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막아야 된다는 생각 뿐” 비 뚫고 생명·마을 구한 부여 이장들과 청년농업인들

임천 두곡2리 한명식 이장, 새벽에 90대 노부부 생명 지켜 세도 동사2리 조진구 이장 등 청년농업인 남궁성 씨와 마을 침수 막아

2023-07-19     김다소미 기자
왼쪽에서 5번째가 부여군 임천면 두곡2리 한명식 이장이다. 자원봉사에 나선 마을 부녀회와 함께 90대 노부부의 집을 복구 하고 있다. 김다소미 기자.  

[부여=디트뉴스 김다소미 기자] 끊이지 않고 내리던 비는 전국 곳곳에 무거운 상처를 남겼다. 물적 피해는 물론, 다수의 인명사고를 발생시키며 비가 멈춘 19일 현재까지도 실종자 수색은 이어지고 있다. 

안타까운 비보 속에서도 본격적인 폭우가 시작됐던 지난 14일과 15일 새벽, 마을 저지대에 살던 90대 노부부를 신속하게 대피시킨 부여 임천면 두곡2리 한명식 이장과 하천 제방 붕괴 우려에 건설 장비들을 사비로 투입해 마을 침수를 막은 청년 농업인들의 이야기가 귀감이 되고 있다. 

90대 노부부의 집이 물에 잠겨 마을 사람들이 복구에 나섰다. 모든 집기들을 밖으로 빼낸 모습. 김다소미 기자. 

“이장인디 별수 있슈?...마을 안전이 최우선이지”

14일 새벽 3시 30분, 한 이장의 핸드폰이 울렸다. 윗 마을에 사는 염소를 키우는 지인 동생의 전화였다. 

당시 지인은 해외로 출국했고 그의 동생이 집을 봐주고 있던 상황이었다. 지인의 동생은 새벽부터 쏟아지는 비에 염소 축사가 물에 잠길 조짐을 보이자 다급하게 한 이장에 연락해 도움을 요청했다. 

한 이장이 현장에 도착해보니 어찌할 도리가 없다고 판단해 임시로 조금 더 고지대로 염소들을 옮긴 후 마을 순찰을 돌았다. 

새벽 4시를 조금 넘긴 시간, 임천면과 세도면을 이어주는 작은 교량 바로 아래에 거주하는 귀가 어두운 90대 부부가 생각났다. 

한 이장은 곧바로 차를 돌려 노부부의 집으로 달려갔고 도착했을 땐 이미 마당에 무릎 정도의 높이로 물이 차오르기 시작했다. 

어르신들은 물이 들어차는 줄도 모르고 주무시고 계셨다고 한다. 한 이장은 동네 다른 주민들 몇 명과 지역 파출소에 연락해 노부부를 업고 밖으로 나와 마을회관으로 무사히 대피시켰다. 

한명식 이장은 <디트뉴스>와 만나 "어르신들이 귀가 잘 안들려 대피방송이나 연락을 잘 못받을 수 있어 걱정됐다"며 "이장으로서 할일을 한 것일 뿐"이라고 밝혔다. 

임천면 부녀회와 인근 부대 장병들은 19일 현재 노부부의 집을 복구하고 있다. 

15일 새벽 동사2리 조진구 이장을 비롯해 이장단과 청년농업인들은 사동천 붕괴로 인한 대형 침수를 막기 위해 중장비를 수소문해 섭외했고 자력으로 제방을 복구했다. 남궁성씨 제공. 

“이장입니다. 둑이 무너지니 신속하게 대피해 주시기 바랍니다. 실제상황 입니다”
마을 사람들 합심으로 사비 털어 무너진 제방 다시 쌓고 대형 침수 막아 

임천면 인접지인 세도의 사동천은 16일 오후 3시께 일부가 붕괴됐다. 응급 조치로 더 큰 피해는 막은 셈이었지만 이후 또 비가 내리면서 안심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15일 자정, 동사2리 조진구 이장은 농어촌공사 세도지소로부터 사동천 제방이 다시 붕괴됐다는 소식을 들었다. 수문을 포함해 둑 5m 가량이 이미 유실됐다. 

조 이장은 마을 스마트 방송을 통해 미처 대피하지 못했을 사동천 아랫 마을 사람들에게 대피 안내를 했다. 

사동천이 완전 붕괴돼 물이 범람하면 인근 30가구와 농경지 침수는 불보듯 뻔한 얘기였다. 하우스에서 일하던 외국인노동자를 비롯해 마을 사람들은 안전한 곳으로 대피하기 시작했다. 

새벽 2시가 다 됐을 무렵, 세차게 내리던 비는 잠시 멈췄고, 청년농업인 남궁성씨 등이 포크레인, 덤프트럭 등 중장비를 수소문해 현장에 도착했다. 

때마침 인근 주교천 석축 공사를 진행하던 강종수 씨의 도움으로 큰 돌과 흙을 급하게 빌려와 급물살에 퍼부으니 물길이 어느정도 잡히는 효과가 있었다. 

이들의 작업은 다음날 오후 1시까지 지속됐고 부여군은 이들이 사비를 들여 부른 중장비 값 등을 보전해주겠다는 약속을 했다. 

조진구 이장은 "마을 사람들 모두가 합심해서 더 큰 피해를 막을 수 있었다. 니논, 내논 할 것 없이 청년들이 그 새벽에 장비를 구해와 결정적인 도움이 됐다"며 "앞으로 다른 침수 지역 복구가 막막하지만 십시일반 또 도우면 되지 않겠나"라고 말했다. 

이곳에서 농사를 짓는 남궁성씨도 "워낙 급박했던 상황이기에 '누구의 할일'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았다"며 "인명피해가 없어 다행"이라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