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 대백제전] 백제대제, 격동과 변화 넘어 ‘역사·문화’ 축제로 도약
[특집 시리즈②] 정신문화 계승 위주에서 '역사 종합 축제'로 변모 개최 지역, 공주·대전으로 확대...'상징성' 상실됐다는 비판 직면 1990년대 들어 양적 성장보다 '내실화' 다지려는 움직임 2010년 세계 대백제전 이후 '글로벌화' 기틀 마련
전쟁의 포성이 잦아들고 휴전 협정이 맺어질 즈음인 1955년.
부여군 지역 유지 몇몇이 백제의 삼충신으로 일컬어지는 성충, 흥수, 계백을 모시는 삼충사(三忠祠) 창건을 도모하기 위해 모였다.
이 자리에서 지역 주민이 대대적으로 참여하는 ‘백제대제(백제문화제의 최초 명칭)’의 계획안이 처음 나왔다.
여기서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행사 기금을 모아 제사(祭事)를 지내며 시작한 게 지금의 ‘백제문화제’다.
올해로 69회차를 맞는 ‘백제문화제’는 13년 만에 ‘대백제전’으로 공주, 부여 일원에서 동시 개최되고 있다.
본지는 이번 편에 이어 총④편에 걸쳐 역사만큼 중요한 시작점과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성을 여러 사람의 삶을 통해 조명해본다. <편집자주>
①“백제문화제 시초된 1955년, 그때 내 나이 열일곱”
②백제대제, 격동과 변화 넘어 ‘역사·문화’ 축제로 도약하다
③박정희부터 윤석열까지, 역대 대통령들도 반한 '백제문화제'
④백제문화제, 왜 '격년제'가 필요한가
[부여=디트뉴스 김다소미 기자] 앞선 임병고 회장의 구술에 따라 최초의 ‘백제문화제(백제대제)’는 지역민의 정성과 나눔이 모여 결합된 ‘정신문화’ 계승 차원의 대규모 공동체 제사였음을 알 수 있다.
그에 따르면 1955년 4월 18일 첫 백제문화제가 열렸던 당시, 읍내 거리는 축등과 대제의 서막을 알리는 현수막이 뒤덮였다고 한다.
백제 멸망과 동시에 함께 산화된 원혼들을 달래는 제 중심의 행사로 시작됐고 삼충사를 새로 건립할 부소산 자리에는 병풍, 삼문이 세워져 정성스런 임시 제단이 완성됐다.
이외 지역민들의 화합을 도모할 수 있는 전국 규모의 농악대회, 국궁대회, 그네대회 등도 치러졌다는 점, 해가 거듭될수록 부대행사가 추가됐다는 점은 지역 ‘종합 문화 행사’로서 성격도 엿보인다.
1950~70년대 ‘정신문화 계승’→‘지역종합축제’
1960년대 행사 구성 본격 변화..1990년대 ‘역사재현 축제’ 기틀 다져
대전도 개최했지만, 분산 추진으로 ‘정체성’ 흐려져
1990년대 국내 3대 문화제로 자리매김
지금의 백제문화제가 있기까지 많은 변천 과정이 있었는데, 명칭과 개최 지역, 주최 기관 등은 연도별로 숱한 변화를 보여준다.
1~2회 때는 ‘백제대제’로 불리다 3~7회에는 ‘백제제’로 불렸고 8회때는 5·16군사정변 등 분위기의 영향을 받아 ‘백제충렬제’로 바뀌기도 했다.
이후 백제문화제를 충남도가 주최하게 되면서 집행위원회가 행사를 주관하기 시작했던 1965년 11회 때부터 ‘백제문화제’라는 이름으로 불려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이후 12회부터 개최 지역에 공주가 포함되면서 동시 개최됐고 1975년 21회부터는 대전으로까지 개최지가 확대됐다.
이에 따른 어려움도 존재했다. 부여·공주·대전에서 분산돼 열리다 보니 상징성이 약화되면서 기존에 목표했던 축제의 열기를 넓히겠다는 목적은 퇴색됐다.
첫 ‘백제대제’의 정성과 공동체성이 물리적 공간 분산에 따라 함께 사라졌던 것이다. 이에 대전 개최는 ‘전시 위주의 급조된 문화제’라는 오명을 안고 4년만인 1978년 24회 때 중단됐다.
1979년에 이르러서는 부여와 공주가 격년으로 백제문화제를 개최했는데 개최지가 아닌 지역은 제전 행사만 치루는 소제(小祭)로 거행했다.
2007년부터 부여, 공주가 통합돼 동시 개최돼 지금까지 이어진다.
행사의 구성이 본격적인 변화를 맞이한건 1960년대 들어와서다.
행사 주체가 충남도인 관 주도로 행해지다 보니 프로그램도 상당히 추가되고 종합적 성격을 띄게 된다. 1970년대부터는 기존 프로그램을 근간으로 하면서 부수적 문화 행사가 추가됐다.
행정기관 보조금도 전체 예산의 20~30%에 의존해 여전히 지역민의 찬조금이 큰 역할을 했지만 1973년 백제문화제 활성화 대책이 수립되고 ‘백제문화선양위원회’가 조례화됐다.
이후 행정기관 보조금은 80% 이상을 기록했고 지역 축제에서 전국 축제로 발돋움할 발판이 됐다.
1986년 아시안 게임과 88년 올림픽 문화상품으로 백제문화제가 선정되는 등 행정, 재정적 지원이 대폭 확대됐고 공식적으로 이 시기를 ‘민관협동기’라고 부른다.
1990년대 초반은 역사재현 축제의 기틀을 다진 시기다. 이때 ‘내실화’를 중요시 했던 선양위원들의 노력으로 행사 종목을 축소하는 대신 내실을 기하려는 움직임이 일어나기도 했다.
개최 지역에 대전이 합류했던 때처럼 ‘전시성 행사’라는 이미지가 각인됐고 다른 지역 축제와 차별성이 없다는 비판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이는 결국 백제문화제의 정체성을 확보하려는 대내외적인 의지가 있었던 것으로 풀이된다.
관의 재정적 지원이 뒷받침돼 외형적으로 비대해졌지만 특징과 개성을 부각시킬 행사를 보기 어렵다는 지적은 이후 몇 년 간 지속됐다.
이 같은 비판은 백제문화제 발전을 위한 노력으로 이어졌다.
1992년부터 개선을 위한 전문 연출가, 학계, 문화재 전문가 등으로 구성된 발전연구원이 발족됐고 연구 보고서도 나왔다.
양적 성장에 머무르지 않고 방향성을 재정립하기 위한 움직임을 보였다는 점에서 주목할만 하다.
새천년을 맞이한 2000년대에 들어서 그간의 노력이 결실을 맺는 성과가 나타나기 시작한다.
역사성을 강조한 대형 이벤트를 개발해 ‘사비정도 축제, 역대 6왕 행사, 역사문화 행렬, 계백 장군 출정식, 백제 사신 행렬 등이 그 결과다.
축제의 글로벌화를 위해 해외 자매도시와의 교류와 관련 공연도 이어진다.
부여, 공주 일대는 일본인 관광객이 대폭 증가하기도 했는데 해상왕국으로서 국제 무역을 주도했던 백제가 당시 일본과의 관계가 매우 친밀했다는 역사적 사실 때문이다.
당시 백제문화제 공식 공연으로 일본 백제왕제, 한일서예초대전, 일본 백제 왕족 신위 행렬, 메이와 아악공연 등이 채택됐고 행사의 격조를 높이는데 큰 공헌을 했다는 평가를 받으며 이때부터 ’참여·체험형‘ 축제로 거듭난다.
이후 백제문화제는 240여억 원의 막대한 예산과 조직을 투입해 ’2010년 세계 대백제전‘을 치르게 된다.
한달동안 369만 명의 관람객이 방문하고 140억 원의 순수익을 올리면서 백제문화제의 위상을 한껏 끌어올렸다.
지금 열리는 대백제전은 이때 이후로 13년 만이며, 17일간 열리는 행사 기간 목표 관람객 수는 150만 명이지만 축제가 절반 가까이 남은 현재, 100만 명을 이미 넘어섰다.
2010년 이후로 부대행사에 ’백제문화‘와 관련된 국제 세미나, 포럼 등이 연이어 열리면서 지평을 넓혀 나가고 있다.
’백제 미마지‘ 공연은 일본에 백제 기악을 전해줬다는 역사적 사실에 부흥해 2014년부터 고등학교 한국사 교과서에 수록되는 성과도 있었다.
임 회장은 “많은 변화를 거쳐 지금의 행사에 이르렀지만, 여전히 ‘내실화’는 필요하다고 본다. 프로그램이 얼마나 많고 부여, 공주에 관광객이 몇 명이 방문했는가로 행사의 성패를 따지기엔 무리가 있다”고 진단했다.
그는 “과거 백제문화제는 완벽한 민간주도로 시작해 행사 종목도 지역민들이 알아서 정했다. 지금은 관에서 정해서 내려온다”며 “이는 본래 백제문화제의 상징성과 다소 거리가 있다. 현대 흐름에 맞춰 변화를 줘야 하지만 작은 부분부터 민간의 영역을 확보해 나가야할 것”이라고 제시하기도 했다. <3편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