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화정 파괴한 윤석열, 보수의 딜레마 불렀다

[데스크칼럼] 동물과 다른 '인간의 질서'에 대해

2025-01-06     김재중 기자
법원이 31일 내란수괴 혐의를 받고 있는 윤석열 대통령 체포영장을 발부했다. 현직 대통령 체포영장 발부는 헌정사상 처음으로 기록된다. 디트뉴스DB. 

어떤 공동체든 내부에 ‘질서’가 있기 마련이다. 군집을 이루며 사는 동물도 질서 없이 생존하지 못한다. 공동체의 우두머리는 늘 ‘질서유지’를 위해 안간힘을 쓴다. 기득권 유지를 위한 본능이겠지만 궁극적으로 공동체를 존속시키는 원동력이 된다.

질서 있는 공동체와 그렇지 못한 공동체가 경쟁할 경우, 어떤 쪽이 승리할 것인지는 자명하다. 이 법칙은 사피엔스와 네안데르탈의 경쟁을 넘어서 ‘생명의 진화’ 전체를 아우르는 자연법칙에 가까운 설명이다.

침팬지 무리가 우두머리를 교체하는 방식, 늑대 무리가 사냥한 먹잇감을 처리하는 방식, 심지어 꿀벌이나 개미 군집에서조차 질서가 존재한다. 생물학자들은 식물과 곰팡이, 세균 등도 공생을 위해 질서를 유지하고 있다고 본다.

지금 대한민국은 ‘질서’를 잃고 방황하는 불안한 공동체가 됐다. 엉뚱하게도 외부세력이 아닌 내부 기득권세력이 ‘친위쿠데타’로 질서를 깨뜨리고 공동체를 혼란에 빠트렸다. 동물군집에서도 나타나지 않는 이 모순적 상황을 이해하려면 인간만 가지고 있는 ‘끝없는 욕망’에 대해 우선 들여다봐야 한다.

욕망의 한계선은 어디?

윤석열과 그 추종자들은 기득권의 정점에 서 있으면서도 대한민국 ‘헌정질서’가 부여하고 있는 ‘권력과 권한’에 만족하지 못했다. 대한민국 공동체를 움직이는 행정권력, 그 중에서도 가장 큰 두 힘인 인사권과 재정권을 마음대로 행사하고, 검찰 권한을 남용해 정적을 탄압하고 언론을 겁박했음에도 그 욕망을 채우지 못했다.

제왕적 대통령제 안에서 이미 초법적 권한을 누리고 있음에도 입법권력의 견제, 시민사회와 언론의 비판을 용인하지 못했다. 결과적으로 권력기반인 ‘헌정질서’를 스스로 파괴해 모든 권력을 자신이 취하겠다는 욕망에 사로잡혀 ‘비상계엄’이라는 최악의 수를 두고 말았다. 열에 일곱을 가지고 있던 자가 나머지 세 개를 더 갖겠다고 제 손에 쥔 일곱을 던져버린 꼴이다.

윤석열과 그 추종자들은 ‘질서 있는 퇴진’의 기회마저 스스로 던져버렸다. 질서를 기득권의 통제장치로 본다면 ‘질서 있는 퇴진’이란 기득권을 유지한 채 물러서는 것을 의미한다. ‘국민의힘’으로 상징되는 대한민국 기득권이 비상계엄 직후 언급한 ‘질서 있는 퇴진’이란 결국, 윤석열을 내치되 자신들의 기득권만은 지키겠다는 뜻이었다. 물론 윤석열의 거부로 이마저 실패했다.

진보와 보수, 가치마저 흔들

끝없는 욕망은 화를 부르는데 그치지 않았다. 윤석열로 인해 대한민국 보수와 진보의 가치마저 흔들리고 있다. 사실 ‘질서’를 바라보는 시각에서 진보와 보수는 크게 엇갈린다. 보수는 현재 작동 중인 ‘질서’를 유지하고 강화하려는 세력이다. 그래서 질서와 기득권, 보수는 일맥상통한다. 보수는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항상 질서유지를 원한다.

반면 진보는 ‘새로운 질서’를 추구한다. 진보가 기존 질서의 문제점을 찾아내 비판하거나 공격하는 양상을 보이는 이유다. 중요한 것은 진보나 보수 누구도 ‘질서’를 부정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질서를 부정하면서 공동체의 일원이 될 수 없다는 것은 상식을 넘어 진리에 가깝다.

그런 대한민국 보수가 큰 딜레마에 빠졌다. 보수의 우두머리 윤석열은 비상계엄을 통해 질서 중의 질서인 ‘헌정질서’를 파괴했다. 중학생도 아는 헌법-법률-명령 위계를 명령-법률-헌법 순으로 뒤집었다. 계엄 포고령으로 헌법을 유린한 것도 모자라 수사기관의 출석요구와 판사가 발부한 체포영장 집행까지 거부하는 등 법치 질서마저 부정하고 있다.

보수는 윤석열을 두둔하려면 ‘질서’를 부정해야 하고, 질서를 수호하려면 윤석열을 내쳐야 한다. 양립하기 어려운 모순적 상황에서 집권 여당인 국민의힘은 전자의 길을 선택했다. 다만 오래 버틸 동력은 없어 보인다. 모순은 늘 분열을 부르기 때문이다.

가치지향이 흔들리는 건 진보도 마찬가지다. 우리 헌법과 법률이 제대로 담아내지 못한 환경, 노동, 인권, 평등, 평화 등 ‘새로운 질서’를 주장하기에 앞서 ‘헌정질서’를 수호하는데 앞장서야 할 처지다. 지향하는 가치를 후순위로 미뤄 둘 수밖에 없다.

내란 범죄, 단죄해야 할 이유

이제 단죄만 남았다. 영화 ‘서울의 봄’에서 전두광은 쿠데타 모의 중에 “실패하면 반역, 성공하면 혁명”이라고 주장한다. 우두머리에 도전해서 성공하면 권력을 얻고, 실패하면 죽음을 맞는다는 동물적 질서를 강조한 셈이다.

그러나 전두광은 인간종이 새롭게 만든 ‘인간의 질서’를 간과했다. 인간종이 동물계의 질서를 거부하고 ‘공화정’이라는 새로운 질서를 작동시킨 것은 200여년 전인 ‘프랑스혁명’을 통해서다.

기요틴으로 왕당파를 단죄하면서 수립한 공화정은 국민주권주의에 반하는 도전을 결코 용납하지 않는다. 대한민국을 포함한 현대 민주국가가 전쟁, 집단 학살과 같은 반인류 범죄와 더불어 반공화주의 내란 범죄자를 극형에 처하는 이유는 단 하나의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서다.

인간은 동물과 다른 질서를 가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