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너진 집, 버려진 물건’ 대전의 재개발 잔해 수집가

[인터뷰] 여상희 설치미술 작가

2025-07-10     한지혜 기자
7년 간 대전 재개발지역 기록화 작업을 해온 여상희 작가. 갤러리 스페이스테미 전시장에서 만난 여 작가. 한지혜 기자.

각기 다른 문양의 나무 창살과 빛바랜 벽지, 화려한 장판과 수 천 장의 사진까지. 지난 7년 간 대전을 휩쓴 재개발 현장의 잔해가 한 공간에 모여 있다. 설치미술 작가 여상희가 사라지는 동네 곳곳을 다니며 수집한 누군가의 기억이자 근대도시 대전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는 물건들이다.

중구 테미로에 위치한 스페이스 테미(space TEMI) 갤러리에서 전시 중인 여 작가를 만났다. 재개발지역에서 버려진 소품과 생활용품을 곳곳에 배치한 전시장 풍경은 그가 직접 공들인 미장센이다. 주인은 다르지만 수 십 년 손때를 탄 물건들이 각기 자신만의 이야기를 속삭이고 있다.  

재개발이 진행된 행정동별로 정리한 기록 파일 여러 권이 책상 위에 놓여있다. 그가 찍은 수 천장의 사진이다. 이사를 준비하며 내놓은 살림살이, 빨간 락카 표식이 새겨진 담장. 이제는 주차장이 된 대전감옥소 관사와 초가지붕이 드러난 옛 가옥, 간판만 남은 슈퍼와 우연히 주인과 만나 찍은 집의 내부 풍경까지. 작가는 7년 전, 목동 재개발지역을 시작으로 선화동, 문화동, 변동, 성남동, 대화동 최근 대사동과 대동, 소제동 등을 답사하며 사라질 집을 기록해왔다. 

그는 “2018년 목동 재개발지역에서 고양이 구조를 하면서 작업을 시작했고, 당시 지역리서치 프로젝트를 통해 사라지는 동네를 기록했다”며 “사진에는 적산가옥 형태의 옛 집도 많고, 여러 번 보수한 흔적도 담겨있다. 한 겹 한 겹 지붕을 떼어내면 석면도 있고, 초가도 있고 옛 생활상이 그대로 보인다”고 했다.

작가는 대청호 수몰지역에 살다 터전을 옮긴 후 또다시 떠나야 했던 친구의 집도 소개했다. 영화 <쎄시봉> 촬영장소로도 쓰인 이 집엔 큰 나무가 있었고, 친구의 아버지는 이 나무를 살려 집을 지었다. 그는 “집을 철거하면서 나무는 남겨놨길래 좋아했는데, 나중에 가보니 나무도 사라졌다”며 “떠나온 친구도 재개발로 다시 집을 떠나야 했다”고 말했다.

성모병원과 충남대병원을 설계한 건축 1세대 박만식 건축가가 지은 주택도 두 채가 헐렸다. 고(故) 노무현 대통령이 1977년 대전지방법원 판사로 임용돼 잠시 재직할 때 살던 집과 대전 최초 선교사의 집도 사라졌다.

여 작가는 “건축사적으로, 의미적으로 중요한 집들이 있는데 순식간에 사라졌다”며 “재개발이 진행되면서 무작위로 없어지는 집을 기록하는 일도 중요한데, 현재 대전에선 공공 차원의 관심이 적어 안타깝다. 집이라는 공간이 사적 영역이다 보니 민간에서 할 수 있는 일은 한계가 있다”고 토로했다.

물건을 버린다는 것의 의미

전시장 한 쪽에 구현된 풍경. 화려한 옛 장판과 작은 탁상, 나무 창문과 흑백사진 앨범이 놓여있다. 한지혜 기자.

전시장 안쪽엔 빈티지 조명과 화려한 문양의 장판, 영자신문과 일제강점기 때 신문으로 겹겹이 발라 두꺼워진 벽지, 선교사 관사의 문고리, 색색의 타일, 옛 도시 풍경이 담긴 흑백사진 앨범이 놓여있다. 당시의 생활상을 엿볼 수 있는 물건들이다.

놓고가야만 하는 물건이 있는가 하면, 가져가지 못해 버려야만 하는 물건도 있다. 이주민들은 수 십 년 간 머물며 늘어난 짐을 들고 갈 수 없어 대부분 처분한다. 사진은 불태우고, 오래된 옷가지는 버리고, 책은 고물상에 내놓고, 가구도 버려야 한다. 물건은 곧 역사고, 시간이다. 결혼할 때 장만한 그릇과 큰맘먹고 들인 자개장 등 귀하게 여겨온 물건을 버리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여 작가는 “어쩔수 없이 버리는 짐을 들여다보면, 희귀한 물건이 많다. 어떤 주민분은 버리는 게 아까워 시집올 때 해 온 소중한 물건이라며 가져가라고 하시기도 한다”며 “아끼던 물건을 버린다는 건 어쩌면 자신이 가장 빛났던 순간을 놓고 간다는 의미기도 하다. 그래서 더 소중히 다뤄야 한다"고 밝혔다.

작가는 수집품 중 일부를 세종 국립박물관단지에 기증했다. 공공이 필요로 하고, 관리를 약속하는 경우 물건을 보내고 있다. "놓고 가야만 하는 물건이 자신의 삶을 회상할 수 있는 공유자산으로 남는다면 더할나위 없이 좋은 일"이라는 게 작가의 생각이다.   

재개발은 단지 집을 허물고 아파트를 짓는 도시개발의 문제만이 아니다. 사업이 지연되면서 주민들은 떠나고, 남은 사람들은 쪼개진다. 이주 전후로 거처를 떠나는 스트레스가 심해 병에 걸리기도 한다. 경제적인 문제뿐만 아니라 심적으로도 폐허가 되는 일. 작가 역시 현재 재개발지구에 거주하고 있다.  

그는 “공공이 도시재생 측면에서 체계적으로 공동체를 관리하고, 기록원 같은 방식으로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기록화에 참여할 수 있도록 지원해야 한다"며 "그래야 사회적인 문제도 줄어들 것”이라고 했다.

근대도시 대전이 더 잘 보존해야 하는 이유

여 작가가 지난 7년 간 대전 재개발지구 현장을 돌며 찍은 사진을 펼쳐보고 있다. 한지혜 기자.

여 작가는 최근 소제동과 대동 지역 동네를 답사했다. 어린시절부터 대전 원도심에 살았지만, 처음 접한 낯선 동네. 대전에도 잘 알려지지 않은 변두리 동네가 여전히 존재한다.  

그는 “알려지지 않은 동네가 많다는 건 그만큼 오래된 집들이 많다는 것”이라며 “그래도 요즘 젊은 사람들이 빈티지를 찾고, 오래된 것에 관심을 갖는 문화를 지켜보면서 이런걸 아껴줄 후손이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한편으론 다행스러운 일”이라고 했다.

이어 여 작가는 “오래된 집들을 보면 가구부터 벽지, 장판, 이불, 커튼까지 굉장히 화사하고 색이 화려하다”며 “한국전쟁과 일제강점기를 겪고 이겨낸 역사 등도 이유겠지만, 지금은 너무나 하얀 공간에 산다. 우리 감성이 그만큼 메말라가는 게  아닌가 하는 걱정도 된다”고 했다.

대전은 약 100년 역사의 근대도시지만, 시간이 지나면 대전도 곧 오래된 역사를 가진 도시가 된다. 역사가 짧은 만큼 더 잘 보존하고, 계승할 필요가 있다는 얘기다.

여 작가는 “역사성이 있고, 보존할 가치가 있는 물건을 직접 기증할 수 있고, 보관할 곳이 생긴다면 재개발지구 주민들도 본인의 삶이 쓰레기가 아니라 소중한 역사라는 걸 알게 될 것"이라며 "근대역사 연구자들도 실물을 갖고 있는 경우가 많지 않은데, 연구 측면에서도 도움이 될 수 있다. 공공이 민간과 협업해 공간 마련과 방법을 적극적으로 고민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오래된 집의 소멸을 마지막으로 기록하는 사람. 누군가의 삶이 깃든 물건을 외면하지 못하고 거두고야 마는 작가의 마음이 스러지는 동네를 비춘다. 잿빛 재개발구역에도 여전히 희망을 이야기하는 사람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