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재조명) 독도는 우리 땅, 영웅바위는 당진 땅 ②

조선시대 영웅바위···구국의 영웅

2020-10-22     최종암 기자
갈매기의 휴식처 영웅바위

삼국시대 이후 고려시대를 거쳐, 특히 조선시대 당진과 연관된 시인문사들은 앞 다퉈 영웅바위를 기록했다. 그들은 배로 영웅바위를 오가며 수많은 위험을 감수해야 했으며 무사히 목적지에 도착해 영웅바위를 회상했다. 고즈넉한 정자에서 영웅바위를 내려다보며 시를 짓는 시인들은 넉넉한 마음으로 바위를 칭송했으나, 풍랑에 위기를 넘긴 사람들은 가슴을 쓸어내리며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당시 이들이 영웅바위를 지칭한 명칭은 영공암(令公巖), 영암(英巖), 영공(令公), 영옹암(令翁巖 ) 등 이었다. 그러던 것이 한글식 표현인 영웅암으로 변천되고 오늘날 영웅바위로 자리매김했다.

그들의 시와 기록은 대체로 영웅바위를 칭송하는 내용이 많다. 그중 영웅바위의 신령함과 굳센 기상, 웅장함을 잘 표현한 조선시대 문신 이식의 택당집이 눈에 띈다. ‘영공암(令公巖) 면천(沔川)의 대진(大津) 한 가운데 있다’라는 이식의 시에는 “영웅바위가 면천에 속한 대진 한복판에 있고, 파도가 밤낮으로 소리 내며 부서지나 대인처럼 우뚝 서 굳세고 강하게 하늘을 떠받치고 있다. 그러니 영공(令公)이란 이름이 무색치 않으며 뱃사람도 공경하여 제사를 올린다”는 내용이 있다.

이식은 시의 마지막 구절에 오랑캐를 평정하고 민생을 안정시켜야 하는 현실을 안타까워했다. 아마도 영웅바위의 힘을 빌려 세상을 평안하게 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식의 시처럼 실제로 영웅바위는 역사 속 오랑캐를 물리치고 해상의 강도와 도적을 잡아내는데 커다란 역할을 했다. 특히 바위에 얽힌 전설 중 임진왜란 때 왜구를 물리친 내용이 대표적이다. 이 전설은 ‘충청남도읍지’ 제7책 ‘직산현읍지’와 ‘충청남도읍지’제2책 ‘직산읍지’(1899) 고적조에 기록돼 있다.

임진왜란이 발발하고 왜군이 아산만으로 침입해 조선이 일촉즉발의 위기에 놓였다. 왜군은 지금의 서해대교를 지나 대진나루로 돌진했다. 이 때 바위는 신통력을 발휘하여 조선수군을 지휘하는 거대한 장수의 모습으로 변하였고 주변의 작은 바위들은 무수한 병사들로 보이게 했다. 바위로 변한 장수가 병사들을 이끌고 쳐들어오는 모습을 본 왜군은 혼비백산 도망을 치고 말았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조정은 바위의 이름을 영웅바위라 칭하고 정3품의 관직을 하사했다고 한다. 실제로 영웅바위를 멀리서 보면 거대한 장수가 주먹을 불끈 쥐고 서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인근주민들은 장수바위라고도 부른다. 왜구로부터 구국의 영웅역할을 했던 영웅바위의 활약은 고려시대에도 빈번했다.

삼국시대부터 대당교역의 교두보로서 역할을 톡톡히 했던 대진은 당시 서산, 태안 등 충남은 물론 경기만 일대의 여러 고을과의 교류를 이끌었던 서해안 중심 나루터였다. 하지만 신라가 망하고 고려가 들어서면서 조금씩 쇠퇴를 한다. 그 이유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대진의 존재는 고려말부터 다시 부각되기 시작한다. 빈번한 왜구의 침략 때문이었다.

왜구가 수백 척의 선단을 이끌고 대진 앞바다에 나타나면 드넓은 바다 전체가 기괴하고 거대한 꽃밭으로 변했을 것이다. 몇 천에서 몇 만에 이르는 왜구를 쇠락해가고 있는 고려로서는 막을 길이 없었다. 내륙 깊숙한 곳까지 쳐들어와 아녀자를 유린하고 노략질을 일삼았던 왜구는 조창(漕倉)인 하양창(경기도 평택시 팽성읍)을 집중공격 하였다.

왜구의 침략으로 서 평택지역은 폐허가 되었고 백성들은 피난을 떠나기 급급했다. 백성들이 떠난 대진은 과거의 화려한 역사를 간직한 채 서서히 황폐화되기 시작했다. 대신 군사적으로는 반드시 지켜내야 하는 매우 중요한 전략적 거점이었다. 왜구를 물리친 영웅바위의 전설이라든가 택당집의 이식이 걱정하며 영웅바위의 힘을 빌려 오랑캐를 물리치려했던 시(詩)에 담긴 염원도 다 외적의 침입과 연관된 이야기들이다.

대진은 조선왕조실록에도 수없이 거론되었다. 조선 역시 건국초기부터 왜구를 물리치기 위해 다양한 노력을 기울였다. 왜구가 퇴치되지 않는 한 국가의 안정을 꾀할 수 없었고 바닷길을 통한 경제의 활성화를 이루기가 어려웠다.

왜구로 인해 나라운영이 어려워지자 조선조정은 서산 해미에 읍성을 쌓고 충청도 전역을 다스리는 종2품 충청병마절도사를 둔다. 당진의 대진나루 역시 그 중요성이 강조돼 포승읍 만호리에 종3품 무관직인 수군첨사(수군첨절제사)를 배치함으로써 왜구를 방어하도록 했다. 이런 과정에서 영웅바위도 여러 문헌에 기록되었고 대진의 상징으로 자리매김했다.

이 대목에서 당진의 김대건신부를 고려하지 않을 수 없다. 조선말 김대건 신부가 외국에서의 유학생활을 하는 과정에서 중국에 있는 파리외방선교회를 오가며 선교활동을 했다는 기록이 있다. 당시 파리외방교회 선교사들이 당진에서 선교활동을 하려면 영웅바위를 지나 대진나루에 도착을 해야 했을 것이다.

이렇듯 당진의 대진나루는 조선말 실학을 주도했던 천주교와도 무관하지 않다. 그런 차원에서 대진나루는 서산, 당진, 홍성, 예산 등 충남 서해안 일대에 만연했던 실학 및 천주교 문화, 즉 내포문화와도 밀접한 연관이 있었을 것이다. 김대건 신부와 중국의 선교사들, 이들이 영웅바위를 오가며 무슨 생각을 했을까.