레의 기록에 따르면 유방제 신부는 1836년 4월4일 이전에 우리나라를 떠난 것으로 나오는 데 다산이 운명한 것은 적어도 사흘이 지난 4월7일(음력 2월22일) 오전 7시경으로 성사 자체가 성립될 수 없다는 것이다.

아무래도 ‘구전에 전해진 바’를 기록하고 또 이를 근거로 책을 편찬한 두 신부의 말, 그리고 이를 근거로 다산의 ‘신봉론’을 펼친 최 신부의 주장은 김상홍 교수가 다산의 저작 등을 근거로 제시하는 ‘합리적 의심’을 무너뜨리기에는 어려울 것 같다.

내가 보기엔 특히 유배지에서 중국 주교와 로마 교황에게 보내는 편지 작성에 다산이 일조를 했다는 기록은 허황되기 짝이 없다. 1811년(순조11)이라면 그가 다산초당에 머물렀던 시기로, 한 해 전인 1810년 9월에 큰아들 학연이 격쟁(擊錚, 억울한 일을 징이나 꽹과리를 쳐 하소연하는 일)을 통해 아버지의 신원을 호소, 석방령이 내려졌으나 정적들의 상소로 불발에 그쳤던 일이 있었다. 비록 무위에 그쳤지만 다산과 그 가족들은 오매불망 석방을 기다리며 근신하던 때였다. 한 가지 덧붙이자면 다산은 편지에 대해 과거의 신유사옥으로 인해 트라우마가 매우 심했다. 당시의 국청에서 가장 문제 삼았던 게 정약종, 황사영 등과 오간 서신이었다. 강진에서 아들들에게 보낸 편지에서도 그런 그의 심경이 잘 그려져 있다.

“편지 한 장 쓸 때마다 모름지기 두 번 세 번 읽어 보면서 이 편지가 사거리의 번화가에 떨어져 나의 원수가 펴보더라도 나에게 죄가 없을 것인가를 생각하면서 써야 하고, 또 이 편지가 수백 년 동안 전해져서 안목이 있는 많은 사람들의 눈에 띄더라도 조롱받지 않을 만한 것인가를 생각해 본 뒤에야 비로소 봉해야 한다”(박석무, 『유배지에서 보낸 편지』)

편지 한 통을 가지고 수백 년 뒤의 평가까지 생각하는 철저한 ‘자기검열’의 화신(?)인 다산이 (보안도 유지하기 어려운) 유배지 다산초당에서 ‘제2의 황사영 백서사건’으로도 비화될 수 있는 서신에  개입했다는 건 상상하기조차 어려운 일이다. 

다산연구소 박석무 이사장도 다산이 노년에 천주교 신자로 돌아왔다는 주장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이다. 그는 다산의 현손인 정규영이 지은 『사암선생연보』에 1822년 회갑을 맞은 다산이 자신의 사후 상제(喪祭)에 대한 유서인 「유명」(遺命)이란 글을 지어 아들들에게 주었다는 기록을 인용, 반론의 근거로 들고 있다. 「유명」에는 시체를 다루는 법부터 입관 및 장례절차, 묘소, 묘비 등 모든 것을 자신이 가르쳐준 그대로 따르라는 것과 그렇게 하지 않으면 효자가 아니라는 내용이 나온다.

박 이사장은 “이 점을 보면 다산이 죽으면서 신부에 의해 종부성사를 받았고, 예전에 천주교에서 떠난 것을 후회했던 철저한 천주교 신자였다고 말하는 일부 천주교 쪽의 주장이 얼마나 허무맹랑한 가를 알 수 있다”고 말했다.(박석무, 『다산 정약용 평전』)

지금의 명동성당 인근의 장악원(掌樂院) 앞에 있던 역관 김범우의 명례방 집에서 열린 신앙집회. 큰 갓(양반), 작은 갓(중인) 패랭이(상인) 흰 수건(평민) 등 머리모양이 각양각색인데, 맨 앞의 푸른 두루마기 차림의 선비가 세례자 요한 이벽이다. 1785년 봄 집회를 갖다 형조의 금리(禁吏)들에 의해 적발되어 ‘을사추조적발사건’으로 비화했는데, 이 집회에는 정약전·약용 형제도 참여했다.(성화. 김태)

그러면, 여기에서 처음의 물음으로 다시 되돌아 가 하나의 명제를 도출해 보자. 이는 국학계의 주류적인 견해이기도 하다. “다산이 배교한 것은 사실이며, 그후 다시  천주교를 외적으로나 내적으로 믿지 않았다” 줄여서 표현한다면 ‘외배내배’(外背內背)이다. 이 말이 전적으로 맞는 걸까? 

먼저 교계측은 앞서의 최석우 신부와 김상홍 교수의 논쟁이 그 사실관계가 어떻든 다산은 이른바 ‘외배내신’(外背內信)이었다는 주장이 거의 공식화되어 있다. 다시 말해 다산이 겉으론 배교를 했으나 마음으론 천주교에 대한 믿음을 유지했다는 것이다.

학계에서도 위 명제에 맞서 ‘외배내신’을 수용하는 견해가 일부 나오고 있다. 사실 천주교와 다산의 관계는 뭐라고 잘라 말할 수 없을 만치 매우 복잡하게 얽혀 있다. 추리소설처럼 복선도 깔려 있다. 둘 사이의 운명적 관계가 비등점에 올랐던 1801년의 신유사옥으로 돌아가 보자.

그해 2월10일 새벽 다산은 의금부 도사 한낙유에게  전격적으로 체포된다. 정약종이 천주교 서적과 성물을 담은 책롱(冊籠, 책상자)을 안전하게 숨기려다 적발된 소위 책롱사건의 여파였다. 전 영의정이자 영중추부사인 이병모가 위관(委官, 재판장)이고 영의정 심환지 좌의정 이시수 우의정 서영보이하 7명이 재판관이었다. 문사랑(問事郎, 중죄인을 심문할 때 기록과 낭독을 맡은 임시 벼슬)에는 부수찬 오한원 이하 3명, 별형방(別刑房,의금부에서 죄인을 국문할 때 특별히 설치하는 형방)에는 도사 한낙유 외 1명, 문서색(文書色, 조서를 작성하는 일을 맡은  사람)에는 도사 유맹환 외 1명 등 19명이 관여하는 대대적인 국청이 열렸다.
 
취조가 시작되었다. 심문관은 천주교가 임금과 부모의 은혜를 저버리면서까지 그토록 잊기 어려웠던 것이냐고 힐난했다. 

다산이 대답했다.
“저도 사람입니다. 임금의 큰 은혜는 죽은 사람을 살려내고 뼈에 살을 붙이는 것과 같았습니다. 어찌 한 치의 거짓이 있겠습니까”
심문관은 정약종의 책롱에서 나온 편지에서 다산을 거론한 내용을 두고 날카롭게 따져 물었다. 다산은 편지의 실물을 보여달라면서, “위로 임금을 속일 수 없고, 아래로 형을 증거할 수 없습니다. 오늘 제게는 다만 죽음이 있을 뿐입니다”라고 대답했다.

심문관이 편지를 보여주자, 다산은 누구의 것인지 모르겠다고 대답했다. 다른 편지 한 장을 더 보여주었다. 다산은 역시 모르겠다고 했다. 심문관이 다시 물었다. “여기 편지 속에 나오는 정약망(丁若望)이 누구냐?”

다산이 대답했다.
“저희 일가에 이런 이름을 가진 사람은 없습니다”
이번에는 심문관이 다산의 편지를 내밀었다. 
“이것은 누구에게 보낸 편지인가?”
“황사영입니다”

당시의 문답은 「신유추안급국안」에 그대로 전해진다. 그런데 ‘정약망’에 관한 다산의 대답은 명백한 거짓말이었다. 재판관은 약망이 세례명 요한의 한자 표기인줄 모르고, 다산 형제들의 돌림자인 약(若)자 항렬의 이름인 줄로만 알았던 것이다.

생사의 갈림길에 있었던 다산은 또 “천주학을 하는 자는 제게 원수입니다. 제게 열흘의 기한을 주시고 영리한 포교와 함께 나가게 해주신다면, 이른바 사학의 무리들을 마땅히 체포해 바치겠습니다”라고 말했다. 

다산은 국청이 진행되던 2월13일에는 당시 신도회 회장이던 최창현을 고발했고 조카사위인 황사영은 죽어도 변치 않을 원수라고 진술했다. 또 천주교의 우두머리로 김백순과 홍교만을 더 지목했고 묻기도 전에 천주교도를 체포해 신문하는 방법을 구체적으로 알려 주기도 했다. 다산은 심지어 나중에는 주문모 신부의 거처까지도 알려주었다. 자기가 말한 천주교 지도자들의 이름은 어차피 나올 수 있는 이름이기도 했지만, 절체절명의 순간에 다산이 생존을 위해 몸부림을 친 것은 사실이었다. 같은 날 추국장에 끌려온 총회장 최창현은 다산이 너를 사학의 괴수로 지목했다는 진술을 들이대자 “지난날 천주를 배반했던 일을 깊이 뉘우친다. 천주를 위해 기쁘게 죽겠다”고 말했다. 

국문의 결과를 재판장 이병모가 임금에게 보고했다.
“정약전, 정약용에게 애초에 물들고 잘못 빠져 들어간 것을 범죄로 논한다면 역시 애석하게 여길 것이 없지만, 중간에 사(邪)를 버리고 정(正)으로 돌아왔던 문제를 그들 자신의 입으로 밝히고 있습니다. 뿐만아니라 정약종에게 압수한 문서 가운데 ‘자네 아우(정약용)가 알지 못하도록 하게나’라는 말이 나오며, 정약종 자신이 썼던 글에도 ‘형(정약전)과 아우(정약용)와 더불어 함께 천주님을 믿을 수 없음은 나의 죄악이 아닐 수 없다’고 했습니다. 이 점으로 보면, 다른 죄수들과는 구별되는 면이 있습니다. 사형 다음의 형벌을 시행하여 은전에 해롭지 않도록 하소서” (『순조실록』 신유년 2월25일)

다산은 국청과정에서 1791년 신해년의 진산사건(신해옥사) 이후 확실히 천주교를 저버렸다고 진술했다. 다산은 신주를 불태운 이 사건을 두고 “윤상(倫常)을 해치고 천리를 거스르는” 천주교와 마음을 끊었다고 했다. 다산의 이러한 주장은 정조 생존 당시 쓴 3000자 분량의 장문의 「변방사동부승지소」의 내용과 일치하는 것이기도 했다. ‘중간에 사를 버리고 정으로 돌아왔던 문제’라는 국문 보고서의 구절은 바로 다산의 배교를 사법적으로 추인한다는 내용이다. 

그러나 이같은 다산의 ‘배교’(絶意) 주장에 대해 다른 견해가 있다.
한양대 정민 교수는 진산사건 이후 있었던 주문모 신부 미체포사건에는 그 배후에 다산이 있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사건의 전말은 이렇다. 북경의 구베아(Gouvea) 신부의 밀명으로 1795년 주문모 신부가 얼어붙은 압록강을 건너 조선에 숨어 들었다. 역관 최인길이 사는 서울 북촌(지금의 가회동)에 머무른 주 신부는 그러나 진사 한영익의 밀고로 체포될 위험에 처했으나 사전에 낌새를 채고 도피한다. 그리고 대신 주 신부로 변장한 최인길이 지황, 윤유일과 함께 체포되어 장살을 당한다.

정 교수는 이 사건에서 사전에 제보를 해 주 신부를 피신시킨 장본인이 다산이라며, 두 가지 기록을 근거로 들었다. 먼저 다산의 『자찬묘지명』 기록이다.
“4월에 소주(蘇州) 사람 주문모가 변복하고 몰래 들어와 북산 아래에 숨어서 서교를 널리 폈다. 진사 한영익이 이를 알고 이석에게 고했는데, 나 또한 이를 들었다. 이석이 채제공에게 고하니, 공은 비밀리에 임금께 보고하고, 포도대장 조규진에게 명하여 이들을 잡아 오게 했다”

여기 나오는 이석은  다산의 큰형 정약현의 처남이었다. 이런 화급한 상황에서 교회측에 주 신부를 빨리 피신시키라고 일러 준 것은 다산일 수밖에 없다는 게 정 교수의 추정이다. 또 하나의 기록. 이것은 1797년 8월15일 북경의 구베아 주교가 사천의 대리 감목 디디에 주교에게 보낸 편지글이다.

“이 일이 터진 것은 6월27일(음력 5월11일)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이 조선 대신들에게 밀고하는 자리에 어떤 무관 한 사람이 같이 있었는데, 그 사람은 천주교 신자였다가 배교를 했던 사람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무관은 배교의 죄를 진심으로 뉘우치고 고해성사를 볼 수 있는 날이 오기만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무관은 앞에 말한 배교자가 고발하는 모든 사실을 듣고는, 곧장 신부님이 머물고 계시다고 일러준 집으로 달려갔습니다. 그러고는 신부님이 고발당하였기 때문에 신부님과 천주교회에 위험이 닥쳤다는 것을 알려주었습니다. 그런 다음 신부님한테 한시라도 빨리 그 집을 떠나는 것이 좋겠다고 말하였습니다. 그러고는 자기가 신부님을 다른 곳으로 모시고 가겠다고 나섰습니다”

정 교수는 당시 다산이 우부승지로 있다가 체직되어 부사직(副司直) 신분, 즉 오위(五衛)의 무관직으로 있어, 편지에 등장하는 ‘무관’은 바로 다산을 가리키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자찬묘지명』과 구베아 주교의 편지를 겹쳐 읽으면 다산의 역할과 행동이 드러난다는 것이다.

결론적으로, 정교수는 1791년의 진산사건의 4년 후에 터진 이 사건의 전말은 다산이 진산사건으로 천주교에 대한 마음을 끊었다고 했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증명해 주는 것이라고 했다.  다산은 ‘외배내신’, 겉으로는 배교했지만 속으로는 믿었다는 논의가 나오는 이유라고 그는 지적했다.(정민, 『파란』) 

어쩌면 다산은 정 교수의 표현대로 정조와 하느님이란 두 개의 하늘이 있었고, 그 가운데 어느 하나를 위해 다른 하나를 버릴 수 없었던 깊은 고뇌와 방황이 있었는지 모른다. 

‘외배내배’인가 아니면 ‘외배내신’인가? 정말 다산을 다시 만난다면 한 번 물어보고 싶다. 그때 당신의 심중의 진실은 무엇인가고. 그러나 한편으로 생각해 보면 성마르고 의미 없는 질문이다. 정조와 하느님으로 이분화하는 것도, ‘내신’(內信)이냐 ‘내배’(內背)이냐를 분별하는 것도 부질없는 일인 것 같다. 당시의 공판 조서인 「추안급국안」을 보면, 다산은 자신이 살기 위해 배교만으로 그친 게 아니라 이를 인정받기 위해 신부와 신자들을 고발해 죽음에 이르게 하고 부역을 자청하기까지 했다.
 
천주교에 대한 신앙을 ‘무부무군(無父無君)의 대역죄’로 처단하는 몽매한 시대를 이고 살았던 한 ‘반체제 지식인’이 선택할 수 있는  길은 달리 없었을 것 같다.  살아 남아 훗날 어떤 성취가 있었느냐에 그나마 더 뜻을 두어야 하지 않았을까.  
 
/도시공감연구소장  김 창 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