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죽음의 일터'로 밀려나는 故김충현 동료들
한전KPS, 트라우마 치료 도중 강제 복귀 지시 제동 없는 행정… “또 다른 재해 발생” 강한 우려
대전지방고용노동청 서산출장소가 태안화력발전소에서 작업 도중 사망한 고 김충현 비정규직 노동자 사고 이후 ‘작업중지 명령’과 ‘트라우마 치료 보장’, ‘특별감독 실시’ 등을 연이어 약속했지만, 정작 현장에서는 어떤 책임 있는 조치도 하지 않아 스스로 직무유기와 무책임 행정 논란을 자초하고 있다.
특히 고용노동부는 사고 현장을 목격하고 후속 조치를 취하는 과정에서 외상후 스트레스 장애(PTSD)에 노출된 동료 노동자들에게 일방적 복귀 명령을 내린 사측에 대한 제재 없이 사실상 방조했다는 비판을 받는다.
태안화력 고 김충현 비정규직 노동자 사망사고 대책위원회(대책위)는 5일 오후 서산출장소 앞에서 규탄대회를 열고 무기한 노숙 농성에 돌입했다.
전날 오후 12시 30분부터는 한전KPS비정규직지회 조합원들과 함께 항의 방문을 진행하고 새벽까지 릴레이 협의를 통해 작업중지명령을 내릴 것을 촉구했지만 서산출장소는 책임 있는 답변을 내놓지 않았다.
노동자 회복·치유 프로그램 과정 외면
대책위는 “한전KPS는 중대재해를 일으킨 책임 있는 사업주로서 고 김충현 산재사망 사고에 직·간접적으로 노출돼 정신적 충격을 겪은 노동자들의 회복을 최우선으로 고려해야 한다”며 “그러나 3일 한전KPS 태안사업처는 트라우마 치유 프로그램이 한창 진행중인 상황에서 하청업체를 통해 기습적인 업무 복귀 명령을 내렸다”고 비판했다.
대책위는 이어 “트라우마를 겪고 있는 노동자의 회복을 외면한 채 일방적 업무 복귀를 명령하는 사업주의 만행을 사실상 방조한 고용노동부를 강력히 규탄한다”고 강조했다.
대책위에 따르면 한전KPS는 지난달 5일 “정부 가이드라인만 있다면 정규직 전환에 협조하고 트라우마 치료에도 적극 협력하겠다”고 밝힌 바 있다. 서산출장소도 같은 날 한전KPS와 협력업체에 트라우마 치료를 위한 조치를 취하라는 내용이 담긴 공문을 발송했다.
이후 고용노동부 산하 안전보건공단과 협의 후 치료 프로그램이 정리돼 6월 말부터 집단 및 개별 상담이 본격적으로 시작됐고 치료를 현재까지도 진행 중이다.
고 김충현 동료 노동자들이 받는 트라우마 예방 프로그램은 ▲심리안정화 ▲위기상담 ▲집단 회복 ▲복귀 전 정서·행동 평가 등 5단계 구조로 5주 이상 진행되는 전문 과정이다.
특히 동일한 일터로의 복귀는 사고 트라우마를 재자극할 수 있기 때문에 복귀 시점은 당사자의 상태를 충분히 고려해 결정돼야 한다.
트라우며 겪는 노동자 고위험군 15명
대책위는 “이런 원칙과 과정을 무시한 한전KPS의 지시는 피해 노동자들의 대한 배려가 전혀 없는 오로지 비용과 효율만을 앞세운 처사”라며 “노동부도 사측의 일방적 복귀 명령 이후에도 아무런 제대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대책위는 서산출장소에 트라우마 치유 프로그램 보장을 위한 공문을 재발송하고 작업중지명령을 포함한 행정력을 발휘할 것을 요구했다.
대책위는 또 “하지만 서산출장소 측은 ‘아무런 약속을 할 수 없다’며 무책임으로 일관했다. 태안화력발전본부는 2018년 노동부 특별근로감독 결과 1000건 이상의 위반사항이 적발된 곳이다. 사고 이후 진행중인 특별근로감독에서도 1000건 이상의 위반사항이 드러나고 있다”고 성토했다.
현재 고 김충현의 사망사고 이후 트라우마를 겪는 노동자는 고위험군 15명과 일반군 21명이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이에 대책위는 우선 원청인 한전KPS와 고 김충현이 몸 담았던 하청업체 한국파워오엔앰, 삼신 등을 향해 계획된 트라우마 치유 프로그램을 8월 29일까지 보장할 것과 치유기간 작업 중지 유지를 촉구했다.
또 치유기간 중 임금은 정상근로 임금과 동일하게 지급하고 복귀는 중증자에 대한 추가 치유, 고용노동부 사고조사·특별근로감독·종합안전보건진단명령·안전보건개선계획서 제출 및 현장개선을 종합적으로 판단해 대책위와 협의해 진행할 것을 요청했다.
“작업 중지 할 사항 아냐, 지인에게 법적 자문 구해”
서산출장소 감독관은 전날 오후부터 이날 새벽까지 이어진 대책위와의 면담에서 부적절한 발언을 한 것으로도 알려지고 있다.
대책위에 따르면 사측의 일방적인 작업 복귀 명령에 대해 “고용노동부가 작업중지 명령을 포함한 더 강력한 행정력을 발휘해야 한다”고 요구하자 “작업중지 할 수 있는 근거를 찾아오라”고 답변한 것으로 알려졌다.
앞서 지난달 4일 대책위와 서산출장소의 면담에서 감독관은 “작업중지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고용노동부가 하거나 사업주가 하는 것”이라며 “우선 사업주가 작업중지를 내리도록 하겠다”고 안내했다.
이에 대책위는 “사업주의 자율로 작업중지를 내리면 사업주가 자의적으로 중지를 풀 수 있다. 이에 따른 고용노동부의 대책이 있나”라고 물었고 감독관은 “감독을 통해 사업주의 작업중지 미이행에 대해 (작업중지 명령을 다시) 내리도록 하면 된다”고 말했다.
대책위는 새벽까지 장시간 논의가 공전되자 출장소의 작업중지와 관련한 앞선 주장이 고용노동부의 공식 지침인 것인지에 대한 확인을 요청했다.
대책위는 이에 감독관은 “작업 중지 할 사항이 아니다. 이는 (고용노동부 본청의 지침이라기 보다) 주변 지인에게 법적 자문을 구했다”라는 식으로 답변했다고 주장했다.
고용노동부의 위험상황신고센터는 365일 24시간 운영되고 있다. 대책위는 서산출장소에 즉각적인 작업중지 명령을 위한 신고를 구두, 전화, 서류로 접수할테니 이에 대한 위험 상황 여부를 즉각 확인해줄 것을 요청했다.
이 과정에서 출장소 측은 위험 신고에 대한 접수와 즉각 조치를 거부하며 “(위험상황) 신고하세요. 신고하시는데 (감독) 나가는 것은 지금 생각을 한번 해보겠습니다. 저도 위험할 수 있거든요”라고 답했다.
이에 대책위는 “위험하면 새벽 2~3시에도 나간다. 경찰은 신고 받으면 새벽이라 날 밝을때까지 기다려 출동하나. 야근 근무때는 사람이 죽어도 상관없냐”며 강하게 항의했다.
“노동자 살려달라고 목에 피가 나도록 외쳤다”
대책위는 특히 고 김충현 노동자가 사망한 상태로 몇 시간 방치됐던 점을 언급하며 “(고인이 사망한 장소는) 작업 때문에 오가며 다 봤다. 몇 시간째 방치된 와중에 건물 2층에서 업무를 보거나 작업 준비를 해야했다”고 호소했다.
이에 대책위는 출장소 측에 “PTSD가 무엇인지 알고알고 있냐”고 물었고 소장은 “잘 모르겠다. 저희 교육받은 사람도 없다”고 답변했다.
서산출장소 복도에는 PTSD 관련 8주 치료 프로그램을 안내하는 고용노동부의 포스터가 게시돼 있다.
고 김충현 노동자의 동료인 최강호 씨는 연단에 서서 “발전소에서 18년 째 근무하고 있다. 현재 트라우마 치료를 받고 있다. 우리 눈앞에서 함께 일한 동료가 처참하게 기계에 말려 들어가 사망했다. 아직도 그날의 기억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최 씨는 “사측은 복직을 강요하고 치료가 끝나지 않았고 사고에 대한 진상도 규명되지 않았다. 돌아갈 일터가 안전한지 확신하지도 못하는데 그런 현장에 우릴 밀어넣고 있다. 사람이 할 짓인가. 사람이 죽었다. 사고를 낸 시스템은 그대로다. 그 안에 서서 일해야 한다”고 부르짖었다.
그는 이어 “국가가 나서서 노동자를 보호해 달라고, 살려달라고 목에 피가 나도록 외쳤다. 고용노동부는 노동자 목소리를 듣지 않는다. 이런 무지하고 무책임한 태도에 참극은 또 생긴다”고 경고했다.
김영훈 한전KPS비정규직지회장은 “우리가 여기 온 것은 구걸하러 온 게 아니다. 한전KPS가 노동부에 지도를 받았으면 따르면 된다. 그걸 안 하고 있다. 트라우마 치료 협조해달라고 대책위와 고용노동부가 합의한 문서까지 파기하며 사측을 비호한다”며 “벼랑 끝에서 손을 잡아달라는 노동부는 노동자의 손을 뿌리치고 다시 벼랑으로 몰고 있다”고 성토했다.
김 지회장은 “정말 답답하다. 수십년 동안 하청 노동자로 살아온 우리가 어떤 마음으로 이 자리에 있는지 똑똑히 알길 바란다. 분노의 화살은 살인 기업 뿐 아니라 노동부에게로 향할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